한국프로축구가 출범한 30년을 통틀어 등록된 선수는 총 2,785명으로 이들 중 한 팀에서 만 10년을 활약한 선수는 36명에 불과하다. 우리는 10년을 한결같이 하나의 클럽에 헌신한 이들을 '원 클럽맨'이라 부른다. 원클럽맨이 될 수 있는 확률은 0.12%로 1,000명 중 1명만이 얻을 수 있는 영예다.
곽희주는 수원삼성블루윙즈의 대표적인 '원 클럽맨'이다. 2003년 5월 21일 K리그에 수원삼성블루윙즈의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올해 5월로 데뷔한 지 10년이 된다.
삼성스포츠단에서는 수원 출신으로 박건하, 이운재, 이병근, 김진우, 김대환에 이어 6번째로 '원 클럽맨'에 이름을 올린 곽희주의 스타다이어리를 통해 그의 살아온 길을 살짝 엿보고자 한다.
곽희주 스타다이어리 : 10년 전의 일기를 꺼내어
내게 수원삼성블루윙즈는 첫사랑입니다. 10년 전 보잘 것 없던 내게 다가와 내 심장과 모든 열정을 송두리째 바치게 만든 짜릿한 연인입니다. 수원블루윙즈란 이름만 들어도 여전히 벅차오릅니다.
좌충우돌, 실수투성이였던 꼬맹이는 수원의 따뜻한 울타리에서 수원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10년째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마지막 열정 또한 수원을 위해 쓰고 싶습니다. 이제 보잘 것 없던 나의 가능성을 인정해주고 나를 성장시켰던 수원에서 보낸 10년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2003년 5월 21일 데뷔 전을 치른 곽희주
빨간 유니폼을 거부했던 호기 '수원은 내 운명'
수줍음 많던 열살 남짓 소년은 볼을 차는 게 좋았습니다. 골목 어귀에서 전봇대를 골문 삼아 볼을 찾고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축구선수가 되기로 마음 먹고 축구와 더불어 살던 유년시절은 우울하기만 했습니다.
9살 때부터인가 갑자기 왼쪽 눈이 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축구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었는데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선수 생활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1년에 1, 2승하는 게 고작이었던 팀에서 제대로 된 축구를 배운다는 것 불가능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언젠가는 좋아질 거라 다짐하기도 했지만 악순환의 굴레는 고등학교 때까지도 계속 됐습니다.
패배가 일상 그 자체인 팀에서 체계적인 지도도 받지 못 했고 그러다 보니 무기력함과 나태함에 허덕여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만연했던 구타까지 견뎌야 했으니 한 마디로 '루저의 삶' 그 자체였죠.
고등학교 졸업 할 때 쯤에는 팀이 해체되는 상황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축구를 그만둬야 하는 암울한 상황에 모두들 떠나고 6명만이 남았습니다.
축구 밖에 모르고 살던 자식들이 가여웠던 학부형들은 백방으로 수소문 했고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였습니다. 나와 친구 1명에게 프로팀 테스트에 참가할 기회가 주어진 겁니다. 당시 K리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프로에 입단하는 선수들이 많았을 때라 테스트가 자주 열리던 때였습니다.
내 친구와 나는 1차 테스트를 통과했지만 2차 테스트에서는 나만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막상 프로팀 입단 기회가 열렸지만 이상하게도 기쁘지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제치고 나만 프로에 간다는 게 의리를 져 버리는 것 같은 죄책감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나는 프로팀 입단 대신 광운대 입학을 결정하게 되었는데 그 결정이 곽희주의 축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당시 광운대의 강기욱 감독님과 오승인 코치님 모두 수비수 출신이었는데 축구의 기본도 모르던 곽희주가 수비에 눈을 뜨게 된 겁니다. 그분들의 가르침은 제게 광명과도 같았습니다.
이제와 돌이켜 보면 프로팀 입단을 거절하고 대학 진학을 결정했던 것은 신의 한 수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제가 합격했던 프로팀은 다름 아닌 안양 LG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빨간 색 유니폼을 입고 수원을 상대한다는 게 상상이 잘 안됩니다. 역시 곽희주는 수원블루윙즈에 입단할 운명이었나 봅니다.
(계속)
첫사랑 수원블루윙즈를 만나다
한일월드컵 4강의 여운으로 뜨겁던 2002년 여름이었습니다. 광운대에서 수비수로 뛰며 조금씩 축구에 눈을 떠가고 있던 때, 연습경기가 있다는 얘기에 코치님이 빌려 온 마을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었습니다. 고속도로로 가면 편할 텐데 코치님은 국도를 고집하시더군요. 좁디좁은 마을버스 안에서 찜통같은 무더위를 몇 시간째 견디다 보니 경기도 하기 전에 이미 녹초가 되어버렸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곳은 수원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이었습니다. 우리가 상대할 팀은 다름 아닌 김호 감독님이 이끌고 있던 수원블루윙즈였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코치님이 "오늘 경기는 너 때문에 잡은 거야."라고 귀띔을 해주시더군요. 그때는 뭔 얘기인 지 잘 와 닿지가 않았습니다.
그 날 내 임무는 수원의 특급 외국인 산드로를 집중 마크하는 것이었습니다. 솔직히 산드로가 얼마나 대단한 공격수인 지 잘 몰랐죠. 난 내 스타일대로 산드로를 막아 냈습니다. 악착같이 달라붙었습니다. 내 수비에 막힌 산드로는 페널티지역 바깥으로 나가서 중거리슛으로 골을 만들어 내더군요. 이 날 우리는 0:5로 대패했습니다. 하지만 산드로만큼은 나름 잘 막았던 것 같습니다.
그 해 가을 대학대회 때 윤성효 감독님(당시 수원 스카우터)이 효창운동장을 찾아왔습니다. 경기가 끝났을 때 윤 감독님은 우리 감독님에게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제야 '내가 수원에 입단할 수도 있겠구나'라고 느꼈고 몇 달 전 수원과의 연습경기에서 코치님이 한 말이 떠올랐고 이해가 됐습니다.
그 때 즈음 수원을 대표하던 공격수 박건하 형이 수비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수비수로 치른 첫 경기를 TV로 지켜봤고 그 때까지만 해도 수원블루윙즈는 TV 안에만 존재하던 팀이었을 뿐 내가 몸담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팀이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에서 2003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TV를 통해 지켜보던 수원블루윙즈는 내가 뼈를 묻어야 할 팀이 되었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전까지는 꾸지 못했던 꿈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수원 입단이 확정되고 숙소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워낙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어 눈치만 보고 있을 때 김호 감독님이 부르시더군요. 인사를 드리자 의무 트레이너를 부르더니 "희주는 착한 아이니까 잘 좀 해주라."고 하시더군요. 김호 감독님은 어린 선수들에게 축구 뿐 아니라 일상까지도 꼼꼼히 챙겨 주시던 할아버지같이 푸근한 분이셨습니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서정원 감독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대학 때 경험하지 못한 훈련 시스템에 혼란스러워 매 훈련마다 선배들에게 핀잔을 들어야했습니다. 자신감은 바닥까지 뚝뚝 떨어졌죠. 서 감독님은 나를 따로 불러 "희주야! 대학 때처럼 편안하게 해."라고 다독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 한 마디보다 서 감독님의 따뜻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표정에서 느껴지는 배려는 수원의 감독에 오른 후에도 변치 않는 것 같습니다. 선수들이 서 감독님을 가슴 깊이 따르는 이유인 것 같습니다.
2004년 주장을 맡았던 이병근 코치님은 순수한 웃음으로 솔선수범하던 선수였습니다.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진실'이라는 말을 강조하셨던 분으로 기억이 납니다.
고종수 코치님은 2004년 복귀할 때 만났습니다. 한 마디로 멋졌습니다. 특히 자기가 하고 싶은 얘기는 자신있게 하던 모습을 볼 때면 내성적인 나로서는 부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10년이 지났습니다. 긴 세월이었네요. 그 동안 수원은 3명의 감독님이 거쳐 가셨고, 그 분들과 함께 저는 두 차례 K리그 우승과 두 차례 FA컵 우승, 두 차례 리그 컵 우승 등 10번의 우승 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2008년 K리그 우승 당시 차범근 감독과 함께
수원블루윙즈는 각급 대표를 거쳤던 것도 아니고, 출신 학교도 크게 내세울 게 없던 내게 처음으로 관심과 기대를 보내 준 팀이었습니다. 누군가 '곽희주에게 수원블루윙즈는 어떤 의미냐?'고 물을 때면
'첫 사랑'이라고 답하는 이유입니다.
등번호 29번에 숨겨진 '무단 이탈' 스토리
나를 기억하는 모든 분들은 등번호 29번을 떠올리시겠지만 2003년 입단할 때만 해도 내 등번호는 6번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달기 시작한 29번이라는 등번호에는 곽희주의 절망과 일탈, 그리고 되찾은 희망이 뒤엉킨 좌충우돌 이야기가 숨겨져 있습니다. 한 번 들어 보실래요?
수원에 입단한 후 6번이라는 등번호를 받았을 때 의아했습니다. 대단한 이력이 없던 신출내기 선수가 수원을 대표하던 이기형 선배가 달던 그 번호를 받을 줄이야. "6번은 베스트로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주는 번호잖아.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 주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만큼 김호 감독님은 내게 많은 기대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해전지훈련부터 매 순간 100% 이상을 다했습니다. 부족한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2003년 5월21일 울산과의 원정경기 때 마침내 선발 기회를 얻었습니다. 전 경기에서 김영선 형이 부상으로 다치면서 갑자기 찾아온 기회였습니다.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프로의 벽은 높았고, 신출내기였던 나는 역시나 둔탁했지만 큰 실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입단 첫 해 11경기를 뛰었습니다. 좌충우돌했지만 자신감을 갖기에 충분했죠.
2004년 등번호 29번과 함께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김호 감독님이 물러 나시고, 차범근 감독님이 부임하면서 내게 주어진 등번호는 29번이었습니다.
나는 조금씩 잊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군도 아닌 3군까지 내려가야했습니다. 절망했고, 축구가 싫었습니다. 무작정 도망쳤습니다. 유럽전지훈련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바람이 쐬고 싶어 충남 대천 바닷가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창엽 트레이너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한 식당에서 마주쳤는데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훗날 알고 보니 내 핸드폰을 위치추적했다고 하더군요.
이 선생님은 나를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나즈막히 "네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이 한 마디에 두 말 않고 수원으로 복귀했습니다.
무단 이탈이라는 큰 사고를 친 나는 임의 탈퇴가 된다고 해도 달게 받을 각오가 돼있었습니다. 하지만 차 감독님은 내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솔직히 프로의 벽은 대단히 높았습니다. 감독님의 기대에 부응하려다 보니 실수가 잦았고, 의욕을 앞세우다 실점을 자초하는 경우도 늘었습니다.
대표적인 경기가 2004년 4월10일 전북과 홈경기였습니다. 언론에서는 10년만에 K리그로 돌아온 차범근 감독님의 복귀전이라고 관심이 집중되던 이날 나는 자책골을 넣고, 패배의 멍에를 뒤집어 쓰고 말았습니다.
차감독님은 나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꾸준히 경기에 나섰지만 실수는 반복됐습니다. 개막전 자책골을 마음에서 떨쳐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수원 팬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거칠기만 하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는 저런 선수를 왜 쓰느냐"는 것이었죠. 차 감독님도 크게 부담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감독님은 묵묵히 제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셨습니다.
더는 한 눈을 팔 수 없었습니다. 나는 스스로를 위해, 수원을 위해, 감독님을 위해 머뭇거려서는 안됐습니다. 한 팬이 얘기해주시더군요. 끔찍할 만큼 덥던 2004년 8월21일 전북과 컵대회 홈경기를 마쳤을 때 양팀 선수들 모두 주저앉았지만 나 혼자 더 뛸 수 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서있더라구요. 당시 내 마음가짐이 정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그해 K리그 37경기를 모두 교체 없이 뛰었습니다. 그리고 감격적인 K리그 우승컵을 두 손에 안았습니다. 연말 시상식 때는 그야말로 수원 풍년이었습니다. 베스트11에는 무려 6명의 수원 선수들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이운재, 나드손, 김두현, 김대의, 무사 등 기라성같은 선수들의 이름 옆에 '곽희주'라는 이름도 함께 써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철모르고 저질렀던 실수였습니다. 철부지같은 실수를 탓하지 않고 끝까지 믿어주진 차범근 감독님과 코치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립니다. 등번호 29번을 어떻게 생각하냐구요? 이제는 어떤 번호와도 바꾸지 않을 만큼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