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어봐서 아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하나,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죽음 그 너머에는 어둠을 느낄 시각이 없다.
침묵을 들을 청각도, 무감각을 느낄 촉각도 없다.
공기에 실려 떠다니는 21g의 발 없는 영혼이 되는 것도 아니요,
생각을 가진 무색무취무형태의 사념체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사는 동안 그리도 숱하게 들었던 사후세계의 영혼 한 조각 없이
두문불출 출몰 했던 곳은 아내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밤이면 친구들 술자리에 불려나가 안주감이 되어 씹히는 일도 있었고,
어머니 따뜻한 손에 쓰다듬어지는 사진 속 고등학생이 되는 일도 있었다.
아버지의 담배 연기가 되어 쓴 한숨에 섞여 뭉게뭉게 피어난 적도 있었고,
무거운 침묵과 같은 비보가 되어 초등학교 동창들의 어께를 짖누른 적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자, 무존재였으며, 죽어 잃어버린 신체와 말,
생각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나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공기처럼 아내의 곁에 항상 머물렀다.
자의와는 상관없는 아내의 기억 속 추억이나, 행동 속 습관이 되어 불현듯
나타나고 사라짐을 반복했다.
생전에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 아내가 나를 '그이' 라 부르는지 조차 몰랐지만,
내가 죽은 이후로 아내에게 나는 항상 그이였다.
새벽같이 이른 아침부터 집안이 부산스러웠다.
어깨선을 조금 넘는 짧은 머리 곱창끈으로 야무지게 졸라 묶은 아내가
귀여운 곰이 눈을 땡그랗게 부라리는 담요와 집체만한 노랑 병아리
그림이 있는 담요를 서로 뒤엉키듯 감아 자동차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지고 그 밑에 김밥 다섯줄이 담긴 은박지를 담은 검은 봉투를 낑궈넣었다.
범퍼 오른 이마가 깨져 함몰되고 이곳저곳 도색이
벗겨진 나의 애마, 흰색의 98년식 올뉴 아반떼.
아내는 자신을 위해 자동변속기가 달려있는 신차를 구입하길 원했었지만,
내가 뽑았을 신형 소나타를 사기 위해서 모아뒀던 돈은 대부분 우리의 각종
대소사 생활과 품위유지에 투자되었기에 바람처럼 사라졌다.
아내는 클러치 위에 발을 올리며 볼을 부풀렸지만,
시동 한 번 꺼먹는 불상사 없이 유유히 차를 움직였다.
서해의 겨울바다, 특히나 오이도 같은 곳에는 깡패 같은 찬바람과
무한리필 조개구이 밖엔 없다. 자신이 그 증거라는 듯 가슴에 담요를
꼭 끌어안은 아내의 뒤에서 ‘조개구이가 무한’ 현수막이 지랄 맞게 펄럭이고 있었다.
5초가 머다 않고 훌쩍이는 아내의 코끝이 다홍빛으로 달아올라있었다.
함께 갔다면 분명, “그러니까, 겨울바다가 뭐가 그렇게 보고 싶어서 이리 벌벌 떨어!” 하고
핀잔을 줬을지 모른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감기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아내의 모습이 선하기만 했다.
모래사장에는 아내처럼 겨울바다 구경 왔던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버린 잡쓰레기가 낭만처럼 굴러다녔고,
아내는 그 볼품없는 바닷가 얼음장 같은 콘크리트 재방 위에
곰탱이 담요 반 접어 깔고 앉아 병아리 담요를 머리끝까지
둘러맨 채 봉투에서 김밥이 담긴 은박지를 꺼내들었다.
병아리 담요 밖으로 빼꼼 내민 손가락 끝에서 하염없이
나부끼는 검정 봉투를 어찌해야 하나 덤벙이던 아내는
저 멀리 보이는 모래사장의 쓰레기들과 어울리라는 식으로 봉투를 냅다 던졌다.
자신을 쓰레기 취급하는 인간에게 화가났을까.
거친 바람을 대동한 검은 봉투가 아내의 뺨을 후려치듯 들러붙으며 푸드득 날갯짓을 했다.
한 자락 봉투에 불시공격을 받은 아내가 배도 한 척 떠다니지 않는
썰렁한 바다를 향해 만세를 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내가 잠깐 당황해하는 사이에 씻겨나듯 봉투는 바람을 타고 겨울바다를 향해 몸을 띄웠다.
자유부향하는 검은 비닐이 바다에 담굼질하기 시작한 태향을 스쳐지나면서,
나는 스물 넷의 젊은 청년이 되어 아내의 잡념의 파도를 넘실거리는 유람선에 올라있었다.
젊은 날에 섬을 찾아나선 일이 있었다.
하루 배가 두번 정박하는 소박한 섬.
차를 타고 섬 둘래를 한 바퀴 도는데 시간 반 비슷하게 소요될 듯 싶은 곳이었다.
관광지스럽지 않다는 것이 애기같이 어리고 여린, 아직 여자친구였던 아내의 첫마디였다.
확실히 민박이나 여관이 즐비해 보이지도 안았고, 횟집과 고깃집이 밤거리를 수놓는 풍경도 없었다.
짐을 풀기도 전에 회를 못먹는 아내를 위해 메뉴판 대신 거미줄이
천정에 붙은 중국집에서 요기를 하고, 잠깐 들렸다 가자는 식으로 바다를 거닐며 발을 적셨시다,
사진을 찍다, 웃다, 수다를 떨다, 어느세 땅거미가 저가는 짙은 하늘을 의식했다.
무엇보다 바람이 차서 몸이 떨렸다.
"이제 그만 들어가자?"
"어딜?"
"어디는? 방에."
"응? 집에 가야지. 엄마, 아빠 기다리셔."
"집에? 우리가 타고온 배가 오늘 마지막 배잖아."
아내는 가느다랗게 뜬 실눈을 흘기며 "그럴 줄알았어." 라고 속삭이듯 말했다.
아내의 속삭임이 살갗을 간지르듯 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그럼 어떻게해? 우리 어디서 자? 새우잡이 통통배라도 타고서 돌아가야하는 거 아니야?"
너스레를 떠는 아내가 앞장서듯 모래사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등뒤에 뒷집져있는 양 손으로 누렇게 변색된 단화가 달랑거렸다.
나는 팬션이 어디에 붙은지도 몰랐다.
팬션은 인터넷으로 아내가 예약한 곳이었다.
"늑대."
아내가 뒤돌아섰다. 아마도 최대한 살벌하게 째려보려던 생각이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귀염상도 그런 앙증맞은 상이 없었다.
"여우. 불여우."
"손만 잡고 잘꺼야."
"우리 한 방에서 자?"
"어우, 야~."
아내가 하는 '순진한 여자친구 꼬드겨 배떠난 섬에 못된 짓할 궁리만
잔뜩인 그렇고 그런 남자친구와 고립 된 어쩔 수 없는 하룻밤' 이란 상황극에
장단을 맞춰주지 않자, 하는 애교였다.
예약한 것은 분명 민박이 아닌 팬션이었다.
뻑뻑해 잘 밀리지 않는 창문과 촌스러운하늘색 꽃무늬 벽지,
벽지와 쌍으로 노는 파란지 퍼런지 때가 타고 보풀이 뭉친 이불이 구석에 처박힌
방 한 칸은 그냥 민박이라고, 아니 그냥 빈 방이라고 불러도 상관 없을 듯 생각되었다.
성수기를 피해 떠난 유월 초의 팬션은 냉골방도 그런 냉골방이 따로 없었다.
보일러를 넣어달라고 요청을 하자, 주인집 아주머니가 혀를 끌끌 차며
젊은 것들이 라는 식으로 핀잔이란 핀잔은 다 떨어놓고 결과적으로
보일러를 땔 기름이 업다며 거절을 했다.
정말 나쁜 아줌마다.
10분가까이 아줌마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아내는 벽에 붙어 앉아있었다.
"기름이 없어서 못켜준데." 라고 전하며 아내의 옆자리에 앉자,
아내는 어깨를 으쓱할 뿐 더 다른 말이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보일러 불 따위를 켰다면, 둘다 타죽었을지 모른다.
말도 없이 주욱 앉아있던 시간에 서로 볼의 뺨에 집혀진 불덩이가 수줍게 이글거리고있었다.
만약 아내가 만들었던 상확극이 진짜였다면, 나는 그 밤을 위해서 뭐든지 했었겠지.
항구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바다 한 복판 까지 헤엄을 쳐서 배 기름통에 구멍을 냈을 것이다.
빨리 달이 뜨도록 해에게 돌팔매질을 해서 쫓아냈을 것이다.
오이도의 바다에 핀 불덩이도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네 줄의 김밥이 얼음장 같은 콘크리트 위에서 얇상한
은박지 이불 덮은 채 온 몸을 쪼그라트렸다.
"자기, 나 갈게."
아내가 말했다. 여편네는 내가 바다에도 있는 줄 알았나보다.
당연한 소리지만, 사람만큼 쓸데없는 일에 전전긍긍하는 동물이 없다.
내가 죽어봤기 때문에 잘 알고있다. 오늘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은 후회할 것이다.
그 증거로 나는 벌벌 떨고있는 아내의 작은 어깨를 마지막으로 감싸줬던 시간이 벌써 3년이나 지나버렸다.
아내를 남기고 일찍 떠나는 나 같은 놈은 그냥 바보다.
아니 바보도 싼 표현이다. 병신이다. 상병신.
- 3부 끝 4부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