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에서 창당의 주역이었던 천정배, 정동영 등은 엄숙한 목소리로 창당선언문을 낭독했다. 핵심내용은 '밀실야합과 국민을 분열시키며 기득권을 지켜왔던 지역주의의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국민통합과 정치개혁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
그러나 그들은 불과 4년 뒤, 대선승리를 위해서는 열린우리당을 깨고 새로운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당 해체 작업에 나선다. 지금 야권분열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는 김한길이, 그 때 당시에도 분열행렬의 맨 앞에 서있었다.
이에 대해 2007년 5월 7일, 생전의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쓴 글이라며, 피를 토하는 듯한 심정의 글을 발표한다.
그때그때 편의에 따라 '분열'과 '통합'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며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렸던 천정배와 정동영, 그리고 김한길. 구태에 찌들은 그들의 반복되는 행보를 보면서… 노무현 대통령이 그때 당시 전했던 경고의 말들을, 새삼 곰곰이 되새겨 볼 것을 충고하는 바이다.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
최근 정치상황에 대한 심경을 밝힙니다
'성공한 대통령'. 당선자 시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덕담으로 이 말을 해 주었으나 저는 한 번도 시원하게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 중 략 )
제가 말한 '정계개편'은 그동안 우리 정치에 자주 있어 왔던 정계개편과는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하여, 국회의 다수를 만들기 위하여 원칙 없이 편의에 따라 정치를 왜곡시킨 그런 이합집산이 아니라, 일그러진 우리의 정당구도를 바로잡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정치를 정치답게 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 중 략 )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말하는 통합신당은 무슨 당입니까? 과연 지역당이 아니고 창당선언에서 다섯 번이나 강조했던 국민통합당이 맞습니까? 통합신당이 무슨 당이든, 당신들이 하는 대로 하면 과연 통합신당이 되기는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면 과연 대선에서 이길 수 있는 것입니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열린우리당 창당의 정신에 맞는 일입니까?
2003년 11월 11일 열린우리당 창당대회에서 당신들은 많은 국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엄숙한 목소리로 창당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그 선언문은 낡은 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는 말로 시작하여 '국민통합과 정치개혁'이라는 역사적 소명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페이지 정도의 내용에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국민통합의 정치를 하겠다는 말이 다섯 번씩이나 나옵니다.
과연 당신들이 이 선언문을 낭독한 사람들이 맞습니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에 맞는 정치입니까?
제가 보기에는 구태정치로 보입니다. 대통령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기 위하여 당을 깨고 만들고, 지역을 가르고, 야합하고, 국회의 다수당이 되기 위하여 정계개편을 하고, 보따리를 싸들고 이당 저당을 옮겨 다니던 구태정치의 고질병, 당신들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면서 엄숙한 표정으로 국민들에게 청산을 약속했던 그 구태정치의 고질병이 다시 도진 것으로 보입니다.
당이 어려우면 당을 살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당원에 대한 도리이자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가망이 없을 것 같아서 노력할 가치도 없다 싶으면 그냥 당을 나가면 될 일입니다. 그러면 끝까지 창당정신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이라도 남아서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굳이 당을 깨려고 합니까? 당을 깨지 않고 남겨 두고 나가면 혹시라도 당이 살아서 당신들이 가는 길에 걸림돌이 될 것 같아서 두려운 것입니까?
설사 그렇더라도, 일부는 당을 박차고 나가서 바깥에 신당을 조직하고, 일부는 남아서 당이 아무 일도 할 수 없도록 진로방해를 하면서 당을 깨려고 공작하는 것은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정치는 잔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잡한 분석과 수읽기, 거기서 나오는 잔꾀는 한계가 있습니다. 적어도 지도자라면 그런 것에 기대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 중 략 )
◇ 창당정신으로 돌아가 정도를 걷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지난 20년 동안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정치를 해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열린우리당 정치인들에게 간곡히 충고 드립니다.
정치는 가치를 추구하는 행위입니다. 대의를 높이 받들고 원칙을 좇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가치와 노선에 따라 당을 같이 하는 것이고, 각 당은 그 가치와 노선에 맞는 후보를 내는 것입니다. 특히 대선에서는 당과 후보의 가치와 노선이 분명해야 합니다.
설사 가치와 노선이 맞아서 통합신당을 하더라도 당을 가지고 통합을 하는 것이지 당을 먼저 해산하고 통합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동서고금에 그런 통합을 본 일이 없습니다. 당을 해산하고 누구와 통합을 한다는 말입니까? 어느 당에 입당을 한다는 말입니까?
굳이 당을 해체하자는 것은, 희생양 하나 십자가에 못 박아 놓고 '나는 모른다. 우리와는 관계없다'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보자는 것 아닙니까? 스스로를 속이고 국민을 속이는 일입니다. 아무리 열린우리당에 대한 여론의 지지가 낮다 해도 이런 식으로 정치하면 안 됩니다. 정말 당을 해체해야 할 정도로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깨끗하게 정치를 그만두는 게 국민에 대한 도리입니다.
( 중 략 )
어떤 사람들은 '대통령은 이번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내년 총선을 위해 영남신당을 만들려고 한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대통령이 그래서 통합에 반대한다고 말을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한마디로 모함입니다. 대통령의 얘기를 함부로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발상은, 지난 20년 간 일관되게 고수해 온 '정치인 노무현'의 원칙이나 실제 정치행위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지역주의가 나라를 망치고 정치를 망쳐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그 피해를 가장 처절하게 체험한 정치인이 노무현입니다.
아무리 정략적 모함을 하더라도 도를 넘어서는 안됩니다. 정치인 노무현이 살아온 정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모함은 그만두길 바랍니다.
지역주의는 나라 정치를 망칩니다. 지역 정치는 경쟁 없는 정치를 만듭니다. 경쟁이 없는 정치는 정치의 품질을 낮추고 정치를 부패하게 합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나타난 공천헌금이 그 증거입니다.
지역정치는 호남의 소외를 고착시킬 것입니다. 호남-충청이 연합하면 이길 수 있다는 지역주의 연합론은 환상입니다. 상대가 분열하지 않는 한 호남-충청의 지역주의 연합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지난 두 번의 선거를 정확하게 따져보면 분명해집니다. 현실의 승부에서도, 역사에서도 승리할 수 없는 길입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 선언문, 지금 읽어 보아도 감동이 있습니다.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결단, 희생과 헌신, 열정이 엉겨 있습니다. 인생을 바쳐 이루어 내야 할 가치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후손들에게 자랑스럽게 물려주어야 할 도도한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그 글을 붙입니다.
2007년 5월 7일
이 글은 '대통령 노무현'이 아니라 '정치인 노무현'으로서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