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위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계속해서 변화해 왔으며, 그 당위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후자는 그 이름이 계속해서 변해왔는데, 중세에는 죄 (sin), 근현대에는 범죄 (crime), 그리고 당대에는 질병 (illness)이라는 기표 아래 고정되어 왔다. 죄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로, 주로 종교적인 신이었고, 범죄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법률, 즉 국가와 사회이며, 질병의 존재를 담보하는 것은 감각적이며 물질적인 현실과 그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인식이다. 그리고 바로 이 담보자들이 각각 그 시대적 "당위"를 품고 있는 것으로, 각 시대에 당위가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죄를 지은 죄인은 신 앞에 죄를 지은 것이며, 이는 다시 말해, 이 단계에서 우리의 삶의 당위란 신 앞에 떳떳해야 함을 가리킨다. 반면 범죄를 지은 범죄자는 국가와 사회의 법률적 규약을 위반한 것으로, 그 책임 소재는 국가와 사회에 속한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존재한다. 즉 범죄의 단계에서는 우리의 삶의 당위가 사회적으로 구성됨을 가리킨다. 마지막으로 질병에 걸린 이는 더 이상 죄인이나 범죄자가 아닌 한 명의 환자이며, 질병이란 자연적인 상태에 어떤 어긋남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연적 상태는 다름 아닌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현실로부터 구성되어 정의되며, 이러한 자연 혹은 현실은 우리에게 인식된 것으로 밖에는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우리의 삶의 당위는 우리의 현실과 현실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한 사유가 변화하게 되면 죄와 관련된 모든 종류의 사유가 당연히 그 변화 속에 함께하며, 어떻게든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게 된다. 그 중에 물론 "죄책감"의 개념 역시 있게 된다.
죄책감의 "감"이라는 글자는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다. 이는 죄책감을 단순한 하나의 감정으로 환원시킬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의 감은 어떤 감정이기 이전에 그 감정을 유발하는 것을 전제하고 있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슬픔의 감정에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어떤 대상이나 상황이 있고, 기쁨, 노여움, 즐거움 역시 마찬가지이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유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죄의식이다. 이 죄의식이 죄를 범하는 자신을 의식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할 때에, 이러한 죄의식은 하나의 자기의식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죄의식을 거슬러 올라가 닿는 것, 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것이 바로 "죄"의 개념이다. 앞서 "떳떳함"이라고 칭하였던 것이 당위의 충족으로부터 오는 어떤 충만한 감정이라면, "죄책감"이란 그 당위에서 벗어남, 거스름, 혹은 어긋남에서 오는 불안한 감정이다.
따라서 결국 당위에 대한 사유와 죄책감에 대한 사유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다닐 수 밖에 없는 것임이 드러난다. 만약 당위가 초월적 존재, 이를테면 신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믿는다면 죄책감의 그 불안함 역시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일 수 밖에 없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어떤 입장을 취하든지 상관없이, 죄책감 역시 초월적,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게 된다. 반면 당위를 사회적인 것 혹은 인식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그 불안함의 근원 역시 사회적 혹은 인식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다만 이 구분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가의 문제에 해당한다. 만약 불안 자체의 근원을 분석한다면 어떨까? 말하자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경우에 왜 불안을 느끼고 죄책감을 느끼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가 불안이라는 것 자체를 왜 느끼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또한 유사한 구도로 나누어질 수 있을텐데, 그러한 불안이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는 크게 이데아적, 목적론적 사유 ("바람직한"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추동력이 불안의 근원)와 실존적 사유 (실존하는 인간 존재의 근본 정서가 바로 불안)가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는 불안이 선험적인 존재의 속성이라면, 후자에서는 실존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후험적인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구분은 관념적으로 의미가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어느 해석을 보더라도,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우리가 애초에 그런 존재의 불안을 배제할 수 있는 방법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불안한 존재로 태어나 이 세상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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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죄책감이라는 화두에 대해 전에 썼던 글입니다. 비만을 질병으로 보는 것은 의학적 관점에서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얄궃은 것은 과거 "죄"로 이해되던 것이 이제는 "질병"으로 이해되는 현상 속에서, 하나의 질병인 "비만"이 거꾸로 죄의 개념으로 소급된다는데 있습니다. 당위를 질병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프레임에서는 불안한 감정을 유발하는 자기의식에 맞서 있는 대상이 결국 타자인 셈인데, 여기서의 타자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고유한 특성을 가집니다. 바로 인간의 한계가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원죄의 개념을 보면 인간의 한계는 판단의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데서 발생한 원죄에 대해 그 후손인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일을 내가 지은 죄로 말하는 것은 현대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적인 책임의 개념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내가 무엇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야기하거나 방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바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비가 오고 오지 않는 것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내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장마나 가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만과 장애의 구별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이루어집니다.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불의의 사고 혹은 원인불명의 심각한 질환으로 야기된 상태는 당사자의 책임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비만은 당사자의 의지와 선택과 관계하므로 당사자의 책임으로 돌리게 되는 논리가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확히 동일한 논리로 끔찍한 흉악범죄에 대한 동정론 혹은 정상참작이라는 기제가 성립합니다. 연쇄살인마의 엽기적 살인행각이나 강간범/소아성애자의 성적 충동을 불우한 가정환경이나 성장환경의 트라우마로 분석함으로써 "당사자의 의지 바깥의 요소"로 책임 소재를 전가 혹은 분산시킬 때에 작동하는 논리가 바로 이러한 책임 개념에 기반한 논리입니다.
과학은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의 범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으며 기술/공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범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과학기술의 패러다임 하에서 인간은 알 수 없고 할 수 없는 것의 경계에서 윤리적 판단 역시 내리게 되는 것은 충분히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프레임 내에서 한편으로는 살인을 정당화하면서 한편으로는 비만을 (현대적 개념에서의) 죄 혹은 악덕으로 몰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단지 합리적 윤리학의 패러다임만이 아니라 감각적이고 피상적인 자극에 대한 집중과 배타적/자기과시적 권력욕을 특징으로 가지는 문화의 속성 (문화의 이러한 속성은 현대의 후기자본주의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음)과 이미지화-상품화의 강한 객체지향/물화지향을 보이는 후기자본주의적 패러다임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위의 합리주의적 패러다임과 맞물려 상당히 파괴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중세시대의 건축이나 의복의 화려함에 집중되던 노동력과 자본력이 지금은 인간의 신체 역시 그러한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분히 인간의 신체에 대한 과학적 이해 및 기술/공학적 성과가 비약적으로 눈부신 성과를 이루어냈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인간의 신체를 엔지니어링할 수 있는 과학기술적 역량을 갖추게 됨으로써 인간 신체를 상품으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비만을 악덕으로 보는 관점을 조금만 비틀면 인간의 수명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장수하지 못하는 것도 놀림감이 되고 암에 걸리는 것도 창피한 일이 되는 시대가 곧 도래한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