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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글] 명성에 비해 실체가 전혀 없는 미스테리한 인물, 김덕령
게시물ID : history_65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ungsik
추천 : 6
조회수 : 181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12/01 20:50:10



조선시대의 의병장이자 선조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명장이란 이미지가 강한 김덕령,

그에 관한 흥미로운 신불해님의 글이 있어 퍼와봅니다.








일전에 김덕령 가지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실록에는 김덕령의 공적이 없다, 다른 사료는 어떠한가, 에서 토탈워 카페에서 이야기가 나온 중에 유문기 님이 관련 사료를 참조해주셔서 전에 올린 이야기에 덧붙이는 글입니다.





김덕령의 명성은, 임진왜란에 참여한 조선 측 인사 중에서도,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그 다음에 나올 정도로 워낙 유명하고, 사람들에게도 비교적 인식이 잘 되어 있죠. 뛰어난 용장이면서 억울하게 죽은 케이스로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실제 기록을 보면, 명성에 비해 뭔가 좀 실체라고 할만한게 없습니다. 




일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 중에, 실제로 김덕령의 공적이라고 확인되는 전과는 오직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1594년 9월 2일 권율이 선조에게 보고한 내용이 바로 그 내용입니다.



조 55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9월 2일(정축) 3번째기사 

도원수 권율의 전과에 대한 치계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馳啓)하였다.

“왜적(倭賊) 2백여 명이 고성(固城) 지방에 하륙(下陸)하여 멋대로 노략질을 하는데 복병장(伏兵將) 최강(崔堈)이 소탕해 잡아들이지 못하였으므로 김덕령(金德齡)으로 하여금 군사 2백 명을 뽑아 힘을 합해 복병을 설치하게 하였습니다. 적이 남녀 50여 명을 사로잡아 갈 적에 복병이 싸우다 후퇴도 하며 혹은 요로(要路)로 곧장 달려가 숨어서 요격한 결과 비록 1급(級)도 참획하지는 못했지만 잡혀가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모두 데려왔습니다.”





왜군 200여명이 노략질을 하자, 권율의 명령으로 김덕령이 200여명을 이끌고 복병을 하여, 적을 공격했는데, 사로잡혔던 사람들은 다 구출은 했는데 왜군은 단 한명도 죽이지 못했다는 겁니다.




사실 좀 전과라고 부르기도 그런 수준입니다. 특히, 여기서 적군은 단 한명도 참획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아군의 피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어서 이 과정에서 몇명이 죽었는지 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공적" 에 대한 언급이 실록 내에 있는것도 오직 이 한 사례 뿐입니다. 나머지 기록에서, 김덕령이 실제로 적과 교전 - 무찔렀다는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임진왜란의 각종 전투에 대한 기록이 오직 조선왕조실록에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다른 의병장의 경우에도, 실록의 내용으로만 확인하면 전과가 극히 적게 기록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확실한건 실록에 크게 실릴만한 전과는 따로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기록에서는 어떤가?




당시 의병장이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亂中雜錄)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김덕령의 공으로 언급되는 기록은 없고, 정작 이런 기록이 있는데,



"김덕령을 잡아다 문초하였다. 이때에 김덕령이 두치복병장(豆恥伏兵將)이 되어 군사를 일으킨 지 3년에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한갓 잔혹(殘酷)한 것만 일삼아서 무죄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라고 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견을 전혀 넣지 않고, 일단 되는대로 각종 문집과 야사등을 총합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의 경우에도, 곽재우나 정문부 정도의 군공을 김덕령이 해내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김덕령의 기록이 없지는 않은데, 대체적으로



용맹했다, 지략에 능했다, 가토가 두려워했네, 명나라와 왜국에서도 그 용맹함을 무서워했네 등등



그럴듯한 이야기만 잔뜩 있지만 실제 군사적인 공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신경이 쓴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의 경우에, 애시당초 학술이라기 보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책이라 역사적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고 할 순 없지만, 일단 거기서의 언급을 또 보면,



 "그가 타는 백마도 그 사람같아 하루 천리를 달리고 가는 곳마다 승전하고 포위를 뚫고 전진에 뛰어들기를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왜적들이 서로 돌아보고 어이없이 놀라며 부르기를, ‘비장군(飛將軍)이다’ 하고, 그가 지나는 곳에는 모두 칼을 거두고 피하며 감히 교전하지 못하니, 위세와 명성이 크게 떨쳐, 용사와 무부들이 구름과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영남에 진입하였는데, 적들이 듣고 여러 곳에 유둔한 적병을 거두어 한 곳에 합쳐 대군(大軍)을 만들어 가지고 항거하였다.





뭔가 거창하긴 한데, 기본적으로 연려실기술과 다를게 없습니다. 명성이 엄청나고 적들이 두려워했네, 용맹했네, 이런 이야기는 있어도 구체적으로 대체 어떻게 적군과 싸웠고, 어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하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김덕령이 초창기에는 다른 의병군의 부장으로 활동하다가 부모 문제로 낙향 후 독자적으로 재봉기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부장 시절에 올린 군공이 있고, 그것때문에 평이 좋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호남 출신 의사들을 기록했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서, 의녕에서 곽재우와 함께 적을 기습하여 적의 절반을 익사시킨 전공이 드디어 하나 나옵니다. 이게 적이 강을 건널 때 사용하는 표목을 강 깊은 곳에 세워서 이들을 유인한 후 야습으로 전멸시킨 것인데, 그런데 적군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즉, 규모가 그리 대단하지 못한, 사소한 전투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시당초 실록에도 이 일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실록에서 김덕령이 군사를 일으켰다고 언급되는것은, 1593년의 기록인데, 이 당시에 대해,


선조 46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12월 29일(무인) 2번째기사 

병조 판서 이덕형이 중국군의 동태와 김덕령에게 일면의 방어를 맡길 것 등을 아뢰다


(생략)그리고 김덕령(金德齡)의 군대가 거의 3천여 명이나 되는데 기마병(騎馬兵)이 날래고 건장하여 군용(軍容)이 매우 성대하다고 합니다. 



거느린 군대 숫자가 꽤나 크다는 말은 하지만 특별히 전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없고

그 전에 보면 선조가 김덕령이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묻자 유성룡이 그 사람 나이는 28세인데 

지략에 대해서는 특별히 들어본게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무엇보다, 1594년의 기록에서부터 이미, 김덕령이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 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선조 47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월 5일(갑신) 1번째기사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김덕령은 아직 공을 세우지 못했으니 갑자기 고관(高官)에 제수하기는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선전관(宣傳官)은 내신(內臣)이므로 서관(庶官)에 견줄 것이 아니니 우선 선전관에 제수하고 그대로 충용장(忠勇將)이라는 명칭으로 군대를 통령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하니, 상이 따랐다.


 


또 며칠뒤에는 선조가 악비조차도 신중하게 했는데 스스로 진을 치고 단기로 적을 쳐바를수 있다고 말하는거 보면 크게 쓰면 안되겠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이 시점까지 김덕령이 특별히 이름 날릴만한 전과를 보여준적 없다는 소리고






다음해 1월 쯤에 선조가 이항복에게 김덕령에 대해 묻자


"잘 모르겠다. 용력은 뛰어나다. 지려(知慮)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용렬하진 않다."




1595년 2월 6일에는 선조가 이항복, 김응남등과 이야기 하는데

김응남은 "장수 중에 오로지 이시언만이 김덕령이 쓸만한 사람이라고 말하니 둘이 힘을 합치게 하면 어떨까."


이렇게 말을 합니다.





1595년은 대체로 그런 식으로 가고




1596년 1월 13일의 기사를 보면 이제는 급기야,


김덕령이 관하管下도 아니고 군령도 아니고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세 명 때려죽였는데 선조가 사면을 명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사헌부에서는 김덕령 벌주자고 하는데 선조가 흉적이 국경에 있는데 용사를 죽이는건 불가하다


이렇게 대답하고


사헌부가 또 이렇게 주장하자 선조가 따랐다고 하면서


대신들간에 논의가 벌어지는데



선조 71권, 29년(1596  / 명 만력(萬曆) 24년) 1월 17일(갑신) 2번째기사 

조강 후, 제주 방어 조치와 주문의 내용, 충청 목사의 적임자 등을 논의하다


호민이 아뢰기를,


“김덕령(金德齡)이 살인한 일은 극히 놀라운 일이니, 대간이 논한 바가 극히 타당한 것으로 국문하여 죄를 정하는 것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적의 진퇴를 아직 알 수 없고 나라의 성패 또한 헤아릴 수 없는 터인데, 이 때를 당해 하나의 장사(壯士)라도 잃는 것은 좋은 계책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법을 맡은 관원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특별히 정국(停鞫)을 허락하고 형틀을 풀어주어 그로 하여금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충성을 바치게 하소서. 이것이 



사람을 쓰는 활법(活法)인 것입니다. 대신에게 문의하여 조처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이 말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고, 지평(指平) 이형욱李馨郁은 아뢰기를,


“덕령은 놓아줄 수 없는 중죄인이거니와, 일찍이 털끝만한 공로도 기록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를 완전히 석방하여 무장들의 방자한 습성을 열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폐단이 장차 사람의 목숨 보기를 초개같이 여기는 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덕령의 살인은 실로 놀라운 일인데, 주현(州縣)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피살된 집 또한 감히 고발하지 못하였으니, 나라에 기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해평 부원군(海平府院君)이 내려간 후에 비로소 계문(啓聞)하였으니, 방백(方伯)이 있다 할 수 있으며, 어사(御史)가 있다 할 수 있겠는가. 대간은 의당 먼저 이들은 탄핵하여야 옳을 것이다.”



 

이형욱은 아예 김덕령이 털끝만한 공도 세운적이 없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헤 유성룡이나 선조나 이상하게 여기는 기색도 없습니다.




조정에서 김덕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항상 나오던게, 실제로 공을 세웠다 - 는 이야기가 아니라, 용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용맹이라는게, 상당히 허무맹랑한 수준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조정 내에서도 "허명에 비해 공이 없다" 라던지, 심지어 이항복은 "너무 거품이 많았다" 하는 수준의 이야기까지 합니다.





선조 59권, 28년(1595 을미 / 명 만력(萬曆) 23년) 1월 8일(신사) 1번째기사 

주강에 《주역》을 강하고, 군공의 논상·김덕령의 사람됨 등에 대해 논의하다



상이 이르기를,


“글을 잘하는가?”


하니, 항복이 아뢰기를,



“약간은 압니다. 담양(潭陽)의 금성 산성(金城山城)에 불끈 솟은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곳이 아닌데도 김덕령은 그 바위를 걸어서 넘기를 매우 경첩(輕捷)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고을 사람 20여 명이 목격한 것이라 합니다”


하고, 정광적은 아뢰기를,


“군사를 일으키던 초두에는 한때의 여망이 반드시 큰 공을 세우리라고 여겼는데,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대개 조정에서 그에게 기대한 바가 너무 컸고 그도 사명(使命)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에 일로의 군졸과 장관이 거개 이반하였으므로, 지금은 단지 외로운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전번에 그가 권율(權慄)에게 올린 서신을 보았더니, 자못 허물을 뉘우치는 뜻이 있었습니다”


하고, 이항복은 아뢰기를,


당초 조정이 너무 포장(褒奬)을 한 것입니다.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에 주의를 시켰더니 그 역시 깊이 새겨 들었습니다. 그의 참모들을 보았더니 거개가 과격한 사람들이었고, 그도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일이 많아 매우 전도되는 일이 있었으므로 이 때문에 군졸이 이산하게 된 것입니다. 그뒤에 그는 글을 지어 사졸들과 맹약(盟約)을 하였으므로 지금은 군정(軍情)이 약간 누그러졌다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대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말하는 것은 참작하지 않고 마구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군사일기(撫軍司日記)》를 보았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총통(銃筒) 3백 자루를 쏘고 있었더니, 왜적이 저절로 무너졌다. 」고 했다.’ 하였고, 또 ‘쌍무지개가 몸을 둘렀다.’고 하였는데, 어찌 이럴 리가 있겠는가. 무군사의 추장(推奬)이 너무 지나쳐 마치 한(漢)나라가 한신(韓信)을 대우하듯 한 것이지, 조정에서는 별로 지나치게 추장한 일이 없다”


하였다. 정경세가 아뢰기를,


“소신도 이 사람에 대한 일을 듣고 처음에는 믿었으나 본인을 직접 보았더니 별로 취할 만한 실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이귀(李貴)와 같이 자면서 자세히 물었더니 ‘김덕령이 말하기를 「이 왜적을 내가 다 섬멸할 수는 없고 다만 현소(玄蘇)와 의지(義智) 등의 머리를 베어오겠다……. 」 했다.’고 했는데, 이귀의 말이 이처럼 부탄(浮誕)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귀는 본시 허소(虛疎)한 사람이다. 전번에 그가 상경했을 때 어떤 이가 나더러 인견하라고 권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가 허소함을 알았기 때문에 인견하지 않았다. 대개 일에 임해서 두려워하고 미리 계획을 세워서 성공시키는 것이 가하다. 설사 참으로 남보다 뛰어난 용맹이 있다 하더라고 이처럼 과장해서는 안된다.”







즉 이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확실한건 임진왜란 기간 중에, 김덕령은 그 거대한 명성(지금 기준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명성은 상당했음)에도 불구, 실제 전과라고 할만한건 거의 -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고,



물론 특별히 원균처럼 말아먹거나 한 적도 없지만, 눈에 뛰는 공적을 세운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물론, 당시 김덕령이 활동하던 시기 자체가 특별히 공을 세울 수 있는 시기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임진왜란을 떠올릴때 바로 이름이 나올 만한 인사 일 정도로 유명하다는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 엄청난 명성에 비해선 실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인터넷에 50전 50승 육전의 이순신 같은 엉터리 카더라가 나돌면서 임진왜란 당시 거품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정기룡이 있는데, 인터넷 카더라가 심하긴 하지만 승패를 떠나서 사천왜성 전투 등에도 참여했고, 규모가 소규모라도 전투를 계속 하기는 했는데, 김덕령은 그런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런 모습과는 달리, 후세에 와서 명성이 뻥튀기 된것이 아니라, 실제 그 당시에도 명성 자체는 대단했던것 같습니다.


나중에 공적이 없다, 하면서 실망하는 의견이 나올때도, "당초에 기대가 너무 큰게 문제였다." 라던가,



김덕령이 병에 걸려 전면에 못 나서자 다른 장수들이 사기가 꺾였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볼때 

이미 그 당시에도 공적에 비해서 네임맬류가 상당했던 것은 분명한것 같습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historygall/30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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