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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망국선언문 비판에 대한 비판
게시물ID : sisa_6580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당근매니아
추천 : 18
조회수 : 2677회
댓글수 : 71개
등록시간 : 2016/02/02 02:02:21
/들어가며



연초, 잠시간 손아람 작가의 '망국선언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현실을
짚고 있는 글이었고 저는 xsfm 그알싫에서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지요. umc
가 읽어주는 리듬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다 기회가 닿아 정치카페에
손아람 작가가 출연한 편도 한번 듣게 되었습니다. 들으며 든 잡상이 많아
글을 씁니다.

어찌되었던 노회찬 전 의원 유시민 전 장관 진중권 교수 세 분 모두 손아
람 작가나, 지금 이 글을 쓰는 저와는 세대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느끼고
어떤 의미로는 꽤나 당황스러웠습니다. 정치지형 상에서 같은 언덕 위에
서있는 것과,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걸 느낀
탓 아닐까 싶습니다. 젊은 층에게 비교적 관심이 많은 어른들인 저 사람들
에게도, 결국 젊은이들의 삶은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가 그네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결을 같이 하는 문제겠지요. 결과적으로 손아람 작가가 1대 3으로 쏟
아지는 질문들에 답해야 하는 뭐 그런 모양새가 되는 건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게스트라는 것이 그런 위치일 테구요.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를 다시 조금 더 엄밀히 말하자면, 손아람 작가가
방송에서 제대로 답변하지 못한 부분들에 대한 보완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그 분보다 제가 잘났다는 게 아니라, 미쳐 채우지 못한 여백에 덧칠을 좀
한다는 느낌 정도라고 하면 적당할 듯 싶습니다. 녹음이 되고 있고, 그게
방송으로 송출된다는 건 사람에게 상상 이상의 부담을 지우기 마련이고,
그러면 입은 쉽게 굳어 잘 돌아가지 않는 법이니까요. 노유진 세 분께 이
글이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렇습니다.

이 아래로 경칭은 생략하겠습니다.

혹시 글을 읽어보지 못하셨다면 원문을 읽어 보셔도 좋고,
UMC가 읽은 버전으로 들으셔도 좋겠습니다.


/신림동 가는 버스


노유진, 특히 유시민 씨의 말에서 참 많은 괴리를 느꼈습니다. '왜 뭉쳐서 봉
기할 생각을 안하는지 모르겠다', '100만명 정도 뭉치면 그건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이 된다', '인터넷 같은 수단도 있지 않느냐', '젊은이들이 투표를
너무 안한다' 등등의 말들이 그러했습니다. 뭐 마지막 문장은 노유진 세
분 모두 몇번을 반복한 이야기였지요. 손아람이 대답하지 못한 저 문장들
이 제가 이 글을 쓰게 된 계기입니다. 젊은이들은 왜 정치적인 것을 이유
로 해서 뭉치지 못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온전히 뭉치지 못하는 젊은이들
의 탓인가.

전 요새 주말마다 신림동 고시촌으로 강의를 들으러 갑니다. 토일 이틀을
합쳐 14시간 정도 강의를 듣고, 모의고사를 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옵니다.
세 개의 수업을 듣는데, 사람이 조금 적은 것은 스무 명 남짓 되고 많은
강의는 100여명이 같이 듣습니다. 듣기로 그 강의의 평일 저녁반은 300명
이 들어찬다고 했습니다. 맨눈으로 칠판의 필기를 받아적을 수 있는 자리
는 앞쪽 일부에 지나지 않아, 초대형 강의실에는 다섯개 가량의 초대형 모
니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모의고사 답안지를 강사가 혼자 첨삭할 수가
없어서, 첨삭 아르바이트만 다섯 명을 두고 쓴다고 들었습니다.

AA.8632695.1.jpg


아침 시간 서울대입구역에서 내려 고시촌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타고 보면,
버스에는 두 종류의 인간 외에 보이지 않습니다. 한 무리는 형형색색의 등
산복을 입은 노년층이고, 다른 한 쪽은 고시촌으로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이
들이어서 보통 책이나 암기장을 한손에 들고 있습니다. 형광 점퍼 입은 사
람들은 서울대 입구 정류장에서 내려 관악산을 타러 가고, 남은 이들은 대
개 무채색 점퍼를 입고 있기 마련입니다. 강의실에 들어찬 이들은 무채색
으로 도배되어 있고, 그 가운데에서 한바퀴 둘러보며 젊음은 참 쓰레기처
럼 투기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고시촌은 제가 본 어느
거리보다도 책방이 많은 거리지만, 동시에 거기에 꽂혀있는 건 '책'이 아
니라 종이를 엮고 풀로 붙인 삶의 짐처럼 보였습니다.

그 고시촌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학원이고, 고시식당과 고시원들이 그 뒤
를 받쳐줍니다. 고시촌의 식당들은 거의 모든 메뉴가 1인분 씩 주문 가능
하고, 어느 동네보다도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의 비율이 높아 이채로웠습니
다. 왜 청년들은 뭉쳐서 봉기하지 못하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수십년 간
서서히 변화한 사회 구조로 인해 철저히 개인과 개인으로서 파편화되어 있
기 때문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왜 봉기하지 않는가


1.JPG


폭동은 보통 빈민가에서 일어납니다. 광주대단지사건도, LA폭동도, 최근
있었던 홍콩의 폭동도 결국은 빈민가에서의 생활고가 특정한 사건을 기화
로 해서 터져나오기 마련이었습니다. 폭동이라는 단어의 사용이나, 개개
사건에 대한 가치 판단은 이 이야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은 빈민
가에서 폭동을 일으킨 그 사람들은 서로를 알고 있는 이웃이었다는 겁니다.
애초에 상호간 심리적인 연대감이나 실질적인 인간관계가 이어져 있었던
사람들은 뭉쳐서 봉기할 수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낮은 수준의 연대라도
그렇습니다. 익명화되지 않은 개개인은 서로를 의지해서 감정과 불만을 폭
발적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달동네와 고시원이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
바로 그 지점입니다.

유시민씨처럼 학생운동을 조직하고 실행했던 사람들에게 지금 세상과 젊은이
들은 참으로 의아한 모습으로 비칠 거라 생각됩니다. 방송 내에서도 언급
했듯, 이제는 숨어 숨어 기차로 연락책을 보내고 연대하는 대신 인터넷을
통한 편리한 소통이 가능합니다. 적당히 머리를 굴리고 대책을 짜면, 정부
기관의 추적도 효과적으로 따돌릴 수 있습니다. 아니 애초에 과거처럼 그
정도 직접적이고 무도한 수준의 공안몰이는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적어도
안기부 안가가 작동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다만 인터넷은 이미 이어져
있는 사람들이 유효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이지, 파편화된 개인을 묶는
데에 유용한 도구는 아니라는 걸 그네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인터넷 상에서 한 사람의 유저가 가지는 영향력이 미미하듯이, 이 안에서
의 카리스마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프라인 상의 지
위 없이 온전히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아이디가 떠오르는 것
이 있습니까.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는 허브가 될 수 있는 자원이
존재합니까.

인터넷이나 SNS를 이용한 정치적 세력의 창출은 분명한 한계를 가집니다.
오프라인으로 나가지 않으면 결국 사회가 두려워할 힘이 되지 못하는데,
젊은 세대는 고시원과 고시텔과 원룸으로 각기 흩어져 지역별 인적 네트워
크를 형성할 수도 없고, 설령 거리로 몰려나온다고 해도 만사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가진 인간 집단은 바람직하지만 효과적이지는 못해서,
작년에 있었던 민중총궐기에서 우리는 경찰들의 조직화된 사람몰이에 속수
무책으로 당하고 언론플레이에 놀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캡처.JPG


이 시대의 젊음들은 장기간 일하며 인간 관계를 다질 수 있는 정규직 일자
리에 채용되지 못하니 노동조합 등의 단결을 꾀할 수도 없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최소한의 지역적 네트워크도 존재하지 않는 장에 각기 혼
자 고립됩니다. 고작해야 인터넷과 sns에서 짧은 글을 써볼 수 있을 뿐이
고, 추천/비추천을 눌러보는 수준에 그칠 겁니다. 얼마전 오유의 N프로젝
트가 시비에 올랐었습니다. 좌표를 찍어서 추천 비추천을 조장하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에 대해 서로 피를 토해가며 싸우는 걸 보았
습니다. 그건 결국 네이버와 다음이 만들어놓은 비정상적인 여론 반영 시
스템에서 비롯하는 다툼이지만, 누구도 그 기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보
지 못했습니다.

양산되는 기사들의 댓글란에서 허접하기 짝이 없는 규칙을 통해 선정되는
'베스트댓글'들이 사회에 영향력을 선정하는 건 과연 비판받을 수 없는 사
회적 규칙입니까. 그 비정상적인 경기장에 최적화된 전략 전술을 짜내고
실천하는 것은 비판 받을 수 있지만, 그 룰 자체는 건드릴 수 없는 상수가
되는 것이 정상적인 논의의 장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종종 서로 얼굴을
가린 햄스터들이 쳇바퀴를 돌리는 것을 생각합니다. 인터넷 상의 공간도,
주거공간도, 직장도, 지역사회도, 학교도 더 이상 연대의 장이 되지 못합
니다. 애초에 연대하지 못하도록 시스템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누
구의 잘못입니까.

캡처.JPG


손아람씨는 아직 젊은층이 봉기를 생각할 정도로 과격해지지는 않았다고 평
가했지만, 그건 절반 정도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공유하는
심리적 최소공약수가 있지 않은 이상 죽창의 이미지가 그렇게 퍼져나갈 수
는 없는 일입니다. 죽창드립을 현실로 옮기고자 하는 의지 앞에 전제가 하
나 붙을 뿐이죠. '뭔가 일이 터지면', '누가 먼저 하면'이라고 말입니다.
손아람의 표현대로라면 '멸망을 바라는 이유' 혹은 부동산 대폭락이나 평
창 동계 올림픽에 이은 경제 위기를 차라리 기대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겁니다.

전태일, 이한열, 김주열은 죽음으로 기억되고 상징이 되었고 세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오늘날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은 어떤 사
건의 도화선이 될 건덕지가 되지 못합니다. 수백명이 떼로 죽든, 극단에
몰린 노동자들이 하나 둘 외따로 자살을 하든 아무런 울림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언론은 전태일을 귀족노조 과격분자 개인의 과
격 행동으로, 이한열과 김주열은 폭력 시위의 결과물로 난도질할 겁니다.
죽창질을 정말로 시전한다면 정신 나간 놈으로 뉴스 한 꼭지에나 나갈 겁
니다. 아니, IS 요원으로 의심 받아 도배가 되려나요.

연대할 방도는 보이지 않고, 문자 그대로 목숨을 바친다 한들 세상을 바꾸
지 못할 것이 눈에 선할 때 느껴지는 열패감은 대체 어떻게 해소해야 합니
까.



/젊은이들은 왜 투표하지 않는가


제가 신림에서 일요일에 듣는 강의는 노동법입니다. 노동법의 법원ㅡ근간
을 책임지는 법률이 크게 근로기준법과 노조법으로 나누어진다는 건 많이
들 알고 계실 줄 압니다. 근기법 제10조는 이렇게 규정합니다.

'사용자는 근로자가 근로시간 중에 선거권, 그 밖의 공민권(公民權) 행사
또는 공(公)의 직무를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을 청구하면 거부하지
못한다. 다만, 그 권리 행사나 공(公)의 직무를 수행하는 데에 지장이 없
으면 청구한 시간을 변경할 수 있다.'

이 조문은 현실을 살아 숨쉬는 문장입니까, 아니면 그냥 흰 바탕에 그려진
특이한 도안에 불과합니까.

사실 모든 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파편화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열악한 노동환경에 그대로 노출되고, 거기서 근로기준법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기간 근속이 불가능하니 조합을 만들고 연대
할 인간적 끈끈함은 조성될 시간적 여유가 없고, 사람이 건전지처럼 소비
되고 바뀌는 일자리는 수도 없습니다. 설령 투표할 기회가 주어진다 한들
그 한 표를 어떻게 행사할 지에 대해 고민할 시간과 심적 여유는 충분합니
까. 전 어느 해의 벚꽃을 늘 생각합니다. 생활관과 식당 사이의 150m 정도
되는 거리는 벚나무로 그득했고 그 해에는 유난히 벚꽃이 화사하게 핀 해
였는데, 벚꽃이 질 때야 그 2주 간 꽃이 흐드러졌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제가 갓 자대배치를 받았을 뿐이었지요.

part-time-instructor.png


지난해 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를 읽었습니다. 책 후반부 어딘가에서
저자는 자신이 왜 그 과를 선택했고 공부의 길로 마음을 정했었는지 말했
습니다. 버스에서 문득 터져나오는 감정을 억누르다가 그 다음 정류장이
자연사 박물관 앞이라는 걸 알고, 내려 박물관을 한바퀴 둘러보았습니다.
전 생물학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진화나 동물행동과 관련된 연구를 하면
서 살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지금도 합니다. 그러나 석박사 과정과 그 이
후에도 이어질 빈곤한 삶을 감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습
니다.

지난 학기에 전공교수 한분은 '요즘 애들이 너무 학점에 목숨 걸고, 좋은
인재가 대학원에 오지 않는다' 라고 투덜댔습니다. 강의 준비를 정말 열심
히 하시고, 연구 실적도 좋고, 학생들에게 관심도 많은 분이었지만 그럼에
도 세대간의 괴리는 멀고 다시 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MF에서 근무한
화려한 경력의 경제학 교수는 국비유학으로 미국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이
었는데, 일단 가서 장학금을 따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공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온 세대와, 패배의 경험을 빼곡히 쌓아온 세대의
격차일 수도 있겠죠. 이번 정치카페를 들으면서 느낀 감정과 어느 정도 일
치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인간적 생활이 불가능한 곳에 뛰어들 수
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가능성도 없어보이는 걸 시도할 수는 없습니다.

대학에는 더 이상 정치와 사회에 대한 논의가 발 붙일 곳이 남아 있지 않
습니다. 유시민씨는 '대학만 가면 취직하던 시절'의 대학생은 해당 연령대의
15%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금 15% 정도의 수능 성적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은 취업의 기회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대학 입학은 더
이상 골인 지점이 아니고, 입시는 이름만 바꾸어 다시금 이어집니다. 얼마
전 손주은이 사교육에 대한 자기 반성 운운하며 결국엔 '대학 입시 대신
의전 치전 로스쿨 입학에 집중하겠다'라는 결론을 내는 걸 보고 실소했습
니다. 그 사람은 평생토록 제가 속한 세대를 빨아먹고 사는구나 하는 생각
을 하는 동시에, 항아리 모양으로 찌그러진 인구 피라미드는 결국 영유아
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들부터 아작내겠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캡처.JPG


그 인구 피라미드가 또 다른 열패감의 원인이자, 투표를 포기하게 하는 원
동력입니다. 12년 투표율은 결코 낮지 않았고, 그건 20대에게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친애하는 일베 친구들까지도 전부 야당에게 몰표를 준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2,30대 전부를 합친 수가 1435만명(전체
의 27.8%)인 이 나라에, 60대 이상 인구는 967만명(18.8%)이고 50대는 833
만명(16.1%)이니 그 합은 전체 인구의 35%에 달합니다. 은퇴를 전후한 이
들은 사회 진출을 꿈꾸는 이들보다 많고, 우리에게 주어진 한표의 가치는
전부 동일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승리하지 못할 것을
압니다. 12년 그 추운 겨울에 그걸 온몸으로 알았고, 한동안 앓았습니다.

박정희 시대에 태어난 여러분들은 세상이 점차 나아지는 모습을 보며 살아
왔지만, 김대중으로 시작한 우리에게 세상은 후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반면 부모세대들과 다르게, 우리 중 상당수는 20대에 유럽 배낭여행도 갈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건 스스로의 경제력이 아닌 부모 세대의
경제력에 기대어서 얻어낸 성취입니다.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은 이후 삶의
안정성과 연대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을 여행 보내 줄 수 있
을지 확신을 조금도 갖지 못합니다. 아니, 그에 앞서 '우리의 자식'이라는
존재는 세상에 실재할 수 있습니까. 노유진 여러분께 선택권이 있다면 어
느 쪽의 삶을 택하고 싶으십니까.



/나가며


그럼에도 버둥대기는 할 겁니다. 손아람씨가 전태일들을 이야기하며, 이름
덕에 누군가에게 밥을 얻어먹은 전태일의 일화를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곱씹다 보니 짠한 감정이 들어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게 부채감
의 발로였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을 남기고 떠
난 이에게 그런 식으로라도 마음의 빚을 대신 갚아보고 싶었을 거라 이해
했습니다. 제가 그런 식으로 부채를 느끼는 상대는 이진원입니다. 제가 정
치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사서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뉴스를 뒤적대고, 그
나마 세상을 나아지게 할 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직업을 갖겠다고 신림을 가
는 것은 어느 정도 달빛요정에 대한 부채감에서 기인할 겁니다. 그러니 이
글의 한축은 저처럼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온 것이고, 다른 한축은 중식이밴드가 달빛요정
처럼 죽지 말고 계속 음악을 해주었으면 하는 소망에 밑바탕을 둔 것입니다.

이 글이 과연 무엇을 해낼 수 있을지 아무런 예상이나 기대가 들지 않습니
다. 매일 인터넷으로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 더미의 일부가 되어버릴 거라
는 걸 압니다. 이건 그냥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발버둥의 일부입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이 각자도생의 지옥을 어떻게 깨
부숴야 하는지 모색하는 방법 밖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투표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하나만이 명확합니다.



/ps

언젠가 청년들의 삶을 밀착취재했던 르포에 많은 신세를 진 글인데, 검색
능력이 부족해서 원문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기자 분에게
감사드립니다.

-> 황금고블린 님 도움으로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수찬 기자님이셨네요.

그리고 지방시, 김민섭 씨에게 응원을 건넵니다. 진솔하고 따뜻한 문장에
많이 위로 받고 자아성찰하고 있습니다.

R.I.P 달빛요정.




꿈이 없이 살 수도 있어
꿈만 꾸며 살 수도 있어

나를 지워가면서
세상에 나를 맞춰가면서
느리다고 놀림 받았지
게으르다 오해 받았지
그런 나를 느껴봐
아직은 서툰 나의 마구를

꿈을 향해 던진다
느리고 우아하게
찬란하게 빛나는
나의 너클볼

나는 살아남았다
불타는 그라운드
가장 높은 그곳에
내가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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