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신희철 기자]8, 9년 전쯤의 일인 것 같다. 엄마가 치매에 걸리기 전으로 혼자서 교회며 계모임 등을 잘 찾아 다니실 때였다.
지금은 65세의 노인들에게 경로우대라 하여 국가에서 교통비 3만원씩 통장으로 지급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현금이 아닌 버스표나 토큰을 한달치씩 동사무소에서 지급했다. 지하철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로증만 보이면 무시로 탈 수 있다.
좌석 버스에는 젊은 사람뿐?
엄마가 어디를 갔다가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고 한다. 차에 오르니 평소와는 달리 버스 안에는 온통 젊은 사람들만 주욱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엄마는 차비로 '국가'에서 공짜로 지급되는 버스표를 내려하자 운전기사는 "이건 일반버스가 아니고 좌석버스니 버스표 말고 돈을 내라"고 툭툭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운전 기사의 그 말을 듣고야 엄마는 버스 안에 왜 젊은이들만이 가득했는지 이해를 했다고 한다. 엄마가 말하는 이유인즉슨 노인들에게는 한달치의 버스표가 나오니 노인들은 죽어라고 잘 오지도 않는 시내버스만을 타고 다니고, 젊은 사람들은 다리 아프고 귀찮으니 좌석버스를 주로 타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좌석버스를 타면 젊은이들이 많고 시내버스를 타면 노인들이 많다는 논리였다.
엄마의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하여 머리가 띵해졌다. 신경통으로 늘 다리 아파하는 엄마에게 죄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그동안의 나의 행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자식놈은 자가용 타고 다니고 나이 들어 힘 없는 엄마는 아무 곳이나 서는 버스를 타려 이리저리 달리고 있는 상상을 하자 코미디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회사 갈 때도 조금 늦기라도 하면 택시를 탔고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는 거리도 힘들다는 이유로 택시를 탔다. 서른살이 갓 넘어서부터 차를 갖고 다녔던 나의 게으름은 더 가관이어서 아무리 짧은 거리도 차를 가지고 나가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당시 노인들이 기를 쓰고 일반버스를 탔던 이유는 나라에서 지급하는 버스표는 당연히 좌석버스에는 해당되지 않았고 지하철은 같은 '공짜'라고는 해도 지하로 오르내리고 갈아타야 하는 '힘겨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통비가 현금으로 지급되고 있는 요즘, 노인들의 주 교통수단은 지하철이 되어 버렸다. 버스는 돈을 내야 하지만 지하철은 무한정 공짜이기 때문이다. 노인들의 대부분은 집앞에서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는 곳도 한참을 걸어서라도 공짜인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경우가 많다. 버스 요금을 아끼기 위해서다.
이런 현상은 택시와 승용차를 비교하면 더욱 적나라해진다. 수입원이 있고 없고의 차이기는 하겠지만 택시를 타거나 승용차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몸 튼튼한 젊은 사람들이다.
엄마의 그 철학 같은 얘기를 듣고 후 난 엄마가 외출을 하시면 시간이 되는 대로 모셔다 드리기 시작했다. 일요일엔 교회에 모셔다 드리기도 하고, 엄마가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는 무도장에도 시간이 되면 모셔다 드리려고 노력했다.
일이 생겨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면 "꼭 택시 타고 가시라"며 얼마의 돈을 드리고는 했다. 하지만 엄마가 택시를 타고 가신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들은 평생 아끼고 절약해 자식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신 분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늙어 버린 몸에는 젊은 날의 고달팠던 노동으로 신경통이 뼈 마디마디 훈장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아이구, 다리야"를 잠꼬대처럼 하며 밤새 끙끙 앓으면서도 자식이 주는 그 얼마의 택시비까지 아껴가며 살았던 부모님들 덕에 우리가 입고 먹고 공부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작은 도움이 노인에게는 큰 힘
얼마 전 내가 사무실을 얻어 일하고 있는 서초동에서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는데 세 분의 노인이 걸어 가고 있었다. 보아 하니 늦은 시간에 어디를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 듯한데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이 가깝지 않은 곳이었기에 난 차를 멈추었다. " "어디로 가세요?" "지하철 역으로 가요." "어디 지하철 역이요." "아니, 왜요?" "가까운 곳이면 제가 모셔다 드리려구요."
그러자 7, 8십대로 보이는 세 명의 노인 중 제일 젊어 보이는 한분이 "아휴, 고마워요. 형님들, 이거 좀 얻어 타고 가세요"라며 얼른 차 앞으로 다가섰다. 그 분은 자신의 집에 다녀가는 두 노인을 배웅나오는 중이었던 것 같았다.
그곳은 바로 고속도로 진입하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위치였지만 나는 두 분을 태우고 반대 방향인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역이라 한들 자동차로 5분 거리면 충분한 거리인데 그리 바쁠 것도 없는 퇴근길에 조금 돌아간들 어떠랴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거, 이런 신세를 져서 어째요. 너무 고마워서 어쩌나." "세상에 이런 분도 다 있네."
지하철 역으로 향하는 동안 뒷좌석에 나라히 앉은 두 사람은 마치 대단한 은인이라도 만난 듯 지나치게 칭찬하여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너무나 작은 나의 배려를 그렇게까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는 것이 민망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거리에 노인들이 힘겹게 다니는 것을 보면 목적지까지는 아니어도 좀 더 쉽게 가실 수 있는 곳까지 모셔다 드리고 싶었다. 그것은 몸이 불편한 나의 엄마가 생각나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그 나이가 되었을때 누군가의 그 작은 도움이 얼마나 필요할까 하는 익숙해진 '노인의 마음'이 미리 되어서인지도 모른다.
내게는 그다지 크지 않은 단돈 만원도 노인이게는 큰 돈이 될 수 있고, 내게는 별로 힘들지 않은 짐의 무게가 노인에게는 엄청난 무게로 힘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아주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두려움에 겁 먹은 아이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무거운 보따리에 힘겨워 하면서도 택시비를 아끼려 '공짜' 지하철을 타는 노인들도 있고 늦은 밤 평소 잘 다니던 길도 헷갈려 깜깜한 길 한가운데서 아이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노인들도 만나게 된다.
나에게 한 수 가르쳐 준 여성
얼마 전 서초동에서 양재동으로 우회전하려 서행하던 중 할아버지 한분과 삼십대 여성이 도로에서 택시를 잡으려는 듯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저녁 일곱 시가 다 된 시각이었는데 내가 그 자리에서 택시를 잡으려다 고생한 생각도 나고 할아버지가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같은 방향이면 태워 드리려 인도 쪽으로 차를 세웠다. 창문을 열고 할아버지의 딸로 보이는 여성에게 "여기서 택시 못잡아요. 어느 방향으로 가시는데요?"라고 물었다.
그 여성은 너무나 반갑게 차도까지 뛰어 내려와 할아버지가 대치동 ㅇㅇ 아파트에 사시는데 밤길에 혼자 헤매고 있어 자신도 택시를 잡아드리려 서 있다는 것이라는 말을 급하게 이었다.
뒤에 늘어선 차들의 빵빵 소리에 난 무조건 할아버지를 타시라 말하자 할아버지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는 그 젊은 여성은 자신의 아버지나 되는 듯 고맙다고 내게 인사까지 하는 것이다.
차가 출발하자 그 할아버지는 여든여덟이라고 자신의 나이를 말한 뒤 서초동 무슨 단체에서 노인잔치가 있어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사방이 어두워지니 방향이 헷갈려 집도 찾지 못하고 전화번호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하셨다.
좀전의 그 여성이 길을 헤매고 있는 자신에게 택시를 잡아 주려 하던 차에 나를 만나게 되었다는 얘기 또한 전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젊은 여성이 할아버지에게 주었다는 쪽지에 있었다.
신문지를 찢은 듯한 종이에는 "할아버지, 만약 집을 못 찾으면 늦더라도 꼭 전화하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적어 놓았던 것이다. 그것에 더하여 오천원까지 할아버지 손에 쥐어 주었다는데….
난 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여성에게 감복하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험하다 험하다 하여도 그런 분이 있다는 사실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할아버지는 잠시 차를 타고 가는 중에도 당신 자식들 자랑을 했다. 모두 살기가 넉넉한 듯 보였고 지금은 둘째 아들네 집에 와 있다는 것이다. 얼마간 차를 달리자 할아버지는 여유롭게 당신의 집 위치를 확인하여 무사히 댁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었다.
고마워서 어쩌냐며 굳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가는 길을 막는 할아버지에게 나는 "할아버지 자제분들께 노인분들이 어려운 일을 겪으면 도움을 드리라고 말씀하시면 되요" 라는 말씀을 남기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며 그 여성을 생각했다. 자신의 갈 길도 바빴을 터인데 복잡한 퇴근 길의 도로에서 노인에게 택시를 잡아 주려 애쓰던 그 예쁜 마음하며 할아버지가 집을 찾지 못할 것까지 대비해 쪽지까지 전해 드린 배려에 나 또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날 '착한 일'을 한 대가로 그 여성에게 마음 공부를 '한 수'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정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치매에 걸린 후 나는 노인에 대한 이해의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고 내가 어려움에 처한 노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린다면 나의 엄마가 어려움을 겪을 때도 누군가도 도움을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의 마음도 갖게 되었다.
또 이런 마음이 사람들에게 전염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전염병이 될까?'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전염병'을 퍼트리기 위해 가끔은 외로운 노인들에게 말동무도 해 드리고 걷는 것이 힘겨운 노인에게는 잠시만이라도 편한 다리가 되어 드리는 것은 어떨까? 그 또한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나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