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고도로 특화된 전문성을 띄는 사안에 대해 보도할 때, 언론은 자연스럽게 교육적 기능을 가지게 된다. 광우병이나 신종플루와 같은 이슈에 대한 보도는 대중 일반의 의학적 상식을 증진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인이 다양한 모든 분야에 대해 전문적 지식을 가지기란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를 해결하는데는 두가지 접근방식이 있는데, 하나는 언론계 인적자원의 질적 기준을 상향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업계에 효과적 분업 체계 관례를 구현하는 것이다.
인적자원의 질적 향상이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를 언론계로 섭외하거나 저널리즘 이외의 특화된 전문분야를 가지는 언론인의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언론계 자체의 고용 관행에 있어서의 구조적 헤게모니 문제와 직결된다는 한계를 가진다. 또한 현대에는 엄청난 양의 분과가 횡으로도 종으로도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언론인 개인에게 지나치게 많은 양의 성과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접근방식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따라서 효과적 분업체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며, 이상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전자의 인적자원의 질적 개선 전략과 병행해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전문가를 신속하면서도 정확하게 섭외하여 취재하고 또 그 과정에서 언론인이 자기 스스로를 교육하여 이를 다시 대중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흥미로운 특징적 문제는 바로 어떤 전문가를 섭외하느냐 하는 선택의 단계에서 일종의 딜레마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지점에서 직접적으로 대두되는 것은 바로 권위라는 이름의 권력적 관계이다. 권위 있는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그 자문이 공적 유효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보도의 대상이 되는 이슈의 경우, 보통 민감성을 수반하게 마련이며, 동시에 견해의 대립과 충돌도 발생하게 마련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경우, 이슈의 중심에 놓이는 인물 혹은 대상이 바로 그 권위있는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게 마련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권위의 문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퇴행적 순환을 겪게 되고, 그런 기호학적 순환이 진행될 수록 애초에 전문가를 섭외했든 의의, 즉 전문적 소견이라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차차 옅어지고, 권력관계만 더 뚜렷해지게 되어, 그 와중에 이슈가 논란이 되고 논란이 헤게모니 투쟁이 되는 식으로 양상이 움직여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투쟁적 현상을 매개하는 역할 또한 바로 언론에게 부여되는데, 그러한 상황에서 언론이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애당초 언론은 그 자체로 이러한 전문적 이슈의 배심원이 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먼저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중심을 쥐고 흔드는 것은 단지 이 헤게모니 투쟁만이 아니라, 바로 여론 역시도 포함이 된다. 사실 여론의 움직임이야말로 그 헤게모니 투쟁의 은폐된 실상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즉, 언론은 전문성을 담당하는 전문가 계층의 권력투쟁과, 그 권력투쟁의 반영이자 연장이자 실재인 여론의 장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며, 이 때의 언론은 매체가 그 자체로 하나의 메세지가 되는 현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예증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의 언론이 교육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이러한 헤게모니 투쟁이 교육의 본질에 속하기도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더 나아가, 교육이 학문 및 학적-지적 인식의 역사성 및 연속성의 담지자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이는 학문 및 학적-지적 인식의 본질적 측면이기도 한 것이다. 언론인을 교육자로 치환하면 그 실상이 쉽게 드러난다. 언론이 메세지의 생산자가 아니듯, 교육자 역시 교육의 생산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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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써둔 글입니다. Reliability님의 글에 대한 코멘트로 대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