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짜 103세 맞으세요?” “내가 너희 나이 때는 아주 억척스러웠다. 여자도 의로운 일이라면 뭐든지 앞장서야 한다.” 서울 정동 유관순 기념관 뜰에서 모교 후배인 이화여고 오샛별(오른쪽), 이지윤양과 함께 담소를 나누는 남동순 할머니. 뒤편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유관순 열사의 조각상이 보인다.
광복후 좌우 갈라진게 恨
―부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선친 남승윤 어른께서도 독립운동을 하셨다던데….
“아버지께선 4개 국어를 하는 외교관이었지. 외국 나가본 경험이 많으시니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3남매를 다 학교에 보내셨어. 대신 할아버지한테 구박을 엄청 받았어. 유학자이시니 관순이랑 내가
땅따먹기라도 할라치면 계집애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든다고 회초리를 대셨어. 남자 앞에서 이 쏙
내놓고 웃지마라, 돈을 돌 보듯 하라 하는 식으로 무서운 교육을 받고 자라서 지금 이 나이에도
남자들 앞에서는 꼭 할 말 외에는 안 해.”
―유 열사와는 이화학당도 함께 다니셨지요? 공부는 누가 더 잘했어요?
“관순이가 잘했지. 난 고등과에서 영어를 전공했어. 일본말은 할 줄 아니 영어를 더 배워 선생님 되려고.
그런데 난리(3·1운동)가 난 거야.”
―3·1운동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듣고 싶어요. 누구 제안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셨어요?
“일제를 향한 분노에 누가 먼저랄 게 어디 있어. 들불처럼 번져나가니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고 학생들은
거리로 몰려간 거지. 나는 관순이하고 남산으로 올라갔다가 장충단을 거쳐 종로로 갔어. 그런데 어떤
남자가 그래. 둘이 붙어다니지 말고 하나는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를 부르라고.”
―그럼 유 열사 혼자서만 천안으로 내려가신 거네요.
“천안뿐인가. 청주, 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로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았지. 4월 1일 천안 아우내(?川)
장터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어. 그러니 약이 오른 일본 헌병들이 관순이는 공주 감옥으로 처넣고
병천 관순이 집은 불 질러 태워버렸어. 관순이가 처음부터 열사로 대접받았던 건 아냐. 한동안 병천에서
는 유가(柳家) 놈들 때문에 우리가 못 산다고 동네 사람들 원망이 심했어. 일본놈들이 다 똑같은 종자
라며 못살게 구니까. 지금은 세계의 유관순이 되었으니 원이 없지.”
―7인 결사대엔 어떻게 들어가게 되셨어요?
“3·1운동 이후에 신익희 선생이 ‘7인 결사대’란 걸 조직했는데 여성 대원이 필요하다는 거야. 우리나라
다 빼앗고 죽이는 일본 놈들에게 항거하는 사업이라고 해서 두말없이 따라갔지. 가보니 다 남자들이야.
상관 안 했어. 나라 구하는 데 남녀가 따로 있나. 그 길로 연해주, 몽골, 중국을 안방처럼 누비기 시작
했지. 자금 전달부터 독립군들 옷 꿰매는 일, 무장투쟁까지 안해본 일 없어.”
―안 무서우셨어요? 총은 쏘셨고요?
“무서운 게 어디 있어. 총이 없어 칼을 썼지. 일본놈들 주재소, 경찰서 습격해 그냥 때려부수고.
배고픈 건 말도 못해. 가랑잎은 사발이고 싸릿가지는 젓가락인데, 먹을 게 있어야지. 운 좋으면 배추를
뜯어 소금에 고춧가루 넣어 죽을 끓여. 모자라면 대장이랑 나는 굶었어. 대신 솔 이파리를 씹어먹거나
불린 날콩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먹었지.”
―죽을 고비도 많으셨겠어요.
“내가 보기보다 영리해. 한번은 독립자금을 전달하려고 나 혼자 압록강을 건너야 했지. 신발 바닥을
뜯어 거기에 미농지로 싼 돈을 넣어 가는 거야. 나루터에 일본놈들이 지키고 있다가 어딜 가냐고 물어.
‘강 너머 시집간 울 언니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몇 번 농을 걸다가 보내줘. 건너자마자 돈을 건네주고
바로 강을 건너왔더니 그놈들 눈초리가 이상해. 그래서 ‘가보니 만주로 이사 가고 없더라’며 얼른
내뺐지.”
―광복 후에는 박순천, 임영신 등 이끌던 ‘독립촉성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셨지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여운형 선생은 좌익의 총수가 되었는데 할머니는 왜 우익을 택하셨어요?
“계열로 보면 나도 사회주의 될 사람이지. 그런데 광복 직후 내게 은혜를 입은 한 형사가 날더러 평양
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거야. 그래야 여사님이 살 수 있다면서. 그땐 좌우 나뉘는 게 그렇게 허무했어.
목숨 걸고 되찾은 조국이 둘로 다시 쪼개졌으니 그게 평생 한이 돼.”
―그래서 전쟁고아들 돌보는 일에 헌신하기 시작하셨군요.
“서울역, 남대문 시장에 전라도 경상도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버글버글했어. 못 먹고 못 입어 그렇지
눈이며 코가 똑똑하게 잘생겼는데, 내가 얘들을 초등학교라도 보내서 제대로 살게 해야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낙원동에 ‘한미고아원’을 만들었지. 한번은 미군들이 전쟁통에 총 맞은 아이들을 헬리콥터로
실어다가 남산에 수북이 데려다놓았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질 않아. 그래 화가 나서 ‘한국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느냐’는 팻말을 써붙여 놓았지. 난 지금도 자기 자식만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이해가 안 가.”
―그렇게 할머니 손을 거쳐간 자식들이 1000여명에 이른다면서요.
“대학은 4명밖에 못 갔지만, 대령도 나오고 선생도 나왔지. 딸들 시집 갈 때는 내가 친어머니인 줄 알고
사돈들이 ‘이리 이쁘게 잘 길러줘 고맙다’ 했어. 남편 없고 자식 없다고 사람들은 날 불쌍하게 볼는지
모르지만 난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