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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1
게시물ID : lovestory_660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카우보이액슬
추천 : 2
조회수 : 42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5/10 04:16:24

이 글은 아버지에 대한 철저한 내 소견이다.

당신의 생각과는 달리 (어떤 생각이셨는지 이젠 물을길도 없지만...) 

 

아버지가 하늘로 가셨다.

 

2014년 5월1일(추정)14:00경에 심장마비로 가셨을거라고 강력계 형사가 경찰서 검안의의 소견을 듣고 나에게 말했다. 

 

그러셨을수도 있었다.. 술을 물보다 많이 드셨고 ,욕이 섞인 상스런말을 존댓말보다 더 가까이 하셨던분이니, 병원에서 치료는 커녕 링거액도 사치스럽다고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것이라고 마초기질을 보이셨던 분이니

 

일견 그런 남자다운 호탕한면이 당신의 직업관에 있어서 필요했으리라 추측도 든다.

하지만 뭐든지 과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당신은 너무 과하셨다. 그리고 집에 몸을 위탁은 하셨지만 둘러볼줄 모르셨다.

 

내가 모르는것이지만 둘러 보셨을수도 있다.집안에 쌀이 얼마나 있고 라면은 얼마나 있으며 냉장고의 우유와 계란은 항상 구비되어 있는지.. 하지만 우리가 몰랐을뿐이다. 

 

가족에게 애정섞인 표현을 못한것은 경상도 남자의 무뚝뚝함이라고 칠수도 있다. 허나 아버지는 올해 58살이셨으니 28살?30살까지 서울,수도권에서 살다오신분이었다. 인생 후반부에 철저하게 부산남자가 되신거다. (아니 수도권사람이 꼭 살가워야한다는것도 고정관념 아니던가?)

 

내가 어릴적 보던 아버지는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젊으셨다. 젊다는것은 젊은이의 생동감 넘치는 힘을 어린내가 느낄 정도 였다는것이다.그러기에 항상 집은 든든했다. 젊고 힘있는 남자가 가장으로 있다는 사실은 집안 식구들에게 든든함을 준다.

 

양정 산동네 골목길 단칸방에 형과 나를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이렇게 네식구가 부산생활을 시작하였다. 

80년대 중,후반의 부산은 분명 낙후된곳이었을거다. 앨범을 보아도 갈만한 유원지나 공원이 없었는지 

부산의 바닷가 아니면 뒷산의 동의공전(현 동의과학대학)에 산책하러가서 찍은사진이 많다.형과 나는 다섯달 정도의 텀을 두고 태어났다. 물론 형은 빠른 생일로 유치원을 졸업하고 나보다 두살은 위인 형들과 같은 학년에 다니게 되었다.

 

두 형제는 커가면서 서로 다른 면모를 보였다.

아버지 당신의 호탕함을 닮은 형은 국민학교 들어가자 마자 태권도를 배우더니 그 실력으로 동네 싸움대장으로 보스로 군림하며 카리스마로 동네를 휘어잡았고

 

그 형의 못난(?)동생은 방구석에 눌러앉아 만화책을 벗삼아 만화를 그리거나 게임하는것에 유년시절의 소일거리를 다하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보기에도 작은놈은 못나보였을것이다. 의레 아버지들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자식에게 애정을 쏟는다고 하지 않던가? (역시나 철저한..철저한 객관적인 추론일뿐이다.)

 

두 형제는 그렇게 사는 세계가 어릴적부터 달랐다. 물론 둘이 함께하는 시간도 많았다. 같은 국민학교에 같은 동네에 살다보니 말썽꾸러기 동네아이들과 이런저런 대소사도 많이 치뤘다. 

다낡은 자전거에 넷이 꾸역꾸역 타다 동네 연탄배탈 트럭에 부딫혀 병원에 실려가기도 하고 턱에 상처도 났다. 비비탄을 발사하며 놀다가 어른을 맞추기도 하고 서로 감정이 상해 얼굴을 할퀴기도 하고 주먹다짐을 오가는 일도 비일비재. 

 

큰놈은 때리고 오지만 작은놈은 매번 맞고 오는게 일이었다. 그러면서 어린나도 내가 싫은적이 있었고 의레 아버지도 형을 더 좋아하겠거니 하는 마음이 생겼던거 같다.

그러던

 

어느 여름이었다 아이들은 항상 위험한 일을 잘한다. 호기심이 강하기 때문이다. (sbs 호기심 천국은 소싯적 내가 좋아하던 프로기도 하다.)유독 호기심이 왕성한나는 돌아가는 선풍기에 손을 넣어보다가 

손을 베이고 피를 철철 흘린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을 떠보니 내 손에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형이 아버지가 일하다말고 달려오셨었다고 넌지시 이야기 하였다. 언제 그렇게 왔다 가셨을까? 아무튼 그떄 

아버지가 형만 생각하는건 아니구나 하고 안도감을 느꼈던 일 이었다.

 

또 한번은 당시의 인기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 수요일 저녁의 형과 나의 필수 시청목록에 있었을만큼 즐겨보던 프로다. 90년대 중반즈음엔 가출 청소년 사건이 크게 사회문제가 된적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찰청사람들에서도 내 나이또래만해보이는 아이들의 가출 소식이 사건으로 다뤄지기도 했다.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어김없이 형이랑 다투던 어느날밤 나는 호기롭게 가출을 할거야 하면서 무작정집을 나간다.

형편을 드는 집안분위기에 뿔이났던 모양이다. 엄마가 '쟤 뒤따라 가봐,하고 형한테 넌지시 이야기 한것도 들렸다.

 

그 어린 국민학생이 갈곳이 어딨고 돈은 또 어디있을까? 

밤바람이 차던 그 저녁에 나는 무작정 얆은옷 하나를 걸치고 동네친구들의 아지트인 뒷산 동의공전으로 발을 옮겼다. 

 

뒤쪽 멀리서 따라 오던 형이 회유를 하며 '너 갈곳도 없잖아, '거기 올라가면 추워, '걍 그만하고 내려와,하고 소리쳤던게 들리는것도 같다.

 

학교 중턱쯤 올라갔을까 

어두 컴컴한 교정의 분위기에 발은 얼었고 형의 적절한 회유스킬에 말려 나는 반 강제적으로 

집으로 끌려왔다. 안방엔 하루일이 고단하신지 이불을 덮고 누워계시던 당신이 있었다.

혼을 내시겠지 하는 각오로 벌벌떨며 무릎을 끓고 있던 어린 막내를 아버지는 뜻밖에 

안아주시며 왜그랬어하고 물어보셨던거 같다.

 

화낼힘도 없으셨던건지 어떤지 알길을 없지만 참 그때 아버지의 품은 따뜻했다. 

남자의 품도 그렇게 따뜻했구나 하고 아직도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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