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현관문을 타고 방으로 들이치며 종이자락을 ‘팔랑’ 하고
간질이는 소리가 없었다면, 밖에서 밤을 꼴딱 새웠을 지도 몰랐다.
소리를 따라 방 안으로 돌아가니 커피 테이블 밑으로 작은 쪽지가 떨어져 있었다.
휘갈기듯 날림으로 빠르게 써내려 간 필체. 분명 그의 글이었다.
「10년 만에 하는 연락이라, 사실 막막했어. 네가 날 보는 것을 원치 않으면 어떻게 하나.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네가 가장 먼저 생각이 났었는지. 세상이 끝나가는 절망감 속에서
신기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네 얼굴이었어.
왜였을까.
글쎄, 네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편안했던, 행복했던 시절의 사람이라서?
나는 답을 내릴 수가 없을 것 같아. 너는 이럴 때 가장 현명하고 재치 있는
답을 내주는 사람이었잖아. 오랜 만에 만나선 급하게 떠나 미안해. 잘 지내,
그리고 행복하게 지내줘. 나는 너를 믿어.」
이렇게 떠날 것이었다면, 왜 전화까지 했을까.
그가 써 놓은 쪽지를 손으로 짓이겼다가 다시 펼쳐 갈가리 찢어버렸다.
눈물이 떨어지는 내가 미련스럽게 느껴지는지,
한참을 울고서도 섭섭한 마음이 가시질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요상스런 흰 상자 속 선물만을 남겨둔 채, 이렇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모습을 다시 본 것은 주말시간 혼자서 끼니를 때우던 순간이었다.
그는 TV 속에서 삭막하고 표정 없는 사진이 되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뉴스의 앵커는 그의 얼굴을 배경으로 빠르게 말을 전하고 있었다.
“지난 3월 21일 신고가 접수 되었던 토막 살인의 용의자 최 씨가
서울시 경찰에 의해 긴급 체포되었습니다. 최 씨는 스물다섯 살의
애인 박 모양이 만남을 거부한다는 것에 화가나 박 모양을 토막 살해 한 후,
지인들에게 시체의 일부분을 맡겨 범행을 은폐하려던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최 씨의 도피행각은 시체의 일부를 맡겼던 전처, 이 모씨가 상자 안에 담긴
시체를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를 하며 끝이 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서울시 경찰청에 나가있는 박상현 기자입니다.”
“서울시 경찰청에 나와 있는 박상현 기자입니다.
최 씨는 현제 4시간 째 취조실에서 심문을 받고 있는 상황이며,
시각별로 속속들이 범행을 자백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서울시 경찰청 측에서는 최 씨가 마지막으로 감추고 있는
박 모양의 머리 부분을 놓고 취조를 진행 중이나, 최 씨가
급작스런 묵비권을 행사하며 버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검식결과 신체가 상당히 회손 되어 있는 점을 미루어 사망자 식별이
불가능 한 것으로 알려져, 신체의 얼굴이나 이의 모형을 확인하기 전까진
최 씨가 지인들에게 전달 한 시체가 정말 박 모양인지에 대해 알 수가 없어,
최 씨의 연쇄살인 가능성 또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경찰에선 또…….”
그리고 행복하게 지내줘. 나는 너를 믿어.
그게 내가 행복하게 지내기를 믿는 다는 말이 아니었어?
그가 떠나고 한 번 뜯어보지도 않은 스티로폼 상자는
냉장고 가장 밑 칸에서 냉기를 쐬고 있을 터였다.
나는 냉장고에서 꺼내 온 김치며, 멸치볶음, 풋마늘 장아찌 따위를 내려다 보았다.
“너희는 요 며칠 무슨 바람의 쐬고 있었니?”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