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귀래 ‘사랑의 집’ 새로운 피해자가 나타났다. 임지훈 씨(41세), 임 씨는 농아인이다.
임 씨는 7살 때 사랑의 집 장 아무개 씨에게 맡겨졌다. 장 씨는 웃으며 어린 임 씨를 맞이했다. 그러나 임 씨가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울자 장 씨는 임 씨를 때리기 시작했다. 당시 사랑의 집은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 있었다.
장 씨는 자신 스스로 장애인을 ‘목’숨바쳐 ‘사’랑하여 목사라 칭했다. 방송에서는 장 씨를 ‘천사 아버지’로 소개했다. 부모가 버린 가여운 장애아를 거두어 키운다고 했다.
임 씨는 그 집에서 스무 명 남짓한 지적장애인과 함께 생활했다. 임 씨가 기억하기로 아이들이 가장 많았을 때는 24명까지 있었다. 임 씨를 제외한 다른 장애인은 지적장애가 있었다. 장 씨 부부는 임 씨에게 모든 일을 시켰다. 스무 명의 장애인을 씻기고 밥 먹이는 일, 머리 삭발, 손톱 깎기, 집 청소, 화단 관리, 빨래 등 모든 게 임 씨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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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씨의 일과는 아침 5시에 일어나 화단에 물주는 일로 시작됐다. 아침은 8시경에 먹었다. 밥은 식판에 담아 먹었는데 밥 양은 식판 바닥에 얇게 깔릴 정도였다. 반찬은 없었다. 밥과 맹물뿐이었다. 임 씨는 식판에 밥을 퍼서 다른 장애인들이 밥 먹는 것을 도왔다. 식사 뒤에는 모든 이들의 머리 감기, 양치질 또한 그의 몫이었다. 손에 닿는 물은 늘 차가웠다.
그렇게 아침, 저녁을 먹었다. 점심은 없었다. 저녁 또한 먹지 못할 때도 잦았다. 간식도 없었다. 종종 찾아오는 손님이 귤을 많이 가져올 때면 귤을 먹을 수 있었다. 늘 허기졌다. 먹는 게 없으니 변도 잘 나오지 않았다.
낮에는 바닥 청소 등 모든 집 청소를 했다. 혹은 장 씨 부부 안마를 하거나 흰머리를 뽑았다. 밤에 잠을 잘 자지 못해 낮에 쪽잠을 자기도 했다. 청소는 밤에도 이어졌다. 창문 청소, 먼지제거, 광택내기, 빨래 등 할 일은 끊이질 않았다. 빨래가 빨리 끝나면 잘 수 있었고, 늦게 끝나면 그날은 잠도 못 잤다.
장 씨 아내는 늘 화를 때며 임 씨를 때렸다. 왜 맞는지 임 씨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임 씨도 항상 화가 나 있거나 겁에 질려 있었다.
당시 사랑의 집에는 징벌방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곳에 들어가면 문을 잠가 가둔 후 때리고 굶겼다. 임 씨뿐만 아니라 다른 장애인도 많이 맞았다. 매일매일 맞았다. 맞는 게 일과였다. 긴 쇠파이프, 두꺼운 나무각목 등으로 맞았다. 장 씨는 나무를 깎아 물에 담갔다가 3일 뒤 꺼내 임 씨를 때리기도 했다. 그때의 흉터가 아직도 임 씨의 몸에 남아 있다. 머리, 가슴, 어깨, 손 등 온몸에.
임 씨가 12살 무렵, 벽에 ‘엎드려뻗쳐’ 자세로 기댄 채 허벅지를 맞을 때였다. 맞고 있던 허벅지가 너무 아파 두 손으로 감쌌다. 몽둥이는 다시 날아들었고 허벅지를 감싸고 있던 임 씨의 두 손뼈가 함몰됐다. 지금도 손가락에서 손등으로 이어지는 불룩한 뼈마디가 움푹 들어가 있다.
사랑의 집 장애인들은 그곳에서 나체로 생활했다. 장 씨 부부는 옷을 주지 않았다. 추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옷을 입지 않으니 성기도 노출됐다. 옷은 손님이 올 때 혹은 사진 찍을 때만 입을 수 있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고 씻은 뒤에 지급됐으며 속옷 없이 상의와 하의 하나씩이었다. 신발은 없었다. 대신 양말 하나가 지급됐다. 낮 동안 옷을 입고 있다가 밤 9시경 잠자기 전에 벗어야 했다. 한 방에서 남녀가 분리된 채, 벌거벗은 몸에 이불만 덮고 잤다. 베개는 없었다.
어느 날엔가 장 씨가 방으로 안마할 여자아이를 불렀다고 임 씨는 말한다. 여자아이가 장 씨와 함께 방으로 들어갔고 문은 닫혔다. 옷을 입지 않고 생활하니 그때도 여자아이는 나체로 있었다. 키가 크고 가슴이 나온 여자아이였다.
임 씨는 사랑의 집에서 8년을 갇혀 살았다. 그 세월 동안 다섯 번의 탈출 시도가 있었다. 15살, 다섯 번째 탈출 끝에 그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땐 이미 오른쪽 눈은 바늘에 찔려 더는 보이지 않고 왼손과 오른손 뼈는 맞아 함몰되었으며 양팔에는 낙서 같은 문신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었다.
문신은 임 씨가 9살이던 해 2월께 장 씨가 직접 바늘로 새겼다. 아프다고 반항하면 돌아오는 건 구타뿐이었다.
첫 탈출 시도는 그해 5월에 이뤄졌다. 9살 임 씨는 자정께 집 뒤편으로 돌아가 담을 넘었다. 그러나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장 씨에게 연락했다. 첫 번째 탈출은 그렇게 실패로 끝났다.
처음 잡혀 들어왔을 때, 장 씨 부부는 임 씨의 손과 다리를 뒤로 묶은 채 물이 담긴 욕조에 임 씨 머리를 강제로 처박았다. 물고문이었다. 코와 귀에 물이 많이 들어갔다. 임 씨는 사랑의 집에서 화장실이 제일 무서웠다고 한다.
12살 무렵, 임 씨는 또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문이 잠겨 있어 창문으로 나갔다. 좁은 창문에 몸이 껴 아팠다. 간신히 나갔지만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경찰이 장 씨에게 연락했다.
잡혀 온 임 씨에게 또 한 번 고문이 가해졌다. 장 씨 부부는 이번에는 그의 오른쪽 눈을 대바늘로 콕콕 찔렀다. 장 씨 아내가 저항하는 임 씨를 꽉 붙잡았고 장 씨가 임 씨 눈을 세 차례 찔렀다. 그리고 장도리로 치아를 내리치고 생니를 뽑았다. 찔린 눈에서 피가 났지만 병원에는 데려가지 않았다.
세 번째 탈출은 13살 경이었다. 욕실을 통해 대문으로 나갔다. 장 씨가 없을 때를 노렸다. 그러나 집 밖에서 만난 사람이 문신을 보고 장 씨에게 연락했다. 이번에는 손바닥과 허벅지를 몽둥이로 맞았다.
그러나 얼마 후, 임 씨는 또다시 탈출을 시도한다. 극심한 허기도, 매일 이어지는 구타도 견디기 힘겨웠다. 식당 문을 통해 거리로 나와 차도를 따라 걸었다. 지나가는 이에게 배고프다 호소하니 만 원을 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남자가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장 씨에게 전화했다. 집에 끌려온 임 씨는 이번에는 펜치로 손톱을 뽑혔다. 양손 검지와 중지, 총 네 개의 손톱이 뽑혀 나갔다.
그리고 15살 때, 다섯 번째 탈출을 시도한다. 팔짱을 끼어 팔과 손이 보이지 않게 가렸다. 누군가 다가오면 화를 내고 소리 지르며 문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
다섯 번째 탈출 끝에 사랑의 집에서 도망친 임 씨는 서울을 벗어나고자 했다. 차표를 주워 의정부로,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갔다. 포천에 도착해 구걸을 했다. 돈은 없고 배는 고팠다. 길에 있는 음식을 주워 먹었다. 그러던 중 포천 여관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 할아버지는 강원도 화천 평화의 집으로 임 씨를 데려다 주었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었다. 밥도 많이 주었다. 19살 때, 평화의 집 원장이 인천 연안부두의 식당 일자리를 소개해 줄 때까지 임 씨는 그곳에서 5년을 살았다.
그러나 평화의 집에서도 글은 배우지 못했다. 스무 살 이후, 임씨는 스스로 한글과 수화를 조금씩 배웠다. 따라서 그가 쓰는 언어는 한정되어 있다. ‘나쁘다’. 이 낱말이 마흔한 살의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최고로 지독히도, ‘나쁜’ 말이다.
임 씨는 수화와 필담, 온몸을 써가며 말한다. “장 씨는 나쁜 사람”이라고. “장 씨 부인도 나쁘다. 나쁘다, 나쁘다” 그 말이 반복된다. 하얀 종이에 장 씨 이름을 썼다. 그리고 종이가 찢길 듯한 힘으로 장 씨 이름에 엑스자를 쳤다.
사랑의 집에서 8년을 지낼 당시 임 씨는 죽어나간 이들도 직접 봤다.
어느 날 아침, 머리 감기려고 사람들을 깨우는데 한 아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맥도 뛰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를 못하니 굉장히 야위었고 그전부터 자주 구토하던 아이였다. 아이가 죽은 것 같다고 장 씨 아내에게 전했다.
그날 밤, 장 씨가 죽은 아이를 비닐봉지에 담아 트럭 짐칸에 싣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임씨는 지켜봤다. 다음 날 아침, 장 씨는 혼자 돌아왔다.
그 후에도 같이 생활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없어졌다. 하나같이 마르고 구토하며 밥을 먹지 못하던 아이였다. 아이들이 사라지면 임 씨는 ‘죽어서 장 씨가 갖다 버렸구나’ 생각했다. 임 씨 기억에 8년 동안 여덟 명의 아이가 사라졌다. 그 중 여섯 명은 죽었다고 임 씨는 확신했다. 그러나 두 명은 나름 건강한 아이들이었기에 죽었다고 단언하진 않는다. 그저 어느 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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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씨는 사랑의 집에서 ‘장성대’로 불렸다. 그의 팔에는 ‘장성대’라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지난해 6월, 원주 사랑의 집에서 분리조치 된 네 명의 장애인 중 한 지적장애인의 팔에도 ‘장성대’라는 이름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임 씨가 사라지자 장 씨가 다른 사람을 장성대라는 이름으로 등록한 것이다.
또한 사랑의 집에 있을 당시 임 씨가 집안일을 도맡았다면 장 씨가 키우는 염소 돌보는 일을 했던 ‘장성민’이 있었다고 임 씨는 전했다. 그도 임 씨처럼 많이 맞았고, 장 씨가 나무 몽둥이로 장성민의 성기를 때리기도 했다고 임 씨는 기억한다. 임 씨가 기억하는 장성민은 지난해 사랑의 집에서 분리조치 된 ‘장성민’ 씨다.
사랑의 집 탈출 후 임 씨는 화천 평화의 집에서 인천 식당으로, 그 뒤 음성에서 파주로, 다시 현재 일터가 있는 곳으로 일자리에 따라 거처를 옮기며 홀로 살았다. 손에 새겨진 문신이 부끄러워 여름에도 털장갑을 끼고 다닌다. 문신을 본 이가 혹시라도 장 씨에게 연락할까 봐 임 씨는 지금도 여전히 두렵다고 한다.
그는 사진 속 장 씨 부부가 아이들에게 밥을 떠먹여 주는 모습은 “모두 다 거짓”이라고 강조했다. 밥을 떠먹여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행을 간 적도 사진 속 그때, 한 번뿐이다. 아이들은 늘 허기진 상태로 방 안에 주저앉아 있었다. 앉을 힘이 없으면 쓰러지듯 누워 있었다.
“우리는 옷이 하나였는데 장 씨 부인은 옷이 굉장히 많았다”, “우리 방에는 TV도 옷장도 없었지만, 장 씨 부부 방에는 TV도 있고 냉장고도 옷장도 상당히 컸다”, “장 씨 부부 방 안엔 돈도 많았다” 임 씨는 일어나 양팔을 벌려 ‘크고 많음’을 표현했다. “장 씨 부부는 많은 걸 가졌지만 우리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
임 씨는 SBS 궁금한 이야기Y에 방영된 사랑의 집 방송을 보고 SBS 측에 연락했다. 이를 통해 임 씨는 30여 년 만에 가족을 만날 수 있었다. 임 씨의 어머니는 궁금한 이야기Y 두 번째 방송에서 자신의 아이를 사랑의 집에 보냈다고 증언한 세 가족 중 한 사람이었다. (임 씨가 7살에 사랑의 집에 갔다고 기억하는 것과 달리 임 씨 어머니는 9살에 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 장 씨는 감금, 폭행, 시체유기, 횡령,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 사회사업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돼 있다. 그러나 장 씨와 그의 변호사는 “장 씨는 장애인을 사랑으로 보살폈으며 평온한 가정을 폭도들이 파괴했다”라고 주장하며 탄원서를 내고 선처를 호소하고 있다.
장 씨에 대한 다섯 번째 공판은 15일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늦은 2시에 열린다. 이날 공판에는 임 씨를 비롯해 임 씨의 어머니와 고 이광동 씨의 어머니가 증인으로 나선다. 고 이광동 씨는 12년 전 아사로 사망했으나 장 씨가 장례를 치르지 않고 방치해놓다가 작년 6월 사랑의 집 사건이 알려지고 유족이 나타나면서 지난해 9월 장례를 치렀다.
임 씨가 나타나면서 사랑의 집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30여 년 전 기억을 꺼내어 펼치는 그의 모습에 최근 부산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이 자신의 삶을 증언하고자 하는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피해자이자, 생존자이자 동시에 증언자인 임 씨는 오는 15일 법정 앞에 선다. 법은 정의에 따라 심판할 수 있을 것인가.
원주 귀래 사랑의 집 사건 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임소연 활동가는 “가해자 처벌만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게 정부와 지자체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요구한다. 장 씨가 그러한 만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왔던 사회 전반의 시스템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시혜와 동정의 대상으로 대했던, 그리하여 사회복지를 권리가 아닌 은혜로 베풀었던 사회에 책임을 묻는다. 그리고 말한다. 더 이상 장애인을 ‘사랑’하지 마라. ‘사랑의 집’은 과거 유물로 폐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