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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싫으면 읽지 말아라"
게시물ID : phil_729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히읗
추천 : 2
조회수 : 44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10/30 06:48:27
"읽음"이라는 행위는 얼핏 능동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사실은 해석학적 수동성을 내재하고 있다. 이를테면, 끔찍하거나 혐오스러운 이미지나 영상을 "보는" 행위에 있어서 행위자는, 먼저 이미지를 인식하여 해석한 뒤에야 비로소 이미지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이미지의 충격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텍스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읽기 싫으면 읽지 말아라"라고 능동적 회피를 종용하는 것은 따라서 순서가 뒤바뀐 것일 수 밖에 없다. 일단 읽은 뒤라야 읽기 싫은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 읽고 불쾌를 느낀 후에도 다시 그 저자의 글을 또 읽게 되는 경우에는 능동적으로 회피를 거부한 것이므로 스스로에게 선택의 책임을 부과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여전히 적어도 최초의 한 번에 있어서는 독자는 무방비로 수동적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 한 번의 불쾌한 경험 이후에도 다시 그 저자의 글을 읽게 되는 경우의 동기는 충분히 정당할 수 있다. 독자가 매우 성급하고 단정적인 사람이 아닌 바에야, 단 한 번의 글로 글쓴이의 나머지 모든 글을 판단해버리지 않고 몇 번의 유예된 경험 후에 차차 글쓴이에 대한 이미지를 구성하여 나중에야 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읽기"라는 행위의 이러한 해석학적 수동성은 사실 "쓰기"라는 행위, 혹은 그러한 종류의 "창발적 행위" 일반이 가지는 대단한 능동성에 대한 단초를 담고 있다. 이것이 저자와 독자, 화자와 청자, 창작자와 감상자 간의 고전적 권력 관계의 정체이다. 모든 글, 음악, 예술품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그 "누군가"에 대한 비밀을 담고 있게 마련이다. 더 과감히 말하자면, 창작된 대상물은 그 주체의 존재를 분유받는 것이기도 하다. 창작의 주체가 그 대상물을 대상화하는 방식이 감상의 주체가 그 대상물을 대상화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지배하면 할 수록 그 대상물은 그 창조자와 더 가까움을 의미한다. 따라서 창작이 감상을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현상은 물론, 창작자와 창작물이 완전한 합치에 이르를 때 성취된다. 감상자에 대해 창작자가 절대적인 지배권력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절대적인 지배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창작자로서 창작물과의 완전한 합치, 절대적인 통일, 온전한 분유를 이룰 수 있는 주체가 과연 있을 수 있는가? 있다면, 오직 신 뿐일 것이다. 또한 신이라면, 모름지기 그러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이러한 해석학적 맥락은 해체되어 왔다. 니체가 천명한 신의 죽음은 이 맥락에서, 그 누구도 그런 절대적인 주체가 될 수 없음을, 그 어떤 창작자와 창작물도 완전한 동일성을 성취할 수 없음을, 그 어떤 분유도 온전할 수 없음을 천명한 것이기도 하다. 절대적 소통의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은 그와 함께 모든 소통의 합리적 가능성을 함께 부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다만 비합리적이고 자연적이고 귀납적인 가능성 뿐이다. 사실 가능성이라는 말은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 비합리와 자연과 귀납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가능적 본질이 아닌 현실적 현상에서로, 본질은 없고 다만 현상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가능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다만 현상으로서 존재할 뿐인 것이다.

이러한 무본질적 현상에 논리를 적용하면 종이 한 장 차이로 유아론과 범심론이라는 양극을 널뛰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 두 극단이 한 데서 만나게 된다. 논리는 가능적 본질이자 추상적 형상으로서의 개념들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소통을 거부하는 것과 소통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두 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는 도무지 와닿지가 않는 것은 논리를 아무리 적용해도 이해할 수 없으며, 반면 이미 와닿는 것이라면 비논리적으로 보일지라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현상적 세계와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만남이 바로 비합리적이고 자연적이고 귀납적인 방식에 해당한다. 정확히 이러한 맥락에서만 "읽기 싫으면 읽기 말라"는 배타적이자 폭력적인 언사가 정당하게 성립할 수 있다.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완벽하게 단절된 상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는 합리적 소통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현상과의 만남까지 닫아버리는 것으로, 유아론이라는 한 극단을 나타낸다. (반대 극단은 현대 미술에서 자주 발견되는 "무엇을 생각했든 그것은 그 자체로 맞다"는 식의 무분별로 예증된다)

이렇듯 논리를 해체하고 부정하여 제거하면 모순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은 필연적이다. 극단적 유아론과 극단적 무분별 사이에 서있다는 것은 아무런 기준도 없음을 의미하며, 나와 세계 사이에 아무런 상호적 관계도 성립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곧 나이며 한편으로는 나는 내 안에 갇혀있는 형국이 된다. 절묘한 것은 바로 그 지점, 세상과의 자연적 만남이 절대적 모순으로 붕괴된 판단의 아노미 상태에서 반드시 논리적 이해와 종합이라는 것이 작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때의 이 논리의 발현이라는 것은 분명 위의 비합리성/자연/귀납과 구별되는 것임에도 그 양상은 놀라우리만치 유사하다. 그 양상이 바로 "직관"이다.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이 감성과 오성을 구분하면서도 그 둘의 필연적 관계를 묘사하는 것이 이와 정확히 동일한 맥락이다. "오성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며, 감성 없는 오성은 공허하다"는 탁월한 표현으로 칸트가 포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 관계이다. 비로소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상호보완적이면서도 변증적인 관계 전체가 드러나며 본질과 현상의 동일성이 알려질 때 해석학적 성취 - 해석학에서는 해석이라 부르고 언어의 맥락에서 소통이라 부르는 것 - 가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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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전에 써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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