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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자기결정권
게시물ID : phil_73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연.
추천 : 6
조회수 : 97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3/10/31 15:13:36
혼전순결은 개인의 신념으로서는 존중받을 수 있어도, 사회적 규범으로서는 존중받을 수 없다.
그 이유를 아주 간단히 축약하자면, 사회 구성원에 대한 억압이자 차별적인 강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혼전순결은 개인의 성생활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규정지어 탄압하는데, 이것은 여성에게만 적극적으로 작동하고 남성에게는 관대한 면모를 보인다. 옛부터 지금까지 여성의 섹스는 손쉽게 불명예가 되었지만, 남성의 섹스는 별 문제가 안되거나 오히려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즉 혼전순결은 근본적으로 여성의 성을 통제하고, 그를 통해 여성을 사회적인 통제를 받아야하는 존재로 대상화 시키지만, 동시에 남성에게는 관대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여성의 복종을 요구하는 차별의 기제로서 작동해왔다는 얘기다.
이러한 불공평하며 억압적인 도덕체계는 언젠간 철폐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자들이 귀족들을 끌어내리고 혈통에 대한 도덕을 폐기했듯이.


지금까지는 단순한 일반론이다. 저 ‘타당한’ 논의가 막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혼전순결이라는 차별의 기제를 거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지 못했다. 그러나 이후 재미있는 사건을 통해 혼전순결에 대한 반대는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개념이 논의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자.


엥겔스는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라는 저서에서 고대 원시 사회는 일부일처제도, 일부다처제도, 일처다부제도 아닌 난혼제라고 주장했다. 단일한 파트너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그러한 개념은 인류 사회에서 최초로 잉여자원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자본의 축적, 즉 사유재산과 소유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다시말해서 일부일처제라는 도덕 자체가 ‘내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이 발생한 결과라고 주장한 것이다.
저러한 난혼제 설은 후일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부정되지만 그것은 비교적 최근의 연구결과고, 냉전기만 하더라도 저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았다. 그러한 배경 하에서 ‘프리섹스’라는 운동이 시작된다.

최초에는 혼전순결에 대치되는 새로운 도덕 체계로서 작동했으나, 시간이 흘러 프리섹스는 남성의 신무기가 된다. 섹스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당신은 당신을 억압하는 혼전순결을 머리로는 거부했으나, 여전히 마음으로는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인간들이 생겨난 것. 뭔가 주객이 전도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그에 대항할 논리가 딱히 없었기에 많은 진보적 여성들이 그 문제로 고민에 빠졌다. ‘내가 성적으로 개방적이지 못한 것은 여전히 가부장제에 굴복하고 있기 때문인가.’

그러한 긴장상태는 곧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저러한 논의를 들이대면서 여성과 관계를 맺은 남성들이 다른 남성들에게 ‘나 ㅇㅇ랑 해봤다’고 자랑하고 다니기 시작한 것.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항의를 하면 돌아오는 말은 ‘성관계를 말하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그 또한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식이다’라는 기묘한 대답이었다. 서구권은 물론 동양권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러한 괴이한 상황에 몰린 여성들은 결국 성에 대한 논의에서 진보적 남성 집단과 거리를 두고 새로운 논리를 만들기에 이른다. 성적 자기결정권이 논의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과거를 놓고 봤을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다. 현재로서는 개인의 성은 개인의 판단, 즉 자기결정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성적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불명예가 될 수 있는 환경 하에서는, 개인의 성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 규범도 차별의 기제이자 유리한 자의 무기가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성이란 온전히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는 문제일 뿐이며, 타인의 판단에 대해서는 닥치는 것 이상의 결론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여기서 유의해야할 점이 있다. 성에 대한 인식이 정말로 온전한 개인의 결정인가, 아니면 사회의 강압에 의한 결과인가. 이를 조금 틀어서 비유하자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적 소수자들의 고통은 정말로 그들이 잘못된 존재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들을 잘못된 존재로 여기는 사회의 탓인가.
이러한 시점에서 혼전순결이 사회적 규범으로 여겨지는 현실은 여전히 비판받아야 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순결을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적 경험을 불명예로 치부하는 사회적 시선 때문에 불만스럽지만 받아들이려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강하게 남기 때문이다. 또한 혼전순결이 차별의 기제라는 최초의 논의 또한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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