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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범했던 그 양반 2
게시물ID : soda_663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ㅂㅎ한
추천 : 37
조회수 : 869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2/21 09:50:33
타인의 불행은 애석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애석한 이야기가, 나를 그의 등장인물로 삼고자 다가온다면 그것은 정확한 판단과 신속한 대처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된다. 보랏빛 선글라스 너머 그 양반의 눈길이 나를 향하고 있음이 확실해졌을 때, 나는 1호실 아저씨가 일요일 아침 겪어야 했던 일에 대한 심심한 유감을 접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 양반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그를 무시하고 옥상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는 것을 싫어하는 이들에겐 이 고시원의 불문율은 퍽 편리한 점이 있다. 별다른 용건 없이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든가, 누군가를 불러 세우는 일이 금기시된다는 점에서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 있고, 동시에 타인의 관심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디 그 불문율이 그 양반의 관심으로부터 날 보호해주길 바라며 나는 천장으로 시선을 향한 채 옥상의 흡연 장소로 향했다.

‘터벅… 터벅…’
  
등 뒤로 들려오는 그 양반의 발걸음 소리는 내 바람이 배신당했음을 알려줬다. ‘터벅’ 하는 내 보조에 맞춰 들리는 ‘터벅’ 하는 그의 발걸음 소리로 그의 목표가 정확히 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양반은 내 등을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고시원의 옥상은, 그곳으로 향한 길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더 이상 향할 곳이 없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탁 트여있으면서도 동시에 사방이 막혀 있는 공간이다. 나는 부디 그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일만은 없길 바라며, 담뱃불을 붙여 하늘에 구름 한 모금을 불어넣었다. 가벼운 바람 한 줌이 내가 불어넣은 담배 연기를 몇 조각으로 찢는 게 보였다.

“저기요. 학생, 나도 담배 한 개비만 좀 줄 수 있어요?”

내 바람도 잘게 찢겼다. 그 양반답지 않은 퍽 정중한 말투였지만 그 양반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대답하지만 않으면 나에게 관심을 곧 끊겠지…’ 나는 아무 말 없이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그는 대단히 반갑게 담배 한 개비를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라이터는?”이라 물었다. 그 양반은 졸지에 담뱃불까지 조공하게 된 나를 보며, 이 관계를 젊잖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손윗사람과 그에 공손히 응하는 손아랫사람의 관계로 해석하는 것 같았다.

이내 그 양반은 손윗사람으로서 체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애써 무시하는 티를 드러내는 나에게 자신이 왜 1호실의 문을 열게 됐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주방에서 1호실 아저씨가 김칫국을 끓이는 모습을 봤댄다. 신김치를 넣은 김칫국 냄새가 맘에 들어서 ‘뭐 넣고 끓이나’ 한번 봤댄다. 김치뿐이었댄다. 나이 쉰은 먹었을 법한 1호실 아저씨가 추운 겨울날 그래도 따뜻한 국 한 그릇 먹어보고 싶어서, 물 한 됫박에 김치 몇 조각 넣어 끓이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댄다. 자기도 없는 살림이지만 그래도 냉장고에 남은 콩나물이라도 한 봉지 좀 줄까 해서 그 방에 찾아간 거였는데, 너무 역정을 내기에 당황스러워서 그랬댄다.

하기야 요즘 1호실 아저씨가 일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겨울이면 이 고시원 사람들의 일감은 자주 끊긴다. 더러 월세가 밀려 내쫒기는 이들이 생기곤 한다. ‘1호실 아저씨가 고기를 언제 구웠던가?’ 기억을 더듬어봤다. 기억나지 않았다. 그 김치도 필시 고시원 원장에게 사정 몇 마디 해서 구박 몇 마디와 함께 얻어온 것일 게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맘이 안쓰러웠다.
그 양반은 받아든 담배 한 개비를 다 태우고선, “너도 나중에 1호실 아저씨한테 좀 잘 좀 해드려라”며 계단을 따라 자기 방으로 향했다. 나는 담배 한 개비를 더 태우고서 내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은 하늘은 맑고 겨울 공기가 쌀쌀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그 양반은 그날 1호실 아저씨의 김치찌개를 훔쳐 먹다가 걸렸다. 그렇게 그 겨울 기나긴 사흘의 첫째 날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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