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이름으로 대학생들은 눈코 뜰새 없이 바쁘다.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다. 대학생들이 관리해야 하는 목록은 점점 더 늘어간다. 학생들이 취업을
할 때 써야 하는 자기소개서를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대다수 기업들이 제시하는 자기소개서 양식을 채우려면 대학생들은 정말이지 가랑이 찢어지게 뛰어다녀야 한다. 학벌과 학점과 영어 시험에서 시작된 취업 스펙 3종 세트는 자격증과 해외 연수를 포함한 5종 세트로 발전하였다. 이제 인상 관리에 성형이 포함된 7종 세트의 시대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문제는 요구하는 양이 많다는 것만이 아니다. 상충하는 것을 한꺼번에 요구한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대학생들은 자유로운 시간에 책도 많이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사회적 네트워크도 넓혀야 하지만 동시에 스펙을 쌓기 위해 세상과 단절되기도 해야 한다. 한편에서 원칙적이어야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유연해야 한다.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교양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목표지향적인 냉혈이어야 하면서 동시에 대인관계도 좋아야 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소개서를 '자기소설서'라고 부른다.
왜 자본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대학생들에게 요구할까? 현재 체제가 잉여를 해소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잉여를 생산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시장은 학생들의 스펙에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를 계발하는 능력을 긍정하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턴만 하더라도 대다수는 복사기나 돌리는 잔심부름이나 하는 것이 전부다. 생생한 직업 체험이나 경력 관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다.
솔직히 말해 스펙은 이 잉여인가의 시대에 '자기관리'라는 도깨비 방망이로 탈락시킬 놈을 찾기 위해 강조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없는 시장의 무능을 '자유'의 이름으로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버린 것이 바로 스펙의 실체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하였다. 이 체제에서 시장이 정말 성공하였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을 자기계발의 화신으로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게 하였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대학생들은 자신의 무능과 무기력과 줏대 없음과 나태함과 방탕함을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이 모든 문제는 게으르고 찌질한 자신의 탓이 되어버렸다. 체제는 완벽하게 승리하였다. 청춘을 자학하는 잉여로 만들어서 말이다. 자기를 계발하는 주체의 이면은 자학하는 주체이다.
-p59~61
이들에게 가치의 척도는 상품화이다. 우리 사회에 팔릴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 수 많은 아이템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래서 이들에게 김예슬은 '대학을
거부한 젊은이'가 아니라 '글을 참 잘 쓰는 부러운 또래'이다. -중략-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김예슬이 무엇에 대해 어떤 선언을 하였는지가 아니라 그가 소유한 '글쓰기 솜씨'라는 아이템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예슬 선언을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그의 학벌과 글 솜씨는 유이의 '꿀벅지'와 다르지 않다.
글 솜씨든 꿀벅지든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 모두가 탐해야 하는 아이템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386들은 이런 대학생들을 속물이라고, '찌질이'라고 격렬히 비판한다. 그러나 우리가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잉여로 내쳐진 자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
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이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나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상품으로 치장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본래 속물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속물이 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p65~66
혜교는 많은 대학생들이 시위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기성세대가 대안이라고 내놓는 것마저도 이들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대학생들을 '철딱서니'없다고 말하지만 혜교가 보기엔 오히려 그들이 돌아봐야 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의 '꼬락서니'이다.
대학생들을 탈정치화되었다고 말하는 그들의 '정치화'된 '꼬락서니'말이다. 우파들은 걸핏하면 가스통을 들고 설치고 좌파들은 나이 육십이 넘으면 투표권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한다. 우파들의 가스통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좌파들이 민주주의라고 외치면서 생각이 있는 사람들만 투표를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반민주적인가? 어디에도 민주주의는 없다. 아니, 혜교가 보기에 이게 바로 민주주의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진 듯 말하지만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이고,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다.
여기서 혜교와 맞닿아 있지만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냉소주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냉소주의,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한 냉소이다. 얼마 전
만난 한 대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명박과 박근혜와 한명숙과 강기갑의 차이를 잘 모릅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가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사기꾼이라는 것 만큼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정치의 속성(사기)을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무감각해져버렸고 정치가 주창하는 모든 가치에 냉소적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들은 자세히는 모르지만 '본질'이 무엇인지이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한다. 본질을 알기 때문에 자세한 것들을 시시콜콜하게 알아볼 필요도 없다. 진정한 냉소주의이다. 이들의 냉소주의는
투표를 하지 않는 것도, 그냥 그대로 이 세상을 견디고 받아들이든 것도 한순간에 정당화해주는 알리바이이다. -중략-
그러나 이들에겐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 장비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맨 정신으로 살아갈 수가 없다. 사실 이들이
말하는 본질이 틀린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말했어야 하는 것은 '그러면'이라는 막연한 희망의 언어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실천의 언어였어야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세상이 잘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의 말이 아니라 정치란 본질적으로 부패하고 , 민주주의란 그 자체로 양날의 검이자 혼돈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야 한다.
-p88~90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단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한다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박에 없다.
-p106
오늘날 학교 안의 권력관계는 판이하게 다르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정의의 편도 아니고 중재자도 아니다. 오히려 이 아이들이야 말로 힘 셈 아이들,
잘사는 아이들과 함께 삼위일체가 되어 반에서 가장 덜떨어진 아이를 괴롭힌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는 가난하고, 공부 못하고, 무엇보다 덜떨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사람은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급격한 변화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가 약자가 아니라 덜떨어진 존재로 인식된다. 맞는 것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 식으로 폭력은 정당화된다.
무엇보다 학교 안 권력자의 삼위일체가 말하는 것은 학교 폭력이 우정에 대한 도덕적 폭력이 아니라 경제/문화/육체 자본의 삼단 합체 속에서 벌어지는 계급적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p114
교육이야말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초월한 척하지만 권력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만이 아니라이 사회가 요구하는 몸과 마음을 만들어내는 훈육이기 때문이다. 훈육이란 말 자체가 폭력적이지 않는가? 그래서 학생들이 가장 믿지 않는 말이 이 모든 것은 너를 위한 교육이고 사랑이라는 말, 바로 그 거짓말이다.
-p120
가족을 하숙집이 아니라 가족으로 만드는 것, 그것을 감정노동이라고 부른다. 사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감정노동을 모성이나 가족애라는 이름으로 기를 쓰고 노동이 아닌 인간의 다른 활동인 것처럼 포장해왔다.
-p134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지고 가족이 하는 경험도 이전과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정상적인 가족, 제대로 된 가족이라는 정답을 가지고 있다. 그 정답지를 들고 우리 가족이 정답인가 오답인가를 평가한다. 매끄러운 소통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감정노동이 가족을 떠받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서로 말을 섞고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문제와 갈등은 회피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서 마치 소통을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며 우리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만을 끊임없이 확인해왔다.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서, 자주 만나지 않아서 우리는 우리 가족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토론하고 발견하여야 하는 것은 가족끼리든 가족 밖에서든 문제는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 우리는 늘 치고 박고 싸우면서 끊임없이 침묵의 감정노동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 문제를 감내하고 해결하기 위한 감정노동을 감수할 때만이 가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진실이다.
그래서 또 우리는 이들을 비난한다. 청년들의 다른 처지를 다 이해한다는 사람조차도 사랑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한 입장에 선다.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사랑을 폄훼하는 것만큼은 봐줄 수가 없는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지만 마음껏 사랑하지 않고 사랑에도 계산기를 들이대는 이들의 행태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젊음의 특권이 사랑인데 사랑에 대해 이토록 식어버린 세대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이 세대에는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어떤 영역보다 이들의 사랑에 특히 분노하는 이유는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때가 청춘이며 그 에너지는 이기적인 계산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어리석은 것이면서도 숭고한 것이다. 바로 자본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연애와 사랑이야말로 인간 성장에서 가장 극적인 드라마이다. 연애만큼 지독한 감정노동이 있을까? 그 고통스러운 감정노동마저 달콤하게 인내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바로 사랑이다. 또 사랑을 통해 우리는 타자에 의해 나의 자아가 붕괴되는 경험을 겪는다.
나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사랑하는 그만이 중요하다. 모르는 존재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경험이다. 그래서 사랑은 등가교환 따위는 세상에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중략-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절대적인 타자와의 만남, 그리고 실연의 상실을 견뎌내는 법까지, 이것을 통해 인간은 성장해간다. 사랑과 실연이 성장의 드라마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그렇기에 상처는 인간성장에서 필수적이다. -중략- 그런데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차 야 할 이 캠퍼스가 사랑에서조차 계산기를 두드리는 정나미 떨어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우리는 개탄한다. 이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캠퍼스에서 사랑이 죽어버린 것이야말로 청춘의 진정한 죽음이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p148~150
얼마 후 그녀는 말했다. "자기야, 지금 그럴 때가 아니야. 좀 더 현실적인 남자가 되어줘."
그 말 한마디로 준석의 삶이 달라졌다. 사랑과 자신의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녀는 당장 준석이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대신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에게 믿음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준석은 이 불안한 시대에 미래를 기획하고 계획하고 관리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중략- 그녀와 함께 공동으로 데이트 비용을 바련하고 충당하는 통장에 그녀는 '사랑해'라는 이름으로 계좌에 송금하였다 잔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사랑의 징표이며 자신이 그 사랑에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과 사랑을 뒤덮은 불안, 그것을 같이 돌파해가자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7,80년대 가난한 부부가 단칸 셋방에 살면서 통장 하나를 만들고는 그것으로 망망대해를 해쳐가겠다고 결심했던 복고풍 연애사와 닿아 있다. 친구들은 말한다. "넌 확실히 미쳤어." 준석은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사랑은 미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준석과 준석의 여자친구가 꿈꾸는 사랑은 근대적 서사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애를 기획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있기에 그들은 사랑의 서사라 할만하다.
또한 준석에게 사랑은 이 대서사를 위한 포기와 유예이다. 준석이 포기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꿈이고,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만들고 즐기던 오늘의
삶이다. 그녀와의 사랑을 완성해나가기 위해 현재를 미래로 끝도 없이 유예해야 한다. 그러나 준석은 이 서사를 그려내면 그려낼수록 더욱 불안해진다.
이 서사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기획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이상 이 서사가 자신들의 의지많으로는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스스로 기획하는 서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통제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준석의 사랑은 투쟁이다. 세상은 삶을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고
기획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이 미래에도 지속되도록 하려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통장은 삶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확실한 것들을 통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이며 통제를 현실화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과연 한 달에 몇 만원씩 모으는 이 통장으로 준석과 여자친구는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을까? 자신들의 의지많으로 이 불확실한 세상과 싸워 예측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준석도 자신이 없다. 준석은 되묻고는 한다. 삶이 통제되지 않는데 왜 이런 헛수고를 해야 하는가? 내가 내 삶을 통제한다고 해서 내 기획대로 되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미래를 위해 유예되어서는 안된다. 유예를 한다고 해서 보장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수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삶은 어차피 불확실하며 우연에 맡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우리가 이야기하는 '서사적 사랑'이란 불가능하다. 세상은 서사에 목을 매는 이들을 비웃는다. 그저 사랑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사랑은 더 이상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산하는 에너지가 아니다. 그것은 실컷 즐기다가 낡으면 버리는 청바지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사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이 지속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 것이다.
-p150~152
그래서 이들은 사랑의 등가교환을 선호한다. 사랑에도 주판알을 튕길 만큼 계산적인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 반대다. 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랑이 손해를 감수하고 일방적으로 퍼줌으로써 사랑을 확인하였다면, 지금은 등가교환을 통하여 서로의 곤궁함을 배려한다. 등가교환이야말로 동등성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p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