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의 군생활
09군번의 청년입니다. 9사단 통신병으로 군 다녀왔습니다.
2년 조금 안 되는 기간의 제 군생활은
부대 조경활동 70%(산의 나무 가지치기, 나무심기, 나무뽑기, 예초, 진지공사, 호수공사(만듬), 호수공사(없앰), 체육관 건설, 도서관 건설)
훈련 20%(혹한기, KCTC, 대대별 훈련, 유격, 호국훈련)
불침번 + 당직 10% (부조리로 인한 3개월가량 불침번(2시간?)-무전(2시간)-교환(2시간) 근무 + 상병 말부터 야간당직. 꿀잠 개이득.)
정도로 이뤄져있네요. 훈련이 많은 전방 부대여서, 훈련 경험이 평균에 비해 조금 많다거나. 훈련하면서 천안함/연평도를 겪어 유서를 2번 썻다는 게 특이점이지만. 남들에 비해 어려운 군생활은 아니었습니다. 같은 막사를 쓰는 수색중대에 비하면 아주 편했죠. 만약 제가 수색중대에 갔으면 자살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군대는 안 가는 게 무조건 좋다"
일단 저는 군대는 안 갈 수만 있다면 안 가는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저 스스로는 군대에서 배운 게 조금 있습니다. 부족하나마 사회성을 길렀고, 체력도 조금은 길렀으며, 다이어트(1년 뒤 원상복귀했지만)도 했고. 뭣보다 평범하게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는 경험을 얻었습니다.(미친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도 배웠고요.)
하지만 '군대 가면 배우는 거 많다'는 논리는, '사기 당해도 배울 게 있다'는 거랑 같은 맥락이라 봅니다.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 둘 다 있다지만, 부정적 요소가 너무 크다는 거죠.
- 군대 가는 남성은 차별받는 거고, 안 가는 여성은 혜택받는 것
저는 남성에게만 군 복무의 의무가 주어지는 것을 '차별'이라고 보고,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여성들은 그만큼의 '혜택'을 본다고 생각해온 사람입니다.
물론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은 것, 여성의 안전을 보장하고 평등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적극 공감합니다. 하지만 여성이 겪는 어려움과 남성의 군 복무 문제는 서로 별개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군 복무라는 건 '국가에서 강제하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여성이 겪는 어려움 중 '국가에서 강제하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 있나요? 곰곰히 생각해봐도 없네요.
- 여성이 겪는 어려움 많은 것 사실
하지만 여성이 겪는 어려움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일반화시킬 순 없지만, 폭력을 가하는 또라이들의 주된 대상은 여성입니다. '여성이라서'라기 보다는 '힘이 약해서'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게 물리적 힘이건, 권력적 힘이건, 한국 사회는 여성에 비해 남성의 힘이 강한 게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는 가부장적, 마초적 의식이 희미해졌지만. 기업이나 기관의 '높으신 양반'들은 아직도 "여자가 주는 술이 맛있다"며 술 따르기를 강제하거나, 성희롱·성추행을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꼭 여성 신입에게 커피를 타오라고 하는 꼰대들도 아직 있고요.
이런 꼰대들이 사회 고위층에 포진되어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 중 하나가 여성의 유리천장이라고 봅니다. 힘 있는 남성 꼰대들이 사회 기득권을 쥐고 있다 보니까 여성이 고위층으로 오르기 힘들고. 여성이 고위층이 되기 어렵다 보니 여성을 위한 정책(유리천장, 경력단절 등)도 어렵고. 악순환이죠.
물론 힘이 약한 남성은 '약자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들로 인해 오히려 역차별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서로가 겪는 어려움을 인정하고, 함께 해결해야
남성의 군대 문제를 꺼내면 출산 이야기가 나오는데. 출산은 의무가 아니라는 것으로 논파되곤 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군대 문제에 출산이나 경력단절, 유리천장 따위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라는 논리입니다.
만약 이 논리를 사용한다면, 남성의 군대 문제와 여성이 겪는 어려움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여성이 경력단절, 유리천장 등의 문제로 힘들다고 하면. 남성은 "남자는 군대가잖아" 따위의 논리를 대는 거죠.
이 문제는 어느쪽도 이길 수 없는, 서로 지는 싸움입니다.
서로가 겪는 어려움이 있으니까요. 어느 한쪽만 해결하자고 하면, 당연히 어려움(차별)을 겪는 반대쪽 사람들은 '우리도 힘든데 왜 그쪽만 도와주냐'고 하기 마련이니까요.
남성의 군 복무 등으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여성이 겪는 어려움에도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하다 봅니다.
여성의 유리천장, 경력단절 등으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려면, 남성이 겪는 어려움에도 공감하고 함께 해결하자고 하는 게 바람직하다 봅니다.
- 여성 징병? 가능할까?
여성의 징병이 가능할까요? 저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차라리 통일이 빠를 거 같아요.
체력적 여건, 이런 문제도 있겠지만. 내무반은 어떻게 나눌 것이며, 훈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여군 부대를 따로 만들 것인가. 여성용 장비를 따로 만들어야 하나. 등등.
군대라는 조직은 이미 남성(사실 군대가 남성에 맞춰졌다기 보다는, 남성이 군대에 맞춰졌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위주의 공간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런 곳에 여성 징병이 가능할까요? 여성 간부 한둘 와도 난리나는데.
그러므로 '여자도 군대가라'는 말에는 회의적입니다.
- 군대 문제의 해결법, 공익 제도 (최근에는 공익근무요원 -> 사회복무요원으로 바뀌었더군요.)
그렇다고 답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군 복무를 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의무를 부가하기 위한 '공익'이라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 '공익'이라는 제도를 무척 안 좋게 봅니다. 공익으로 가는 사람들도 저마다의 어려움이 있고, 사정이 있어서 갔겠지만. 현역 입대보다는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서요.(주관적 생각)
이런 주관적 의견과는 별개로,
여성의 징병이 어렵다면, 신체급수 낮게 나온 남성과 같이 공익에서 의무를 수행하면 됩니다.
공익은 무척 포괄적 영역을 담당하고. 그 범위를 넓히기도 쉽습니다. 실버타운이나 고아원, 어린이집 등. 우리 사회에선 일손은 늘상 모자란 영역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영역으로의 복지를 공익 제도의 확장으로 지원하도록 하면. 여성도 남성과 동등하게 '의무'를 수행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복지 수준도 한참 향상될 거라고 기대합니다.
이런 안은 예전부터 나왔습니다. 종종 '복지 예산이 많이 들어서 어렵다'고 하는데. 진짜 헛소립니다.
군대 문제의 핵심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주기적으로 부잣집 동네 놀이터 철봉 밑을 뒤지는 것보다도 적은 월급입니다.
공익도 군인과 동일한 수준의 월급을 받는 걸로 아는데요. 그정도의 인력을, 그정도의 급여로 운용하게 되는 데 예산이 부족할리가 없죠. 50만 명가량을 최저임금 1/4 수준으로 써서 본전치기도 못 한다니. 만약 예산이 부족하다면, 운용안이 박근혜 수준이라 그런 겁니다.
-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꿈꿔야
메갈 이후로 여성분들 무슨 말 하나 꺼내기도 힘든 사회가 됐습니다. 저도 일베 때 무슨 말만 하면 '일베 아니냐' 따위의 말을 들어서 그 심정을 조금은 알고 있는데요.
결국 중요한 건. 서로가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우선 이걸 인정하면, 건설적인 방향으로 논의/토론/대화가 될 거라 생각합니다.
두서없는 잡글 마치겠습니다. 루팡월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