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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질의 및 탄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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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나막
추천 : 4
조회수 : 43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04/06/18 10:38:02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질의 및 탄원서

발신: 재외 유학생 및 연구자 196인 (명단 별첨)
주소:
http://myhome.naver.com/prometh89, [email protected]
일자: 2004년 6월
사건번호: 2004노827
수신: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967번지 서울고등법원 제6형사부
참조: 송두율 교수 석방과 학문·사상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

아래에 서명한 재외 유학생 및 연구자 196인은,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사건과 관련한 우리의 입장과 의견을 밝히고자 이 글을 보냅니다. 우리는, 2004 년 3월 30일 송두율 교수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7년형을 선고한 법원 1심 판결의 문제점들을 지적하면서, 2심 재판부에 송 교수의 무죄석방을 탄원하는 바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주지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기본원리 중의 하나임에 모두들 동의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헌법과 헌법의 정신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핵심은 자신 혹은 다중(多衆)의 생각과 다른 의견들에 대한 관용이며, 이러한 학문적 관용의 토양 위에서만 학문활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셋째, 서명인들이 모두 송두율 교수의 학문적 의견에 반드시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두율 교수의 학술 활동과 관련된 자유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넷째, 송 교수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 판결은 학문과 연구의 자유, 나아가 한국의 학술 발전 자체에 이미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고 우리 재외 유학생 및 연구자들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송두율 교수에게 징역 7년형을 선고한 판결문을 읽으면서 우리는 1심 재판부가 국가보안법의 법조문에조차 충실하지도 못하고, 헌법적 가치인 학문의 자유를 협애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학술 연구의 내용에 대한 사법당국의 평가와 단죄를 시도함으로써 실질적인 학문 검열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점을 이 글에서 지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2심 재판부의 현명한 판결만이 우리의 우려와 의문점들을 말끔하게 씻어주고, 더 나아가 이미 훼손된 학문의 자유를 복원시켜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우려와 의문점들을 이제 하나하나 순서대로 짚어 나가겠습니다. 1. 행위에 대한 처벌인가 사상에 대한 처벌인가 법이 지배하는 대상은 오직 인간의 행위라는 가장 기본적인 공리(公理)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백 여 쪽 분량의 1심 판결문이 기본적으로 송두율 교수의 학술 활동 및 저서의 내용, 즉 그의 생각과 사상에 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법원의 판결은 그가 저술을 발간한 행위라든지 생각을 유포한 행위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 사실은 송두율 교수에게 <국가보안법 제7조 찬양 고무 등>의 죄목을 적용하지 않은 사법당국도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판결문에서 겉으로 드러난 송 교수의 위법 사항은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리고 1심 재판부가 네 가지로 열거한 그의 범법 사항은 다음의 두 가지로 다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송 교수는 사실상 북한 노동당 간부로서 지도적 활동을 해 왔다는 것이고 (<국가보안법 제 3조 반국가단체의 구성>과 <사기미수>), 둘째, 북한을 여행하였고 북한인들과 만난 후 통신하였다는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제6조 잠입 탈출>과 <동법 제8조 회합 통신 등>). 송 교수의 이 범법 행위들을 입증하기 위한 1심 판결문이 하나같이 일관되게 송 교수의 저술 내용에 토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법원이 이야기하는 송두율 교수의 첫번째 위법사항은, 그가 1)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이며 (판결문 2-다), 2) 저술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에서 북한 노동당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했다는 것입니다 (판결문 2-라). 이미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도 증거불충분 판정을 받았고, 나아가 증거능력이 부족한 전문진술(傳聞陳述: hearsay)에 토대하였으므로,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1)을 입증하는데 실패했다고 보여지지만, 이곳에서 그 사실관계를 시비(是非)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1) 그 자체로도 충분히 국가보안법의 해당 조항 위반이 되고도 남는데, 2)를 부가한 재판부의 선택에 우리는 의문을 표시하고자 합니다. 그가 김철수이기 때문에 국가보안법을 위반했고, 또한 동시에 그가 김철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저술활동들은 그가 북한 노동당 요인임을 보여주므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1심 재판부가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국가보안법을 제대로 적용하려면, 송두율 교수가 "김철수"임이 입증되었으므로 그는 반국가단체구성의 죄를 지었고 (동법 3조), 그의 저술활동은 그 자체로서 반국가단체를 찬양, 고무, 선전하였으므로 (동법 7조) 독립적인 죄가 된다고 판결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송 교수의 글들을 출간, 배포한 국내 유수 언론, 출판사들에게 동일하게 동법 7조를 적용해야 할 것에 대한 검찰과 1심 재판부의 우려를 짐작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법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blind)는 법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혹시나, 송두율 교수에게 국가보안법 7조 찬양 고무 등의 죄가 적용되지 않은 다른 연유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우리는 또한 송 교수가 노동당 요인으로서 활동했다는 법원의 2)항 해당부분 판시(判示)가 송 교수의 저술내용들로만 가득차 있다는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송 교수는 그의 저술에서 북한 노동당과 동일한 주장을 폈고, 따라서 "기타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어느 곳을 살펴보더라도 송두율 교수가 학술활동 이외의 북한 노동당의 요인으로서 암약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끝없이 열거되는 그의 많은 저술과 글을 재판부가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즉 송두율 교수가 적극적인 학술활동을 벌인 학자가 아니었다면, 법원은 그가 김철수라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노동당 요인임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모순에 우리는 경악합니다. 우리는 또한 둘째로, 송두율 교수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6조와 8조가 공히 "국가의 존위 ·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조건을 적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법적용에 의해 침해받는 법이익이 사상과 학술의 자유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국가보안법이 요구하는 적용 요건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1심 판결문에 적시된 송 교수의 "잠입, 탈출과 회합통신"의 행위가 우리의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나라의 존위와 안전, 나아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 행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송 교수가 그 모든 가치들을 위태롭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행한 행위가 아닌 점을 지적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판결문의 해당항목들에서 적시된 학술좌담회 개최, 주체철학 강의 청강, 편지발송 및 경비수령 등 행위들이, 장소가 북한이고 접촉의 대상이 북한 노동당이며, 토론내용의 대부분이 주체철학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통상적 학술활동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국내외 학술회의에 빈번하게 참석하는 우리로서는 과연 학술회의의 장소, 주최자, 그리고 그곳에서 토론된 내용 중 어느 것이 주요하게 처벌의 기준이 되는지를 일단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가보안법상 그 기준이 모호하여 처벌의 기준이 사법당국의 판단에만 전적으로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송두율 교수가 수령(受領)했다는 $1,000불을 "공작금"으로 규정하게 하고, 또한 그 중 어느 것이 어느 대학원생이 북한 노동당보다 훨씬 "급진적인" 브라질 노동당의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받은 $2,500불을 교통 및 숙박비로 규정하게 하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만약 학술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와 그 활동의 주최자가 처벌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앞으로 대한민국의 학자들이 어떤 지역의 누가 주최하는 학술회의를 참가할 것인지를 사법기관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는 말에 다름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가능성을 경계합니다. 만약 장소와 주최자를 불문하고 학술회의에서 발표되고 토론된 내용이 국가보안법 위반의 근거가 된다면 법원은 그 판단의 명확한 기준과 함께, 법원이 학술회의의 내용을 토대로 참석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법적 근거 또한 명확하게 제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대부분은 국가보안법이 냉전시대와 권위주의 정부라는 과거가 우리라는 현재에게 남긴 유산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대다수는, 법은 역사적으로 합의되고 형성된 실체로서 나름의 의미에서 존중해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적 지혜를 되새기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그 국가보안법조차도 제대로 적용이 되지 않는 이중 삼중의 모순에 빠져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다음의 조항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국가보안법 제1조 (2)항: 이 법을 해석 적용함에 있어서는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는]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 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송두율 교수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한 1심의 판결문이 송 교수의 행위보다는 그의 학술활동의 내용, 즉 그의 사상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판결문에서 드러난 국가보안법의 적용이 모순을 드러낸다는 점을 보였습니다. 이제, 왜 1심의 판결이 직접적으로 침해한 송두율 교수의 헌법적 기본권, 혹은 국제법상 권익들에 대한 우려를 제쳐놓고, 우리는 학문의 자유를 그토록 호소해야 하는지에 대해 토론하겠습니다. 2. 학문의 자유는 권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가 이 질의서를 제출하는 이유는, 서두에서도 밝혔다시피, 우리가 송두율 교수와 학술적, 정치적 의견을 같이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송두율 교수 개인의 신체, 거주 이전, 통신,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물론 외국에서 직접 피부로 느끼는 조국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신 실추를 걱정해서도 아닙니다. 단순한 의협심이 불타올라서도 아니며, 추상적이고 허울뿐인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이 질의서를 적습니다. 우리들은 이 머나먼 이방인의 땅에서, 손쉽고 화려하고 이기적이라고 만은 할 수 없는 학문의 길을 걷고는 있지만, 이 질의서만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권익이, 혹은 "우리"들의 미래의 권익이 벌써부터 미리 침해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입니다. 그러나, 청컨대, 여기서의 "우리" 속에 우리의 부모, 형제, 친구, 이웃, 나아가 정부와 법원이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말기를 우리는 당당히 요구합니다. 인류가 동굴을 나와서 불을 지피고, 언어와 민주주의를 발견하고, 화성에 다다른 오늘이 있기까지, 그 모든 것을 "우리"가 향유하기에 앞서, 인류의 지적 활동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이 항상 선행했음을 우리는 끊임없이 상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의 발전이라는 것이 인류가 자신에게 닥친 물음과 숙제들에 대한 해답과정이었다는데 동의한다면, 학문활동이 침해되는 것으로부터 잠재적인 불이익을 받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야 비로소, 왜 대한민국의 헌법이, 표현의 자유와는 구분이 되는 별항으로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따로이 적시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이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알리고 보일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학문과 예술의 진보를 연구자와 예술가들이 노력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노력하고, 또 그 열매를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애써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자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헌법에서 학문의 자유를 규정한 바로 다음 항목이 저작·발명권과 관련된다는 사실이 또한 바로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즉, 그런 학문과 예술의 과실을 누림에 있어 그 누리는 절차를 정부에서 하위 법률로 규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부언컨대, 학문의 자유는 개인의 권리임과 동시에 사회의 권리이기도 하고, 또한 국가의 의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질의서에서 시종 걱정하는 것은 이러한 권한이 침해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주지하면서, 우리는 법원의 1심 판결문을 심한 우려의 눈으로 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결문 곳곳에서 재판부가 학문의 자유를 얼마나 협애하게 사고하고 있는지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정부의 삼부(三府) 중 하나인 법원이, 학문의 발전을 장려하고 고민해야 할 정부(즉 법원)의 의무로서 학문의 자유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한의 주체가 되는 신민(臣民)적 권리로서 학문의 자유를 사고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1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송두율 교수의 학문활동이 "…내적 정신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외부적으로 나타나는 … 대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저해할 때에는 송두율 교수의 학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고 판결합니다. 내면적으로 혼자서 생각만 하고 있으면, 법원이 학문의 자유를, 다른 여타의 자유와 아울러 아무런 제약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표현되지 않고, 따라서 외부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학문은 학문이라 부를 수조차 없다는 상식을 우리는 여기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은 각자 의견들이 서로간에 대화와 반증을 교환하면서 거듭날 토양이 마련된 후에야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법원의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 저해 여부에 대한 판단인데, 그것에 대한 우리의 토론은 다음 장으로 넘기겠습니다. 정부가 대학을 운영하고, 국비장학생을 모집하고, 학술진흥재단을 통해 학자들을 지원하며, 교육 전파(電波)를 통해 고등학생 과외까지 떠맡으려 하는 사실들이 단순히 국가가 신민(臣民)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적합니다. 정부가 세우는 교육과 연구에 관한 정책들과 국가가 학술진흥에 투자하는 경비는 언제 열매를 맺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열매의 과육을 "우리" 모두가 향유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 미래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국가로부터의 권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향한 권리로 이해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법원이 이 질의서를 "탄원(歎願)"으로 생각하지 말고, 정부 삼부(三府) 중 하나인 법원에 대해 공공복리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당연한 요구로 생각하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앞서 말한 인류의 성취 하나하나 뒤에는 항상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패배와 오류가 깔려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학문적 성취야말로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과 실패와, 더더욱 중요하게는 승자와 패자의 진지한 대화를 먹고 자라는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그리고 법원이 앞장서서 이 지난(至難)한 과정의 전제조건인 학문적 관용을 말살한다면, 그 이후에는 어떠한 정부정책이나 학술지원도 대답없는 메아리를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인류의 진보, 그리고 그것을 이끈 학문의 크나큰 전진들이 항상 시대의 상식을 거부하는 이단아들에 의해, 혹은 그 이단아들을 설득하려는 학문적 대화에 의해 이뤄져왔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바로 정확하게 그것이야말로 법원의 1심 판결에 의해 침해받는 법이익인 학문의 자유임을 우리는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부언컨대, 그것은 송두율 개인의 법이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법이익인 것입니다. 3. 학문이란 무엇인가, 그 난해한 문제 우리는 1심 재판부가 행한 다음의 두 가지 판단의 문제점만을 지적하려 합니다. 첫째, 법원은 송두율 교수의 학술활동이 실질적으로 그 효과로서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저해하였다고 판단하였고, 나아가, 둘째, 송 교수의 연구는 북한과 국외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했으므로, 학문이라 할 수조차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 중 두번째 논점부터 토론하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법원이 학문의 영역 자체를 규정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반대합니다. 학문과 비(非)학문을 구분짓는 것은 법원이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해서,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난해한 문제를 법원이 대답할 아무런 법적 근거도 책임도, 그리고 능력도 없다는 점입니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동시에 동일하게 보장하는 대한민국 헌법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문득 프랑스의 미술가인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이 1917년 뉴욕의 어느 미술관에 제출한 작품, 더 구체적으로는 "샘물"이라 작품제목을 붙인 공중변소의 남성 소변기를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당시 심사위원들은 그 "작품"이 부도덕하고 상스럽다는 이유로 전시 자체를 거부합니다. 또한, 물론 그 "작품"이 현대 미술의 개념 자체를 뒤바꿔놓은 중요한 계기가 되는데 까지는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예술가들과 미학자들의 논쟁이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송두율 교수의 학술적 연구가 뒤샹의 변기라고도, 혹은 한국의 사회과학을 일거에 전복시킬 중요한 이론이라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고 한국의 사회과학이 아직 "모르기" 때문, 즉 판단 유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사회과학과 송 교수의 연구가 진정한 학술적 대화를 이제 본격적으로 나누기 시작하는 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법원이 그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대화의 과정을 생략시켜 주었으니, 한국 사회과학자들의 수고를 덜어준 셈입니다. 마치 20세기 초 미국과 프랑스의 예술가들과 미학자들이 수행했던, 그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대화의 과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법원이 법의 잣대로 "규정"하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법원이 우리의 할 일을 대신 해 주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학문에 종사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길고, 지루하고, 험난한 논쟁의 과정 자체, 그 학문적 대화의 과정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종족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나의 의견이 과학이고 당신의 의견이 엉터리 비(非)과학인가하는 논쟁, 왜 이 곳의 논점이 갑자기 이렇게 뛰느냐,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는 우리 내부의 다툼 속에서만 학술과 비학술이, 나은 학술과 모자란 학술이 가려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와중에 어쩌다가 뒤샹이 나오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송두율이 뒤샹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 우려하는 것은, 그리고 확실한 것은, 법원의 1심 판결이 이미 미래의 뒤샹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학계가 학술적 오류나 잘못된 결론들에 대해 얼마든지 그 속에서 학문적으로 비판하고 검증하고 수정할 수 있는 역량을 지녔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학계의 역량에 대해 법원이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법원과 검찰이 법의 잣대를 가지고서 학문과 과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려고 하는 것은 한국의 인문학과 사회과학, 나아가 학문전반의 발전에 치명적인 해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상호 대화의 중단과 자기 검열의 시작이란 것은 바로 학문의 종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1심 판결의 이러한 중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2심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을 우리는 기대합니다. 4.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과 그 현실적 효과 다음으로, 우리는 첫번째 논점인, 송두율 교수의 저술이 실질적이고 정치적인 효과로서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저해했다는 1심 판결에 또한 의심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법원의 판결에 의하면 무엇보다도 송두율 교수가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이론"을 통해 "…이론적 근거가 없던 …당시 운동권 학생들 (특히 '주체사상파')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이 판결을 입증하기 위해서 최소한 법원은 1) 송 교수의 "이론"이 이전에는 없던 전혀 새로운 주장이며, 2) 또한 이것이 송 교수가 의도한 실질적 정치적 효과, 예를 들어 "운동권 학생들(특히 '주체사상파')"이 이 새로운 "이론"으로 무장하고 전혀 새로운 패턴의 반(反)정부행위 - 반향에 끝나는 것이 아닌 - 를 가져왔으며, 3) 이 새로운 패턴의 행위가 다시, 송 교수가 의도한 바에 따라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 저해를 가져왔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법원이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입증한 것을 1심 판결문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잠시, 법원, 언론, 및 북한 당국조차 오해하고 있는 "내재적 접근(immanent 혹은 internal approach)"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칸트가 이야기한 전자(前者)든, 인문, 사회, 자연과학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후자(後者)건, 이것을 송두율 교수가 처음으로 주창하지 않은 것은 명백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내재적 접근이라는 것은 다만 연구자가 연구 대상을 접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생물의 호르몬 반응이 어떻게 그 유기체를 보존하는지, 한 나라의 의회가 변화되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그 세부적 기능을 어떻게 바꿔 나가는지 등은 모두 시스템의 전체적인 컨텍스트를 살피는 내재적 접근법이 여러 학문분야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된 예라 하겠습니다. 심지어, 국가보안법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 아니라, 그 내부의 논리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각 요소들이 서로서로 충돌하는 것을 밝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내재적 접근 혹은 내재적 비판이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내재적 접근법이란 것은 전혀 새로울 것도, 놀라울 것도 없는 단순한 연구의 "태도"이며, 엄밀하게 말해서 "이론"이라 부르기 힘들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송두율 교수가 주창한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은, 다만 송 교수가 북한을 그러한 하나의 일관된 체계, 혹은 시스템으로 보고, 그곳에 가서 여러 현상들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경험적(immanent)"으로 살피겠다는 선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송두율 교수의 그 선언에 아마 새로운 점이 있었다면, 그는 대한민국 사법당국의 제지없이 그 선언을 직접적인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합니다. 학자가 자신의 연구대상(북한)을 어떻게(내재적으로) 접근하겠다는 기본적 선언이 과연 범법행위가 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1)항이 근거없음을 밝힙니다. 또한 우리는 만약 남북한 양당국의 각종 제약만 없다면, 북한에 가서 북한을 보고, 경험하고, 공부하겠다는 열망 자체는 아마 북한을 전공하는 학자라면 누구라도 꿈꿔봤을 내용임을 지적하면서, 또한 역시, 1심 재판부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운동권 학생들('주체사상파'는 아닌)"이 이미 60년대 초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란 구호를 외쳤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물론 송 교수의 주장이 정말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반향"을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왔는지에 대한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지만, 그것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패턴의 반정부 행위를 야기했는지를 입증할 부담은 항상 법원과 검찰에 있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위 2)항도 근거없음을 밝힙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위 2)항의 행위가 정말 있었고, 그 정치적 결과로서 3) 국가안보,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저해했다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서는 의심이 가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은 역시 법원이 직접 내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안전한 것이 무엇인지, 질서라는 것의 목적은 무엇인지, 공공이 누구를 지칭하는지가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에서 살핀대로 1) 과 2) 항이 입증되지 않았는데 3)이 논리적으로는 입증될 수 없을 것입니다. 5. 법과 학문의 대화 이상의 1심 판결을 반추하면서,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것은 앞서 밝혔다시피, 송두율 교수의 행위가 아니라, 그의 저서, 기고, 및 강연 등의 내용이 실질적인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송 교수가 북한 노동당과 동일한 주장을 하며, 대한민국의 체제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해왔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부언컨대, 1심 재판부의 판결은 송두율 교수의 사상에 대한 심판이고, 그곳에서 이야기되는 그의 행위나 행위의 의도된 결과에 대한 범법사항을 입증하는 마지막 귀결은 언제나 그의 저술에서 드러난 그의 생각과 가치로 귀결될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재판부의 입장을 판결문의 마지막으로부터 잠시 인용합니다. "피고인이 비록 북한 편향의 저술활동을 하여 왔으나 이미 우리 사회가 그로 인하여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된 마당에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보아, 현재 독일 국적으로 일정한 학문적 성과를 인정받아 온 독일 교수 신분의 피고인을 우리 사회가 포용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있고 그 견해에 일면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고도 판단되나, 이 사건 범죄사실과 피고인의 그간의 행적을 고려하여 보면 피고인에 대한 법원의 포용과 관용은 피고인이 그의 범죄사실에 대한 진지한 반성을 전제로 앞으로 진정한 의미의 객관적 입장에서의 학문활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발전과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기여하겠다는 다짐이 선행되어야 할 것인데, 피고인이 2003. 9. 21. 입국한 이래 수사기관에서부터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취한 태도는 이와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므로, 이 법원은 피고인에 대하여 상당한 형의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주문과 같이 형을 정하기로 한다…" 우리는 재판부가 1) 송두율 교수의 저술활동이 한국 사회에 더 이상 실질적인 정치적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 점, 2) 그가 만약 사상적 전향이나 "진지한 반성"을 보였더라면 그의 범법 행위는 봐 줄 수도 있는 문제였다는 점, 3)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적" 학술활동을 하라고 권고하는 점 등을 읽으며 우려를 금치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한국이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성숙"하게 된 정확한 날짜는 언제인지, 법원이 바라는 "진지한 반성"의 내용은 무엇인지, 또 "진정한 의미에서 객관적" 학술활동이라는 것은 누가 차후에 평가할 것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학자에게 학문적 대화, 논리적인 설득이 아닌 신체의 자유 구속을 이유로 학문적 생각을 바꾸라는 것 이상의 폭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위의 인용을 읽으며 절망할 따름입니다. 대한민국의 기나긴 민주화 여정에서 획득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 가치들인 신체, 거주 이전, 통신, 양심,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라는 기본권, 그에 아울러 학문의 자유, 혹은 권리. 어쩌면 이 모든 가치들의 가장 크나큰 수혜자인 우리는 그 가치들이 단순히 누리기만 하는 것들은 아니라는 교훈을 실감합니다. 비록 지구의 반대편에서지만, 우리에게 들리는 송두율 교수의 구속과 실형선고는 이곳에서 과연 우리가 왜, 무엇을 위해 연구와 공부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하고, 이런 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으며, 또한 위에서 열거한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법과 학문이, 그리고 나아가 국가와 학문이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현금의 것과는 다른 것이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법원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가장 손쉽게 각인시키는 방법은, 그리고 북한 체제에 대한 가장 뼈아픈 "내재적 비판"은, 바로 우리 체제가 여러 의견과 학문에 대해 관용할 줄 알고, 그래서 다양성이 늘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호소합니다. 그것이 백 명의 송두율을 가두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보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질의서가 법과 학문이 대화하는 새로운 방식의 첫단추였으면 하고 바라며, 법원의 책임있는 답변과 판결을 기다립니다. <끝> 첨부: 서명자 명단 ---------------------------------------------------------- 사법부가 민주주의 공화국의 국민들을 아직도 왕정의 신민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예술과 학문이란 무엇인가를 규정지으려 한다는 점, 심히 씁씁합니다. 마광수와 이현세 사건에서 느낀 씁쓸함이 21세기의 송두율 재판에서도 반복되는군요... 거기에다 법조항 자체에 대한 몰이해... '미개하다'는 말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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