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afe.daum.net/NAingyeo/OoJN/1
청춘인권선언.
부제 :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하라.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는 세속화된 종교다. 우린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에 길들여지며 충분히 개종 단계를 거쳤다. 돈의 액수만큼 꿈꾸는 자본주의는 세속적이며 종교적인 것이다. 원리는 하나다 돈을 가진 자가 우월한 지위다. 없으면 열등한 지위. 우리는 취업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함이다. 가능성과 꿈은 이미 돈의 척도에서 비롯되어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우리의 전혀 본성과 상관없다. 훈련 받는 것이다. 교육이고 학습이다. 돈은 종이 이상의 가치가 있다. 종이 그 이상의 것을 볼 때 이미 우리는 자본주의 안에 들어와 있으며 충분히 훈련받았다. 돈을 가진 자만이 늘 우위에 서고 대접받는다. 더 힘 있고 자유로워진다. 우린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실제 돈에 의해서만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은가? ‘나는잉여다.‘ 방송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다. 돈은 행복, 꿈이 아니라 잠시 자유로움을 가져다줄 뿐이라고. 거지가 자유로워 보이는가? 최소한의 자유도 없다. 우린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나라 국민에게 허용된 자유는 소비의 자유가 있는 것이다. 본인이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결국 돈이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일 뿐. 주체적이지도 자주적이지도 못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경제논리는 단순하다. 상품과 돈이다. 우리 젊은 청춘들 열심히 스펙 쌓고 취업준비에만 열정적이다. 스펙 내가 좋아서 쌓는 것인가? 아니다. 누군가가 원해서 하는 것일 뿐. 누구의 구색에 맞추기 위해? 돈을 가진 자를 위한 것일 뿐이다. 젊고 많은 청춘들이 스펙에 지쳐 시들시들해지고 있다. 푸른 성귀의 색처럼 빛나야 할 얼굴이 찌들어있다. 취업 열풍 성형에 해외연수에 자격증, 사회적 네트워크, 스펙 쌓기에 열정적인데 이는 자본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견문 넓히기 위해 여행에 학점관리도 해야 하고 유연한 사고를 위해 냉철 원칙적이면서도 동시에 교양적이기도 해야 한다. 이 사실은 본인들의 자기소개서를 들여다보면 다들 알 것이다. 본 총수 또한 그랬다. 자기소개가 아니고 인문학소설 작가로 빙의한 자신의 모습을 관찰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음을 잘 안다. 자본이 요구하니까. 문제는 고착화 되어진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이 더 많은 정직한 잉여를 양산하고 있다. 자본시장에 잠식된 우리 사회에서 스펙을 요구하는 건 자기를 계발하는 능력에 합리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턴 계약직만 하더라도 대다수는 잔심부름하고 경력관리 자체와 거리가 멀다. 더 솔직해지자면 스펙싸움이 지금 청춘, 많은 잉여들이 팽배한 시대에 자기 관리, 자기계발이라는 채찍질로 모두를 고문하고 있다.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의사도 능력도 없는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자본시장의 무능함은 단지 ‘자유’라는 이름으로 잉여스러운 자신의 무능함을 탓하라며 꾸짖고 있는 것이다.
이게 스펙의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을 왜곡시키고 지금의 자본시장이 한국사회에서 성공을 했다고 주장하는 모질한 분들은 모든 청춘들, 우리 잉여들을 자기계발의 화신으로 만들었고 못하더라도 네 탓으로 돌려버리기에 무기력해지고 순수한 ‘생잉여’들이 자꾸만 양산되어지고 있다. 게다가 “나태하다 게으르다” 라며 주눅들게 만들어 수많은 청춘들이 자연스럽게 잉여를 자청하고 자학하며 ‘생잉여’로 도태되어지고 있다. 그래서 본 총수가 안쓰러움과 자조적 슬픔이 그득한 잉여라는 자존감에 숨을 불어넣기 위해 만든 슬로건이 ‘잉여는 미래다’ 이다. 이 역설적 슬로건을 뺀 잉여는 그저 슬픈 자화상으로 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적인 강요는 없었지만 도서관 독서실을 전전긍긍하며 열심히 영어공부에 본인의 전공과 상관없는 ‘스펙쌓기’에 열중한다. 어떻게든 높은 값에 팔려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본 총수가 3월에 집필한 에세이 ‘청춘을 불러본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학은 직,간접적 경험과 지식, 사고력과 인성의 성숙함을 바탕으로 ‘철학과 사상’을 만들어가는 시기다. 반증을 위한 질문을 하겠다.
본인의 전공에 대한 진리탐구나 이치적 원리에 대해 고차원적인 사고를 해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본인은 사고력과 인성이 성숙하였는가? 본인이 원하는 지성인이 되었는가?
지식과 경험을 강요받았으니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렇게 길들여졌으니까. 어렸을 적부터 대부분 그리 강요 받아왔다. 성적이 떨어지면 부끄러웠고, 집에 가면 혼이 날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나를 꾸짖었고, 걱정하셨다. 무엇을 걱정하셨을까? 그 성적으로는 제대로 돈을 못 벌기 때문에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결국 성적은 돈이다. 본질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성적이 떨어지면 돈이 떨어진다. “좋은 대학가야 한다.” “좋은 직장 잡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대접 받는다.” 라며 억누른다. 이로써 ‘성적=돈=사람=상품’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미 대학은 돈이 될 만한 학과를 제외하고 획일화되었다고 봐야한다. 결국 취업준비를 하기 위한 양성소. 스펙 쌓는 학원 쯤 된다. 모질한 분들은 또 윽박지른다. “어리다.” “미성숙하다.” “언제 사람 될래?” 성장하지 못했다고 속물 등으로 치부해버리며 윽박만 지를 뿐 우리들이 경험할 환경과 배울 기회를 박탈시켰다.
속물이 될 수밖에 없는 체제와 환경을 만들고 유지시킨 이는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를 상품화 시켰습니까?
결국 현재 자본시장에 따른 사회구조와 체제는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입맛에 맞는 상품이 되어야 한다. 아니라 말할 수 있는가? 이렇듯 자본은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간접적인 요인들로 하여금 못하게 만든다. 이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며 우리는 자본주의시장의 맞춤형 상품이다. 이것은 명확한 현실이다. 자본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다. 얼마나 피폐한가? 지금 피폐함, 허탈감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인권은 어디 있는가? 자본에게 빌려 쓰는 것이 우리의 인권인가? 타인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 주인이고 주체라 할 수 있는가?
우린 지금 자본의 노예다.
앞서 말한 많은 경험과 인성의 성숙함을 통한 철학을 가져야 할 청춘이 무엇을 위해 사람에게 충성을 다해야하고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되어야 하냐는 말인가!? 재벌에게 고개 숙이고 강자에게 저절로 굽실거리는 이 안타까운 병든 사회의 심각성을 바로 봐야할 때가 왔다. 노예가 아니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이 자본위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 세상 이치인데 늘 아래에 있는가? 직시해야한다. 나란 존재가 지워지고 있음을. 당신은 자유롭지 못한 한낱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삼포, 사포세대라 불리는 청춘들이 왜 포기해야만 하는 숙명을 타고나야 하는지 그 씁쓸함을 단순히 한잔 술로 달래고 또 다시 길들여진 노예, 상품처럼 살아야 한다. 이제 결혼 또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사랑으로 연애를 통해 결혼까지 골인하는 우리의 인생 전반적인 감정의 결정체를 아웃소싱을 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결혼을 주선해주는 업체가 생긴 것 또한 잘못된 자본시장의 폐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을 등급을 먹인다. A급, B급 등으로 학벌, 외모, 집안, 연봉 등등을 통해 조건에 맞는 상대를 찾는데 열을 올린다. 그뿐만 아니라 연애에 있어서도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한적 있는가? 자본의 맛에 길들여지지 않았을 때 말고. 지금 떠올려보라. 그 사람이 돈이 없거나 가난하다면 시작하지도 못할 것이다. 상상만으로 끔찍할지도 모른다. 쉽게 생각하면 거지가 사람이 아무리 좋아도 돈이 없는데 좋아할 수 있는가? 다시 이야기 하면 돈이 있어야 누군가가 날 사랑한다는 말이 될 수 있다. 슬프다. 그리고 인간이 가엾게까지 느껴진다. 사랑을 받는 일이 두려워지기까지 한다. 상식적이고 이론적으로 다들 납득은 한다. 사람이 조건 없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돈보다 우위에 있어야 진짜. 사랑을 할 수 있다. 태고적 시대의 사랑 말이다. 아니라고 자만하지말자. 우린 감정에 충실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닥쳐봐야 알 것이다.
경험은 본인이 마주하는 유일한 진리기에.
이것은 한 인간의 삶이 자본으로 치환되었으며 지금 현실적인 우리의 삶의 연속이 되었다. 인간, 즉 나란 존재는 고결한 존재인데 위에 나열한 자본주의에 잠식당해왔다. 이를 통제하지 못하면 수많은 노예만 남을 뿐이다.
이처럼 인간은 존엄성 따위는 무시된 채 정해진 메커니즘에 맞추어 기계화 되거나 획일화 되어갈 뿐이다. 청춘인권선언문에 자본주의의 존폐여부를 결정하려는 듯한 발언을 한 이유는 신자유주의 자본시장에 길들여지고 세뇌당한 청춘들이 돈이 목적이고, 돈이 꿈이라 말하기에 제대로 된 본질을 바라볼 눈을 드리기 위해 이런 말씀 드린 것이다. 돈은 목적, 꿈이 아니라 잠시 자유로워지는 수단일 뿐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다. 돈이 수단가치로 편리 한건 인정하지만 인간 존엄성까지 헤쳐 당신의 생각까지 좀먹고 있다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춘들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있는 건 자본시장이다. 그리고 거대 자본시장을 쥐락펴락 흔들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구세력들이다. 수구세력들은 기존 재벌뿐만 아니라 극우 친일을 하는 이들을 통칭한다. 혹여 기존 재벌을 탄압하고 있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하겠다. 삼성은? (삼성의 지난 영업이익은 단연 1위. 수준은 2~10위 사이의 대기업의 영업이익을 넘어선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우리를 악용하기도 하며 정치를 혐오하게 만들기도 했다. 최근 12.19 대통령 불법대선 부정선거가 치러졌다.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부정선거를 통해 선출한 것이다. 이는 유권자들을 기만하고 희롱한 사태를 만든 것이다.
역시나 존엄성을 박탈하고 있는 부조리한 프레임을 유지시키고 더 나아가 독재정권의 회귀를 통해 노예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언론, 정부기관, 순수한 국민의식이 삼위일체가 되어 결국 잘못된 사회구조를 다시금 유지시키는 미장센이 되어졌다. 하지만 이를 분통해야 할 청춘들의 반응은 극단적 양극화 반응이 일어나며 무관심과 폭발의 언밸런스한 현상이 벌어졌다. 알고 있겠지만 20대의 정치참여는 지난 불법대선 투표율이 대변하듯 미미하다. 당시 시끄러웠던 정치과잉현상의 반비례를 증명하고 말았고 “역시나“ 라는 수구꼴통의 반응은 낄낄거리며 뒤에서 비웃고 있었다. 우리는 유권자이면서 이 나라의 젊은 피이자 지성인이다. 그러나 우리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주권은 누구의 것이며 우리의 존엄성은 누구의 것인가?
나치시절. 독일 시민들이 나치 정권에 맞서 연합·연대하지 못하고 ‘내면으로 도피’함으로써 전체주의가 완성되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민주주의 규칙을 무너뜨리고 제일 처음 집시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은 이를 외면했다. 연합·연대하는 대신 내적인 망명을 시작했다. 결국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개신교, 프로테스탄트 등을 차례차례 잡아들여 모든 반대세력을 제거했다. 앞으로도 더욱더 개혁의지가 있는 젊은 진보진영이 서로 자기만 잘났다고 경쟁을 하거나 혹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마치 종북주의자처럼 양심의 자유 도덕성마저 숨기고 미련한 미장센을 반복한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완전히 전체주의적 극우와 친일, 수구세력들의 손아귀에 사회 전체가 극보수적 전체주의로 물들어 버릴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성과 권리를 누리는 데 있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인간은 이성과 양심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서로를 위해 박애정신을 가지고 행동해야만 한다. 인간의 존엄성 침해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이다.
앞서 설명한 내용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건 거부해야한다. 그들의 위엄이 그대들을 무력하게 만드는가? 그 누구도 위엄을 덜 갖춘 존재로 하등하게 취급될 수는 없다. 그런 취급 자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현재 정국에서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한 행동이다. 이제는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며 논리를 발전시켜야 한다. 의지를 행동으로 끌어내기 위한 분노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호의존과 함께 연대를 해야 한다.
마르크스도 노동자계급이 착취계급을 이기려면 연대밖에 없다고 얘기했었다. 착취계급과 정치적인 입지를 동등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핵심 포인트이다. 결국 자본시장의 해결방안도 공동체를 구성하여 협동조합의 형태를 구축하는 것이다. 상호의존이 독립성과 독자성을 제한하는 부정이 아니라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며 서로에게 지나치게 관여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그런 유연한 개념이다.
우리의 존엄성을 박탈하고 노예로 취급하는 자본시장과 그것을 휘두르는 세력들에게 정당성을 요구해야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의 자존감과 존엄성의 회복을 위한 것이고 본디의 것을 찾는 것이다. 비겁한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그들과 마주서 분노의 눈빛으로 말해야만 한다.
“난 당신이 역겹다.”
함께 가자. 우리의 권리와 존엄성 다시 찾아오자.
마지막은 시를 한편 읽고 끝내겠다.
깊은 망각 속으로 떨어진 민중의 피로, 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은 그 피로를 나는 피할 수 없으며, 공포에 질린 내 영혼으로부터 떼어놓을 수도 없다. 저 멀리, 별들이 조용히 몰락해간다. 내 운명 옆에서 함께 운명을 직조 하는 이들은 많다. 삶은 그 모두를 동시에 울리게 한다. 그리고 내 몫의 운명은 이러한 삶으로 요약되지 않는다. 가느다란 불꽃이나 덧없는 시 같은. -후고 폰 호프만슈탈-
2030 청춘들에게...
팟캐스트 방송 '나는 잉여다' 진행자 : 잉총수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