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여름 내 달궈진 대지를 적시는 날이었다. 저녁 메뉴로 부침개를 부쳐 먹으려다 문득 시집간 딸아이 생각이 났다. 비만 오면 딸아이는 부침개를 부쳐달라고 졸라대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딸아이에게 부침개나 부쳐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딸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걸자마자 딸아이의 목소리는 눈물로 범벅되어 알아듣기 힘들었다. “여, 여보… 세…요.” 나는 깜짝 놀랐다.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이기에 딸아이가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까? “엄마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 말에 딸아이는 더욱 크게 울어댔다. “엄마, 엄마…. 흑흑흑.” 한참 동안 울어대던 딸아이는 겨우겨우 울음을 그쳤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아이는 어디가 아픈지 분유도 안 먹고, 화장실 변기는 고장이 났는지 물이 내려가지 않아요. 더구나 남편은 저녁에 친구를 데리고 온대요. 비 오는데 시장도 하나도 안 봤는데….” 그 말을 마친 딸아이는 다시 울어대기 시작했다. “걱정 마. 엄마가 가면서 화장실 고치는 사람 부를게. 그리고 장도 대충 봐 가지고 가마. 아이는 기저귀 한 번 봐주고. 그만 울래도.” “네….” “가면서 니가 좋아하는 부침개 부쳐 가지고 갈테니 맘 편하게 기다려. 김 서방은 언제쯤 들어온다니?” 내 말에 갑자기 딸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쯤 온다니? 몇 명이나 데리고 온대?”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딸아이는 어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기… 제 남편은 김 서방이 아니라… 박 서방인데요….” 그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박 서방이라고? 김 서방이 아니고? “거기가 5321번 아닌가요?” “여기는 5332번인데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설마 내가 딸아이의 목소리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미안해요. 나는 내 딸인 줄 알고….” 내가 사과하며 끊으려는 순간 전화기 건너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 저기 그럼 안 오실 건가요?”
나는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잘못 걸린 전화가 아닌가? “죄송해요. 저는 친정 엄마가 없어요. 잘못 걸린 전화라는 걸 알았는데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나서 차마 말씀 드릴 수가 없었어요. 우리 엄마가 살아계시면 이런 날 전화해서 도와 달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얼마나 생각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전화가 걸려왔어요. 엄마 같아서… 우리 친정 엄마 같아서…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전화기 저쪽에서는 또 울음소리가 났다. “기다려요. 내가 금방 전화하리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어 다시 전화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나 오늘 딸네 집에 다녀와야 하니까 밥 먹고 들어오세요.” “은영이네 가려고?” “아뇨.” “그럼 은영이 말고 딸이 또 있나?” 남편의 의아해하는 말투에 나는 명랑하게 대답했다.
“있어요. 오늘 생긴 딸요. 그 딸한테는 내가 너무 필요하거든요. 부침개 싸 들고 가 봐야 하니까 오늘 저녁은 혼자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