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이런 안개는 처음이구나..."
유난히도 안개가 자욱한 밤이었고 아버지께선 그런 안개를 처음 본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은지도 벌써 십수년이 훌쩍 지난 듯 하다.
당시엔 지방과 서울을 자주 오가던 시절이었고,
그 날도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늦은 시간에 지방으로 가는 길이 었다.
서울을 벗어나면서부터 시작된 안개는 점점 자욱해지더니
급기야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길을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발을 내려다 보니 발이 보이지 않는다..
지나는 차량은 한 대도 없다.
물론 구두도 보이지 않는 그런 자욱한 안개 속을 운행 할 차는 없을 것이다..
어디선가 여러명의 여자 목소리..
여러명의 여자들이 서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오는데 방향을 종 잡을 수 없었다.
"오늘 참 이상하네..어째 으시시하다.."
"그러네요..으시시하고 상당히 괴기스러운 밤이네요.."
자동차 안개등 너머로의 가시거리는 1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노란색 중앙선을 따라 아주 천천히 차를 갔다.
자주 다니는 길이라서 눈을 감고도 찾아 갈만큼 익숙하기에 다시 출발 한 것이다.
점점 짙어지는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릴 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노란 중앙선 이외에는 이정표를 비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짝 긴장되는 운전이다.
가로등이 있었던 길이라 생각했는데..가로등 불 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칠흙같은 어둠을 하얀 안개가 뒤 덮은 밤이었다..
차량의 속도는 10Km 내외였다.
가시거리가 워낙 짧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속도는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까부터 들려 오는 여자들 목소리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순간!
하얀색 옷자락과 검고 긴머리카락이라 여겨지는 물체가 눈앞을 휙~하고 지나갔다.
그 물체는 워낙 빨리 안개속으로 사라져서 정확히 분별할 순 없었지만
소복을 입은 여자가 차 앞으로 뛰어 간 것으로 여겨졌다.
"아버지, 보셨나요?"
"봤다..귀신이냐??"
"그런 것 같은데요.."
"아무래도 너하고 나하고 홀린 것 같다."
아버지도 무척 강하신 분이다.
쉽게 동요되는 분이 아니지만..아버지의 입을 통해 귀신이냐는 말씀이 나올 줄 몰랐다.
아버지도 나만큼 깜짝 놀라신 것 같았다.
남자의식이 강한 父子는 서로에게 놀란 모습을 들킬까봐 애써 의연한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조수석 옆 쪽으로 하얀 옷을 입은 긴머리의 여자 세 명이 줄지어 걸어갔다.
호호호호..하는 웃음 소리와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삼임을 흘리면서...금새 보이지 않는다..
분명히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었다.
세 명 모두 소복처럼 보이는 하얀 옷..길게 풀어헤친 검은 머리카락...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이 아니면 귀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들을 봤나! 이런 밤에 뭐하는 짓들이야!!"
아버지께선 창밖으로 호통을 치셨다.
거짓말처럼 웃음소리나 속삭임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더 공포스러웠다.
만일 사람이었다면 무어라 대꾸를 했을 것이 아닌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얼마를 더 달렸을까..
차로는 왕복2차로가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길을 잘 못 든 것 같았다.
중앙선만 따라왔을뿐인데..
도로를 중간에 두고 양쪽으로 상가가 보였다.
"여기 잠시 세우고 뭐라도 먹고 가자..배고프다.."
"네..좀 쉬었다가 가죠.."
시계를 보니 11시가 훨씬 지나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로 양쪽으로 단층의 상가였는데..각각 4개의 업소가 있었다.
길 건너편에는 비디오가게로 보이는 가게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
이쪽 편에는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문을 열고 있었고..두 가게를 건너 불이 켜진 집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쪽에서 나를 부르셨는데 가까이 가보니 식당이었다.
문은 격자처럼 만들어진 옛날 미닫이 문이었고,
유리엔 페인트로 식당메뉴가 씌여 있었다.
아주아주 오래된 식당으로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5평 남짓한 공간에 테이블이 몇개 있었고,
천정엔 30촉 백열등 하나만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백열등의 노란 불빛은 가게안을 환히 비추지 못해 컴컴했으며
테이블이나 의자는 초등학교 시절 사용했던 책상이나 걸상처럼
나왕목같은 재질의 아주 낡은 것이었다.
시간이 60년대의 과거로 흘러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김치찌개 주세요.."
아버지마저 이상하게 느껴졌다..
원래 아버지께선 식당에서 밥을 드시지 않을뿐만 아니라
김치찌개는 손님들이 먹다 남은 김치로 끓이기 때문에
절대 사먹지 말라고 하시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주문에 아무 대답도 없는 아줌마..주방 쪽에서 도마에 칼질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다.
수저를 꺼내 아버지 앞에 놓아 드렸는데..수저 역시 무척이나 옛날 것이었다.
"오늘 정말 이상한데요..여기도 귀신 나올 것 같아요..이 시간에 문을 연 식당..이게 말이 되요?"
"그냥 밥이나 먹고 가자.."
뚱뚱 해 보이는 아줌마가 찌개와 밥, 반찬등이 담긴 오봉(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테이블에 차려 주는데 난 아줌마를 슬며시 올려 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희미한 백열등불 빛에 비친 아줌마의 얼굴....
눈썹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 말 한 마디 없이 상을 차려주고는 이내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김치찌개를 보니 유난히 색깔이 빨갛다..
수저로 저으면 눈알이라도 동동 떠오를 것만 같은 핏빛 국물이었다.
아버지께선 맛있다며 드시고 계셨지만 난 먹고 싶은 생각이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내 스스로 상당히 간 큰 놈이라고 자부 하며 사는데..
그 날의 분위기, 그 식당의 분위기..아무 말 없는 눈썹 없는 아줌마..
도저히 밥을 벅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아버지 마저 이상하게 보이니...
그 자리를 벗어 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가냐? 밥 안 먹고.."
"제 것까지 드세요..전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올께요.."
식당 문을 나서서..구멍가게 앞으로 갔다.
주차하면서 구멍가게 앞의 커피자판기를 보았기에..
주머니에 잔돈이 없었다.
구멍가게 문을 열고 들어 섰다.
아주 좁은 구멍가게는 입구로부터 안쪽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양쪽에는 구멍가게 물건들이 뒤죽박죽 놓여 있었다.
3미터정도 되는 가게 길이..그끝에는 방문으로 보이는 미닫이 문이 있어서
작은 가게와 방이 붙어 있는 구조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방문 앞에서 등을 돌리고 앉아 설거지를 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웅크리고 있었다.
빨간 색 고무 다라이(대야)에서 무언가 씻고 있는 것 같은데..
무얼 씻는 지는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은 수명이 다했는지 연신 껌뻑 거렸는데..그것도 괴기스러웠다.
전체적으로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저..잔돈 좀 바꿔 주세요..커피 뽑아 먹으려구요.."
문득..아줌마가 뒤 돌아 보면..얼굴이..얼굴이 없을 것만 같았다.
눈, 코, 입이 모두 없는 하얀 얼굴 일 것만 같았다.
아줌마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방쪽을 가르켰다.
반쯤 열린 방문 쪽에서 하얀 손 하나가 나왔다.
그 손에 천원짜리를 쥐어 줬더니 이내 잔돈을 주었다.
잔돈을 받아 쥐고 난 뒷걸음질로 가게를 나왔다.
어쩐지 등을 보이면 안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판기 앞에서 잔돈을 유심히 보았다.
잔돈의 연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잔돈은 모두 70년대에 발행 된 백원짜리였다..
어떻게 70년대 잔돈만 10개란 말인가...
천원을 더 바꾸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려니 생각하고..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커피 맛이 좀 오래된 커피 맛이었으나..그냥 마셨다.
무서움 탓일까..
소변이 마려워서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노상방뇨를 하고,
입에 물고 있던 커피잔을 손에 옮겨 들었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 보았더니..
하얀 런닝셔츠가 안테나에 걸려 펄럭이고 있었는데
런닝셔츠에 녹슬은 안테나의 녹물이 묻어 피묻은 런닝셔츠처럼 보였고..
그것조차 섬뜩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골목을 나와서 종이컵을 바닥에 엎어 놓고 그 위에 계란만한 돌을 올려 놓았다.
자판기 근처에 통도 없었고, 를 버릴만한 곳도 보이지 않아
종이컵이 그냥 굴러 다니게 하기 싫어서 돌을 올려 둔 것이다.
식사를 마치신 아버지가 걸어 오셨다.
"맛있게 드셨나요?"
"어..너도 좀 먹지 그랬어.."
"계산 하실때 그 식당 아줌마 말하시던가요?"
"아니"
"얼마라고 말씀 안해요?"
"그냥 내가 메뉴판 보고 돈 맞춰서 줬어.."
"그 아줌마 눈썹이 없던데.."
"없을수도 있지.."
다시 출발했고..
2시간 정도 달리자 안개는 조금씩 잦아 들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엔 이미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그곳을 다시 지나가게 되었다.
그 곳엔!!!
내가 커피를 뽑아 먹었던 그 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은 그저 논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내 이빨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내가 계란만한 돌을 올려 둔...
그 종이컵만!!!
내가 둔 모양 그대로 그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