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유에 얼마전에 가입했는데 여기에 자작시나 소설 올리시길래요. 저도 한번 올려봅니다. 내용이 좀 야한데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미성년자 분은 보지 마시라고 해야 하나... 야설은 아닙니다만, 혹시 문제가 된다면 자삭하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분량의 습작인데 많은 지적 부탁드려 봅니다.
손 님
그날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광고주가 시안 교체를 요구해서 오늘도 야근하고 새벽에나 들어가겠거니 생각했었는데, 웬걸 그 깐깐한 사장님이 마음을 바꿨다는 게다. 얼마만의 이른 퇴근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2호선 사당역에 북적이는 퇴근인파마저 왠지 반갑게 느껴졌다. 지옥철이라지만 한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나는 지하철 안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옴싹달싹 못한 채 버둥거리다가, 아내에게 일찍 들어간다고 카톡 메세지를 보내는 것을 포기해야 했지만, 그러고 나니 차라리 집에 있을 아내를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어졌다.
집 근처에 와서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고구마 케이크와 튤립 한 다발을 사 들고는 아파트 계단을 올라갔다. 지겹게 반복되는 일상에 문득 찾아온 기분 좋은 변화... 나는 행복했다. 집 안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 * *
띠.띠.띠.띠. 아파트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을 때,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이 무방비 상태의 나를 엄습했다. 대번에 시선에 박히는 무언가의 이물감이 느껴졌다. 거실 바닥엔 흰 와이셔츠와 자주색 넥타이, 그리고 검은 양복이 아무렇게나 구겨진 채 흩어져 있었다.
‘침입자다!’
따뜻한 온기를 머금고 쌓여 있던 나의 행복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문득 찾아온 일상의 작은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숨소리를 죽였다. 안방 쪽에서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아, 아아”
탄식인지 교성인지 모를 여인의 콧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메마른 공기를 찢었다. 순간 침대 위의 격렬한 움직임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한 쌍의 남녀는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그들만의 관심사에 열중해 있는 것이다.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던 나는 거실 벽 모퉁이를 앞에 두고 그만 멈춰 섰다. 몸 속 혈관에 있는 피란 피는 전부 목덜미 위쪽을 타고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나머지 나는 간신히 벽에 등을 기대고야 설 수 있었다. 힘없이 떨궈지는 내 시선에 그때까지 양손에 부여잡고 있던 케이크 상자와 색색의 튤립이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나는 힘없이 놓아버렸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의 어딘가도 떨어져 나간 것만 같았다.
안방문은 열려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역시나 나의 아내. 그리고 내 쪽으로 등을 돌린 채 게걸스럽게 내 아내의 벌거벗은 몸을 탐하고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아내의 얼굴은 쾌락에 젖어 있었다. 아내는 입을 다물고 끅끅 거리다가 제대로 소리를 갖추어 지르기를 반복했다. 남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와 비슷한 정도의 키와 몸집의 사내란 것만 알 수 있었다. 부둥켜 안은 두 개의 몸뚱이는 서로의 둔덕과 둔덕, 계곡과 계곡을 뱀처럼 휘감으며 미끄러지고 있었다. 남자의 몸에서 배어나오는 찐득한 땀방울이 아내의 새하얀 살결 위로 후둑 떨어졌다.
지난 3년간 매일 보아왔던 아내였지만, 같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낯선 아내의 얼굴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분노가 어느덧 먹먹하게 목 아래를 짓눌렀다. 분노인지, 질투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어떻게 주체할지 몰라 나는 그냥 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 아랫도리를 쳐다보았다.
* * *
나와 아내의 사이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아내는 요리를 잘 못했지만, 그녀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나를 사랑했다. 밤늦게까지 야근이 잦은 나를 위해 힘내라는 응원의 말도 잊지 않았고, 길 건너 한의원에서 지어왔다는 보약도 따끈하게 데워 주었다. 이따금씩 그녀는 하늘하늘 레이스가 달린 속이 말갛게 비치는 시스루 속옷을 입고 나를 기다리곤 했다. 그리고는 침대 위 이불 속에 꼭꼭 숨어 있다가 내가 방으로 들어서면 장난기 어린 얼굴로 “짜잔” 하며 이불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이다. 아내는 아름다웠다. 예쁜 속옷을 입은 모습도 아름다웠지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은 언제나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한 손안에 가뿐히 담기는 작지만 보드라운 가슴, 토실한 엉덩이와 매끈하고 긴 다리. 자기가 유혹해 놓고도 내가 자기를 덮친 거라 말하며 순진한 척 빤짝이던 눈망울. 나는 아내를 정말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아내에게 미안했다. 미안하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내와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나는 아내를 기쁘게 하고 싶었고, 그녀를 완전히 정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내를 안을 때 내 몸은 너무 쉽게 빨리 타올랐다 꺼져버렸다. 나의 정성스런 손놀림에 아내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할 무렵, 나의 남성 역시 이미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랐지만 막상 그녀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은 금새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고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는 거칠었던 숨을 고르고, 습관처럼 시계를 쳐다본 후, 조용히 허리를 빼면서 겸연쩍지만 무심한 듯 당혹감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아내의 표정을 살피곤 했다. 아내는 그런 나를 향해 좋았다며 살며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하지만 나는 공허했다. 나는 아내의 찡그린 표정과 비명이 듣고 싶었다. 손에 쥐가 날 정도로 침대 시트를 부여잡으며 쾌락에 떠는 아내의 모습이 보고 싶었다.
* * *
나는 다시 침대를 바라보았다. 달뜬 표정으로 가뿐 숨을 내쉬고 있는 나의 아내. 나는 침대 위에서 아내를 짓누르고 있는 침입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금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내 눈에 띈 것은 오래전 근력 운동을 하겠다며 사두고 쳐박아 둔 6kg짜리 덤벨이었다. 나는 오른손을 뻗어 그 서늘한 묵직함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안방을 향해 걸어갔다. 한 발 한 발. 분노로 호흡이 거칠었지만 애써 숨을 골랐다. 그러나 미처 거실 바닥에 놓여져 있던 무언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말았다. 남자에게로 향하던 내 발에 갑자기 무언가 걸리더니 저만치 튕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빈 콜라 페트병이었다. 페트병은 빠르게 날아가 벽에 텅텅 소리를 내며 부딪히더니 이윽고 핑그르르 구르기 시작했다.
순간 침대 위의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틀어 튀어오르더니 허겁지겁 방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예기치 못한 소음에 그는 이미 현 상황을 재빨리 이해한 것 같았다. 찰칵 하고 문고리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우리 아파트가 2층이라는 것. 안방의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면 비교적 안전하게 밖으로 달아날 수 있으리라는 것. 나는 황급히 덤벨을 떨구고 안방을 향해 돌진했다.
‘이 새끼, 넌 잡히면 뒈졌어.’
역시 문은 잠겨 있었다. 문고리를 쥐고 세차게 흔들었지만 문이 열릴 리 없었다. 나는 헐레벌떡 거실 베란다 쪽으로 나가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안방 쪽을 바라보았다. 안방 창문은 닫힌 채 커튼이 내려져 있었다. 아직 별다른 탈출의 기미는 없었다.
‘옷을 입고 있구나. 내 옷을 입고 튀려고?’
나는 다시 안방 앞으로 돌아 왔다. 안방 열쇠를 어디다 두었는지 재빨리 생각해내려 했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문짝을 부수고라도 들어가려고 방문 앞에서 한껏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끼이익 하고 방문이 활짝 열렸다. 내 몸은 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허공을 갈랐고, 나는 침대 모서리에 쿵하고 발등을 찧었다. 뼛속까지 아린 고통이 밀려왔다.
남자는 그 틈을 타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내 츄리닝을 입고 내 캡 모자를 눌러쓴 채...
‘내 여자를 범한 자식이 내 옷마저 훔쳐 입고 달아난다.’
왜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남자를 잡아서 죽이든 살리든 해야 할 마당에 나는 일단 그 자식이 내 옷을 훔쳐 입고 달아나는 꼴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옷마저 빼앗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침대를 딛고 일어섰다. 차마 침대 위로 아내를 쳐다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나는 현관을 향해 달려 나가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몸을 날렸다.
* * *
거리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십여분 째 추격전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침입자와 나와의 거리는 좁아질 듯 하면서도 쉽사리 좁아지지 않았고, 내 숨은 이미 턱끝까지 차오른 상태였다. 나는 남자를 쫓아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단독주택이 밀집한 골목을 달렸다. 허벅지가 터질 듯 뻑뻑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달리는 것을 멈출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어느 모퉁이를 돈 후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허리를 숙여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혀끝으로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고 찌푸린 눈을 치켜뜬 채 앞을 바라봤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도망치던 남자 역시 막다른 골목 앞에 멈춰 서 있었다.
마침내 나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다. 마침내 한 걸음 앞까지 다가간 나는 우악스런 손길로 남자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디 얼굴 좀 보자,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이윽고 남자의 몸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내 눈 앞에서 나를 보고 있는 것은 분명 내 얼굴이었다.
‘설마 내가 거울을 보고 있는 건가?’
물론 그럴 리 없었다. 나는 분명히 내 앞에 선 남자의 어깨를 붙잡은 채였고, 우리는 서로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분명히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얼굴뿐만이 아니다. 키도 똑같고 체형도 같았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 너... 대체 뭐야?”
내 앞의 나는, 아니 남자는 씨익 웃었다.
“글쎄, 내가 누굴까?”
그 남자는 결코 내가 맞추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더니 곧 말을 이었다.
“나도 너의 일부야. 그치만 물론 다른 사람의 일부도 될 수 있지.”
한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주위의 기온이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넌 인간이... 아니야?”
“흐흐흐, 굳이 말하자면 인간은 아니라고 해야겠지. 그치만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언제나 인간의 일부였어. 인간들 틈에 있었고 그들이 가장 기쁠 때나 가장 슬플 때에도 함께 해 왔지. 그들의 성취를 도왔고, 또 그들의 파괴를 도왔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에 애써 분노를 싣고자 노력했다.
“내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하하핫, 그거? 알잖아? 그냥 재미 좀 본거지. 네 아내 몸은 멋져. 아주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충분히 섹시하고 특히나 살갗이 아주, 아주 보드랍다고. 크크큭. 앙증맞은 가슴을 살며시 입에 물면 어떤 느낌인지 너도 알지?”
순간 머리 속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들리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건 상관없었다. 이 자식을 당장 죽여버리고 싶다. 나는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며 오른손을 날렸다. 내 주먹은 정확히 상대의 턱을 가격했고, 눈앞의 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은 마치 마시멜로로 만든 거대한 인형을 때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분명히 사람의 얼굴인데 주먹에 전해지는 감각은 그것이 허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처참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은 곧바로 원상태로 돌아왔다.
“키킥, 소용없어. 네가 날 아무리 때려봐야 네 힘만 뺄 뿐이야. 사실 지금 이렇게 네 앞에 서 있는 것도 잠깐 너랑 놀아주는 거라고. 네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보고 무척 열 받았다는 거 알아. 그때 그대로 내가 사라졌다면 넌 아마 울화병으로 쓰러졌을 걸. 그래서 잠시나마 이렇게 너의 화를 받아주고 있는 거라니까. 말했듯이 나는 인간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거든.
이 것 앞에서 나는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자, 나는 한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는 어느새 흐느끼고 있었다.
“이봐, 이봐, 너무 맘 상해 하지 말라고. 나도 너를 일부러 괴롭게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야. 네가 오기 전에 사라지려고 했지. 네 예정된 야근이 취소됐다는 건 알았지만, 더 늦게 올 줄 알았어. 나도 가끔은 실수를 하거든.”
“넌... 내 아내를 더럽혔어... 그렇게나 착하고 순수한 여자인데...”
“허헛, 더렵혔다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도 분명히 봤잖아? 너의 아내도 즐겼다고. 희열에 담뿍 담겨 온 몸으로 외치던 거 생각 안 나?”
나는 조금 전 침대 위 아내의 표정을 상기하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것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네가 그간 너무했잖아. 그 귀여운 아내를 두고 그 정도로밖에 아껴주지 못하면 되겠어? 네 아내는 그렇게나 너를 사랑하면서 목 놓아 너를 기다리는데, 너는 바쁘다는 핑계에, 회식이다 뭐다 허구헌 날 새벽에 기어 들어오고 말이지. 게다가 어쩌다 있는 잠자리에서도 넌 혼자만 신났었지.”
나는 더 이상 그것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궜다.
“그치만 너무 네 아내를 미워하진 마. 내가 너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 네 아내도 너인 줄로 깜빡 착각했던 거라고. 음, 물론... 뭔가 예전의 너와 다른 점을 느끼긴 했겠지만 말야. 내가 워낙 그쪽 방면으로 출중하니까 말야. 흐흐... 욕망을 먹고 사는 몸에 궁극의 쾌락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말이 안 되겠지? 그런데 그렇다고는 해도 아까의 내가 너가 아니었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잖아?”
“아내는 너와 내가 함께 있던 걸 봤어.”
“아... 네가 방문으로 뛰어 들어왔을 때? 그때의 일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야. 너무 쾌락에 심취해 있었으니까. 내 말은 믿어도 좋아.”
나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더 이상 나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해는 이미 저문 데다 가로등이 없어 충분히 어두운 골목길이었지만, 그것의 얼굴을 더욱 더 어두워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더욱 어두운 커다란 그림자가 내 앞에 서 있었다. 다만 그 와중에도 희번득거리며 이글거리는 두 눈과 핏빛 입술이 선명하게 보였다.
“난 이만 가봐야겠다. 세상은 나의 손길을 너무 많이 필요로 하거든. 욕망의 달콤한 속삭임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않아. 아마 언젠가 너도 내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십 년 후일 수도, 일 년 후일 수도, 어쩌면 지금 당장일지도 모르는 거라고. 하하핫”
나는 뒤돌아선 채 흐릿하게 멀어져가는 그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달빛하나 없는 밤하늘 아래 모든 것이 이상하리만치 비현실적이었지만,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때마침 찬바람이 불어와 나는 이를 딱딱 마주칠 정도로 몸을 떨었다.
* * *
오후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회사 정문을 나서며 우산을 펼쳐든 나는 시계를 보며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내 왼손에 들린 짐을 비에 젖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나이 지긋한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뒤를 흘끗 돌아보며 물었다.
“마포구 도화동이요. ○○ 아파트에요.”
나는 택시 안에서 연신 초조하게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애인이라도 만나러 가시나 봐요? 선물 쇼핑백에 꽃다발도 있고, 짐이 많으시네요.”
뭐라도 화젯거리를 찾고 싶었던 듯한 표정의 택시 기사는 눈을 찡긋하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결혼기념일이에요. 선물은 아내 주려고요.”
“아, 그렇구나. 결혼한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5년이요.”
“하하 그렇군요. 여전히 신혼 같으신가 봐요. 꽃다발이 큼직하고 예쁘네요. 선물도 비싼 것 같은데 아내분이 좋아하시겠어요.”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물에 화려한 도시의 불빛이 번져들었다. 나는 금새 들뜬 마음이 들었다. 아내는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내와 함께 맞이하는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 나는 여전히 아내를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다.
* * *
띠.띠.띠.띠. 비밀번호를 누르고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현관 앞에는 벗어놓고 치우지 않은 내 옷이 흩어져 있었다. 청색 와이셔츠, 은색 넥타이. 정장바지. 나는 옷가지를 하나하나 주워 들어 빨래통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살며시 발걸음을 옮겼다. 예상한 대로 안방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문고리를 손에 쥐고 조심스레 돌렸다.
방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아내는 눈을 감은 채 누워서 입을 반쯤 열고 있었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무척이나 섹시해 보였다. 아내는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아내의 흰 피부며, 몸의 굴곡, 나지막히 봉곳한 젖가슴과 더 아래쪽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나는 침대를 향해 걸어가면서 타이를 풀고, 와이셔츠를 벗었다. 바지며 팬티 까지를 다 벗어 던진 후 침대 앞에 알몸으로 섰다. 침대 위에는 나신의 아내가 여신처럼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손님이 올라타 있었다. 손님은 인기척을 느끼자 뒤를 돌아봤다. 익숙한 내 얼굴을 마주 본다. 그는 나를 보고는 눈썹을 위로 살짝 올려 짐짓 놀라는 척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씨익 하고 서늘하게 미소지으며 자리를 비켜줬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위로 올라섰다.
이미 아내는 희열에 가득 차 몸을 떨고 있었다. 달콤한 향수와 함께 뒤섞인 아내의 땀내음이 코 끝에 전해졌다. 나는 양팔로 아내의 기다란 두 다리를 잡아 벌렸다. 땀에 젖어 미끌한 표면 아래로 탄력있고 부드러운 아내의 살결이 느껴졌다. 나는 이윽고 아내 속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빠르게 고조된 나의 절정은 끝이 났다. 나는 잠시 아내의 몸을 껴안고 있다가 그녀의 입술에 진한 키스를 했다. 아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행복에 겨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살짝 눈물마저 맺혀 있다. 진정으로 나를 알아봐주는 눈빛이다. 아내는 지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