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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1차 세계대전 종전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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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한솥매니아
추천 : 18
조회수 : 3741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3/11/11 18:42:10
빼빼로데이가 아닙니다.

아니라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권에는 2차 대전에 비해 1차 대전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부족한 편입니다. 아무래도 실제 전역이 되지 않았던 탓일까요? 하지만 서구에서는 2차 대전 못지 않게 큰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전쟁이며, 사실상 2차 대전의 프롤로그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과자 회사의 더러운 상술에 넘어가지 않은 현명한 오유인들을 모시고 오늘의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구체적인 전역의 전개 과정 같은 부분은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지라 생략하고, 간단하게 전쟁의 발단, 전개, 결말만을 훑어 보도록 하죠.



1. 발단─왜 일어났는가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 원인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가장 구조적인 차원에서부터 가장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차원까지 세분해서 보면 그 원인은 크게 ① 국제정치경제체제 ② 국제적 힘의 분포 변화 ③ 각국의 외교정책 ④ 발칸 문제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① 국제정치경제체제: 제 1차 세계대전을 여러 가지 어휘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그 가장 본질적이고 심층적인 성격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당시 유럽 열강은 비 유럽 지역의 식민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각종 내정간섭과 자원 수탈, 직접 점령 등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레닌은 이러한 현상을 그의 저서 <제국주의론>에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필연적 전개 형태'이자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라고 규정했습니다. 즉 독점자본을 지원하는 국가가 이미 국내시장의 분할을 마친 자본의 팽창을 위해 식민화를 시도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제국주의 분석은 후일 식민지가 많은 부분 굉장히 비효율적이고 고비용이었음을 밝히는 연구로 반박되기도 했습니다만, 국민경제 전체야 어떨지 몰라도 분명 당시 특정 산업분야만큼은 여기서 대단한 이득을 얻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식민지 팽창은 이미 1898년 파쇼다 사건(영국의 아프리카 종단정책과 프랑스 횡단정책이 충돌)에서 그 불안정함을 보이기도 했죠. 이 차원에서 볼 때 제 1차 세계대전은 이미 많은 식민지를 확보한 기존 열강(영국, 프랑스)과, 이제부터 식민지를 확보해야 하는 신생 열강(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분쟁이 됩니다.

② 국제적 힘의 분포 변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이 힘의 분포입니다. 강대국 간의 힘의 분포가 균형을 맞추고 있으면 체제가 안정화되지만, 이 균형이 깨지면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죠.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제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요인은 바로 중부 유럽의 패권국 독일의 급성장입니다. 중세의 유물인 신성 로마 제국이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되고 나서 독일은 조그만 영방들과 소국들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

Prussia in 1861.jpg

이렇게 말이죠.

그런데 프로이센(Kingdom of Prussia, 지도에서 노란색)이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 영방을 전부 통일하여, 1871년 독일 제국을 세웁니다. 문제는 이 독일이라는 나라가 유럽 대륙의 한복판에 실로 거대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는지라, 사람도 많고 부존자원도 많으며 심지어 지정학적으로도 굉장히 위협적인 위치라는 것입니다. 이러니 당장 독일의 동서에 있는 기존 강대국인 러시아와 프랑스가 바짝 긴장을 하게 되고, 항상 대륙의 균형에 신경쓰는 영국 역시 주목하게 됩니다. 국제정치학자 길핀(Gilpin)이 주창한 패권균형이론에 따르면, 국제체제는 패권국가가 압도적인 힘을 갖고 있을 때 안정적이고, 그에 도전하는 신흥패권국가가 나타날 때 전쟁을 통해 세력전이가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제 1차 세계대전 전야는 이 설명의 가장 극명한 케이스라 할 수 있죠. 심지어 폴 케네디 같은 학자는 양차 세계대전을 모두 묶어 앵글로-게르만 패권경쟁(Anglo-German Antagonism)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다행히 통일 직후엔 현명한 외교정책으로 당장의 파국을 막았지만, 이 새로운 강대국이 그에 걸맞는 권위를 요구하여 충돌을 빚게 되는 것은 결국 시간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③ 각국의 외교정책: 독일 제국의 성립 이후 사실상 유럽 정세의 주도권은 영국과 독일, 그 중에서도 독일 쪽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즉 독일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느냐에 타국들이 반응하는 것이고 그 역이 아니었다는 뜻이죠. 그런 점에서 독일 제국의 초대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혜안은 놀라웠습니다. 그는 독일 제국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전략적 목표는 무엇보다도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것임을 깨닫고,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를 삼제동맹(세 제국의 동맹)으로 묶어냅니다. 이는 국가의 안보를 우선으로 하는 고전적 현실주의의 교과서 같은 대응이었죠.
하지만 비스마르크 실각과 빌헬름 2세의 즉위에 따라, 독일은 고전적 현실주의에서 팽창주의적 외교정책으로 이행합니다. 빌헬름 2세는 전통적 육군 국가였던 독일에 부족한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위한 3B 정책(베를린-바그다드-봄베이를 잇는 선을 만들겠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히 중동 지역에 강한 이권을 갖고 있었던 러시아를 자극하였고, 결국 러시아가 삼제동맹에서 이탈하여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리하여 대륙에서의 독일 우세가 깨어진 것도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시의 '동맹'이 가지는 의미입니다. 이는 결국 상호방위조약으로, 동맹국의 힘을 얹어 전쟁억지력으로 활용한다는 현실주의적 힘의 균형 개념의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상황은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Chain_of_Friendship_cartoon.gif

아주 국지적인 분쟁이 순식간에 전 유럽을 포괄하는 대분쟁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실제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아무도 이 파국의 가능성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삼국동맹 체결로 인해 동맹국이라곤 오스트리아-헝가리밖에 남지 않았던 독일이, 고립을 두려워하며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매달리는 경향이 발생하면서 점점 심화되어 갔습니다.

④ 발칸 문제: 위의 그림에서 가장 작은 사람으로 나오는 나라, 세르비아. 아마 이 사건이 대부분 여러분들께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기억하고 계시는 것일 텝니다. 발칸 반도라 함은 아드리아 해, 지중해, 에게 해, 흑해로 둘러싸인 유럽 남동쪽의 돌출부를 말합니다. 이 지역은 과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권이었으나, 19세기 중반에 터져 나온 민족주의적 독립 운동으로 인해 신생 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조그만 신생국들 사이에서 작은 분쟁들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안정적 해양 진출로를 모색하던 러시아와 자국 식민지를 여기에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발칸 반도에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두 강대국은 자기 민족의 이권을 지지하겠다는 명분으로 각자 범(凡)게르만주의, 범슬라브주의를 주창합니다. 결국 발칸 반도는 신생국의 팽창 야망과 민족주의적 열정이 뒤섞여 순식간에 세계의 화약고가 되었고, 이미 대전 이전에 양차 발칸 전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발칸 문제가 제 1차 세계대전의 방아쇠가 되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세 가지 요소가 전부 갖춰져 있어야만 성립합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부부가 식민지를 방문하여 퍼레이드를 벌이다 암살당하는 사건─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라예보의 총성' 사건이 일어나고, 유럽은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2. 전개─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세르비아는 비록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식민지였지만, 슬라브족 거주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러시아는 이를 명분으로 삼아 세르비아 문제에 개입을 시도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맹국인 독일의 의사를 타전했고, 독일은 고립을 두려워한 나머지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백지수표를 주고 맙니다. 즉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어떤 선택을 하건 독일은 거기에 따르겠다는 것이었죠.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독일은 러시아에,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전선의 초기 전개를 이해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독일의 슐리펜 계획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삼제동맹에서 이탈하고 삼국협상이 형성되면서 독일 군부는 양면 전선의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독일이 당시 유럽 대륙 최강국이긴 했으나, 프랑스와 러시아를 동시에 상대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당시 독일 참모본부의 장성 슐리펜은 먼저 프랑스에 전력의 90%를 투입하여 서부전선을 단시간 안에 종결시키고, 동부전선에서는 전력의 10%만이 최대한 시간을 끈다는 골자의 계획을 작성합니다. 만약 동부전선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러시아 쪽으로 돌출되어 있는 영토인 동프로이센과 쾨니히스베르크까지는 내주고, 서부전선이 마무리되는 대로 재수복하면 된다는 계산이었습니다. 서류상으로는 상당히 잘 짜여진 계획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계획이 너무나도 경직적이었고, 당시 전쟁기술의 발전을 간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 계획이 영국의 참전을 상정하지 않은 전제 하에 세워져 있었는데(실제로 영국은 매우 소극적이었습니다), 서부전선에서의 공격 루트를 벨기에 방면으로 잡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프랑스의 애처로운 호소에도 외면하던 영국은 독일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는 순간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합니다. 빌헬름 2세는 벨기에 공격을 막아보고자 했지만, 이 계획 전체가 마치 시계 톱니바퀴와 같이 정교하게 맞아떨어지게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독일 장성들은 이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계획에 따르면 서부전선이 42일 안에 정리되어야 했는데, 당시 전선에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한 기관총의 존재 및 철군 시 철도 파괴라는 (지금 보면 당연해 보이는) 전술적 아이디어의 발전으로 인해 이처럼 빠른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빠른 결전이 불가능하다는 문제는 독일의 발목만 잡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부전선의 또다른 당사자인 프랑스 역시 이 문제에 골머리를 썩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육군은 나폴레옹 전쟁의 전훈을 기초로 전략/전술의 체계를 잡고 있었는데, 이는 결국 간단히 정리해서 포병의 강력한 화력 지원에 이은 보병의 돌격, 그리고 기병의 측면타격입니다. 문제는 보병이고 기병이고 달려나가려고만 하면 자비심 없는 기관총 사격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는 엘랑 비탈(elan vital)이라는 특유의 정신론적 교리에 빠져, 보병의 착검돌격이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고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려 전투를 승리로 인도하는 결정적 국면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이러한 19세기 프랑스 육군 교리를 가장 충실하게 카피한 것이 바로 구 일본군입니다). 결국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내면서도 독일의 공격을 전혀 무력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류는 실로 그 역사상 전무후무한, 미증유의 사태를 경험하게 됩니다. 목숨의 위협 앞에도 깃발을 높이 들고 당당하게 돌진하는 영광스러운 전사는, 쥐와 오수로 가득한 더러운 참호 속에서 그저 죽기 싫어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있는 겁먹은 병사로 바뀌었습니다. 단 3km의 전진을 위해 연일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으며, 심지어 그조차 지속되지 못하고 계속 오락가락 했습니다. 전선에서의 끝없는 사상자를 채우기 위해 국민의 일부가 아닌 국민 전체가 전쟁 기간 동안 계속해서 징집되고 전선으로 이송되었습니다. 남자들의 빈 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고, 전국의 모든 공장들이 군수 물자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본주의가 백여 년 동안 쌓아올린 거대한 생산기계가 똑같은 규모의 거대한 전쟁기계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참호전, 소모전, 총력전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고, 박격포, 전투기, 독가스, 전차 등의 참호를 돌파하기 위한 신무기가 개발됩니다.

반면 동부전선에서는 이렇게까지 참혹한 참호전 양상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일단 그러기에 러시아 전역은 너무 넓었죠. 오히려 이 전선에서 드러나게 된 것은 바로, 그 동안 동쪽의 거대한 공포이자 영원한 열강으로 여겨지던 러시아 제국의 비참한 실정이었습니다. 러시아 군부는 그 많은 러시아의 인력을 끌어다 쓰면서도 독일의 전력에 타격을 줄 방도를 찾지 못했고, 전쟁을 통해 만들어진 자본주의적 전쟁기계의 성능으로 볼 때 러시아의 생산능력과 효율은 실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농촌 지역에서 징집되었기 때문에 농민이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러시아 경제는 금방 붕괴되기 시작했고, 기근이 도시를 휩쓸었습니다. 일선의 장교들 역시 무능하여 허구헌날 병사들을 구타하기만 하면서 정작 전투에서는 자살적인 돌격 명령이나 내리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제국 정부는 이러한 총체적 붕괴에 직면하여 어떠한 해결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당초 예측과는 정반대로, 서부전선에 발이 묶여있는 상태에서 동부전선에서는 진격을 거듭했습니다. 개전 1년만에 독일군은 바르샤바를 점령했고, 차근차근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제 1차 세계대전에 관한 얘기가 인기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전쟁에 있어 영광의 순간이란 단 한 순간도, 단 한 부분도 없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에서의 독일 전차군단의 쾌속 진격이나 치열했던 영국 본토 항공전, 바르바로사 작전과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같은 얘깃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없어서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 전쟁 내내 각국은 적국의 주요 도시는 아예 구경도 하지 못한 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구멍을 파놓고 참호족에 걸려가며 총알과 인명을 낭비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1917년 3월, 개전 3년 만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불길처럼 일어난 러시아 민중들은 순식간에 러시아 제정을 끌어내렸고, 러시아는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독일은 재빨리 당시 스위스에 망명 중이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에게 특별 무장열차를 제공하고, 그를 러시아로 보냅니다. 물론 레닌 자신은 독일에게서 어떠한 사주도 받은 바 없지만, 그냥 아무 상관 없는 혁명가를 본국에 보내 줌으로써 그가 러시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 주고 싶을 정도로 절박했던 것이 당시 독일이었습니다. 혁명 러시아는 케렌스키를 임시 정부 수반으로 하였으나, 케렌스키는 민중의 요구와 달리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습니다. 아마 그는 자신을 나폴레옹 같은 존재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케렌스키에 의해 주도된 러시아군의 공세는 또다시 참패로 끝났고, 9월에 반혁명파 장군 코르닐로프에 의한 쿠데타가 일어났고 11월엔 볼셰비키가 정권을 장악합니다. 새로운 공산주의 러시아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서둘렀고, 17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어 동부전선은 마무리가 됩니다.

그러나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너무 늦은 것이었습니다. 이미 독일은 전선과 후방 모두가 동시에 붕괴하고 있었습니다. 영국군은 신병기인 탱크를 전선에 배치하였고, U-보트의 경솔한 작전수행 때문에 미국 역시 협상국의 편에서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제 2차 세계대전 때처럼 대규모 병력을 보내 지원하지는 않았지만(물론 병력을 보내기는 했죠), 군수물자와 함께 무엇보다도 식량을 대규모로 공급합니다. 독일의 경제력은 당시 한계에 달하여, 그 유능한 관료들이 칼같이 자원을 배분하여 어떻게든 쥐어짜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후방 전역에 대규모 기근이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 역시 춘궁기에 일시적으로 기근을 맞이할 뻔 했는데, 이를 막아준 것이 미국의 식량지원이었습니다. 게다가 동부전선을 해결하기 위해 보냈던 레닌이 일으킨 러시아 혁명은 이제 독일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고 사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결국 독일은 모든 것을 걸고 단 한 번의 공세를 취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에리히 루덴도르프 참모차장에 의한 1918년의 춘계 공세입니다. 3월부터 시작된 공세는 초기엔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이전까지 계속 그래왔던 것과 같이─참호를 맞대고 주저앉아 버리고 맙니다. 필사적으로 시작한 공세가 두 달여의 지리한 참호전으로 이어진 것에 더해, 8월 프랑스군과 미군의 연합작전으로 2차 마른 전투가 독일의 대패로 이어지면서, 드디어 이 끝을 모르는 전쟁에도 종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3. 결말─어떻게 끝났는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쟁의 결말을 확정지은 사건은, 허무하다고 해야 할지 인과응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병사들의 반란이었습니다.

춘계 공세가 실패하고 오히려 2차 마른 전투에서 협상국이 승리하면서, 협상국 측은 100일 공세를 시작합니다. 아미앵에 주둔 중이던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동부와 플랑드르 전역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키기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하루에 전선은 10km씩 이동합니다. 패배를 직감한 독일은 항복 의사를 보냈지만,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중지하며, 민주 정부가 아니라면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독일을 압박합니다.

결국 독일 군부는 군을 지키기 위해 국가를 희생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당시 전쟁이 진행되며 황제와 내각은 유명무실해지고 군부가 사실상의 실권을 장악한 상태였는데, 군부는 전쟁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제정을 무너뜨리고 문민 정부를 세워 이들에게 전쟁 책임을 전가할 구상을 합니다. 루덴도르프를 중심으로 한 군부 핵심 인사들은 막스 폰 바덴을 신임 수상으로 내세워 새로이 정부를 구성하는 안을 황제에게 재가받았고, 빌헬름 2세는 독일 제국의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프로이센 국왕으로 돌아간다는 안을 수락했습니다. 이에 따라 1918년 9월, 독일은 입헌군주국이 됩니다. 그러나 막스 폰 바덴을 위시한 의회 세력은 빌헬름 2세의 완전 퇴위를 계속해서 주장했고, 미국 역시 완전한 민주 정부가 아닌 군국주의 정부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했습니다.

이에 독일 군부는 미국의 협상 조건을 비난하고 다시 전투를 시작하려고 시도합니다. 그 와중에, 같은 해 10월 29일, 독일 해군이 출항 명령을 받은 날, 킬이라는 군항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미 패배가 확실시되는 상황에서도 오직 군과 귀족들을 지키기 위해 병사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행태에 분노한 수병들은 전함을 점거하고 장교들을 체포한 후 항구의 노동자들과 함께 무장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 불길은 순식간에 독일 전역으로 번져 나갔고, 전통적으로 프로이센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강하던 바이에른 지역에서는 뮌헨을 중심으로 잠시 바이에른 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역시 이에 동조했으며, 수도 베를린의 노동자들도 파업과 소요를 벌입니다. 이에 따라 빌헬름 2세는 스위스로 망명하였고, 막스 폰 바덴이 이끄는 의회는 독일이 공화국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독일 혁명입니다.

새로 만들어진 바이마르 공화국 정부는 서둘러 연합국과 평화 협상을 시작하였고,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0월 30일과 11월 3일 연이어 항복합니다. 그리고 96년 전 오늘인 11월 11일, 독일의 휴전 요구를 연합국이 받아들이면서 전쟁은 끝이 납니다.

이러한 결말의 형태는 아주 큰 불씨를 남깁니다. 그것은 '내부로부터의 중상'이라는, 이후 독일인들을 사로잡을 도시전설의 시작입니다. 전쟁의 포화가 단 한 번도 독일 영토에 도달하지 않은 채로 혁명을 통해 전쟁이 끝났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왜 패배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패전 직전까지도 군부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이 연일 승리의 소식만을 전해 왔다는 점이 이러한 인식을 강화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우익적인 독일인들 사이에서, 빨갱이들의 획책에 의해 다 이기고 있었던 전쟁을 졌다는 소문이 흘러나옵니다. 분명 독일 제국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으나, 전쟁을 이끌던 정부를 외국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전복하고 그 사주에 따라 급히 항복을 했다는 얘기였죠.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였습니다만,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독일인들에게는 꽤 효과적인 얘기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타임머신>, <우주전쟁>으로 유명한 SF 작가 조지 허버트 웰즈는 종전 후 이 전쟁을 가리켜 "다른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실제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보여준 미증유의 참혹함 속에 유럽의 반전주의는 급성장하였고, <서부전선 이상없다>와 같은 소설을 통해 확산되었습니다. 아무도 이득을 보지 못하고 상처만 남기는 전쟁을 경험한 이상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죠.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는 사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다른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을 시작한 전쟁"이 어울리겠죠. 최소한 유럽에서만큼은.

종전 이후 유럽의 정계와 학계는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 각고의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양차 대전에 대한 기존 연구를 보면 보통 제 1차 세계대전의 경우 전쟁의 원인에, 제 2차 세계대전의 경우 전쟁의 전개와 결과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2차 대전의 경우 A.J.P. 테일러의 선구적 저작이 나오기 전까진 그냥 히틀러 나쁜 놈이 원인의 전부였습니다). 이에 따라 그 원인으로 지목된 비밀외교, 강대국 간의 동맹 등이 해체되어 국제연맹을 통한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의 개념을 처음 등장시키게 되었고, 발칸 문제와 같은 국지적 분쟁을 해결할 원칙으로 민족자결주의가 선언되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국제체제의 패권국을 확정시키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독일은 엄청난 배상금 폭탄을 맞고 엄격한 군비 제한을 당하기는 했지만, 그 잠재력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유럽 한복판에 존재하는 잠재적 패권국이 그에 걸맞는 국제적 위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는 종전 이전이나 이후나 변한 게 없었고, 오히려 더 심해지기까지 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독일이 자신의 힘을 회복하면서 이는 두 번째 세계대전을 불러오게 됩니다.

미국에서는 오늘은 Veteran's day라 하여, 우리나라의 현충일처럼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날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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