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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많아요)책속의 명언31 -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박민규
게시물ID : lovestory_670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6
조회수 : 193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6/23 20:18:01

출판일 09.07.10
읽은날 14.06.23


11p.
서로의 손을 잡지 못하는 나무들이 서로의 손을 포기한 채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떨고 있었다.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하는 인간들은, 그래서 서로를 포기해선 안 된다고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12p.
다만 잠시 걸음을 멈추었고, 나는 그녀의 머리와 목도리에 쌓인 눈을 정성껏 털어주었다. 그녀의 손도 내 머리의 눈을 조심스레 털기 시작했다. 마주선 채 서로를 다독이는 눈사람처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모든 것이 갑자기, 그러나 오래전부터 예정되었던 일처럼 느껴졌다. 죽은 왕녀의 몸처럼 그녀는 차가웠고, 그렇게 잠시 우리는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
그녀의 가슴이 뛰던 소리, 그 진동을 잊을 수 없다. 내 품속에, 아니 내 몸속에 그녀의 심장이 들어와 박힌 듯 했다. 격렬했던 그 진동은 팔을 풀고, 함께 실내로 들어가 구석진 창가에 앉은 후에도 멀어져가는 메아리처럼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 어디선가 잔잔히 물이 끓는 소리, 창을 두드리던 12월의 바람과... 출입구에 매달린 풍경이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그녀의 가슴이

뛰던 소리, 가슴이 뛰던

소리. 가슴이 아플 정도로 내게 머물러 있던 그 소리가 지금도 느껴진다.

25p.
인간은 누구나 <루돌프의 코>를 가지고 있다. 아무리 놀려대고 웃어도 산타는 오지 않는다. 부끄러움에 대해

그녀는 더 이상 어떤 얘기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물끄러미 내 눈을, 아니 이마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다친 사슴의 이마를 쓸어주듯 조심스레 만져주었다. 눈을 감으세요. 그녀가 속삭였다. 시키는 대로 눈을 감자 친근한 동물의 혀 같은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것은 부드럽게 이마 위를 맴돌았고, 한 조각의 녹이나... 그런 무언가를 뜨겁게 녹이고선 서서히 멀어져갔다. 다시 장작이 타는 소리,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 기둥이나 계단의 나무가 미묘하게 뒤틀리는 소리... 나란한 호흡으로 그녀와 내가 숨 쉬는 소리... 길이길이 이 순간을 잊지 않게 해달라며 누군가를 향해 나는 기도를 올렸다. 눈을 떠요, 하고 다시 그녀가 말했다. 잠든 고양이처럼 고요해진 마음으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31p.
아니 그보다는, 들썩이던 그녀의 어깨만이 그날 그 자리에서 잠시 울었을 뿐이었다. 눈물 없는 얼굴을 들어 그녀는 나를 보았고, 나를 향해... 혹은 내 어깨 너머의 말없는 어둠을 향해 힘없이 속삭였다.

안아줘요.

주변의 나무처럼 차가운 몸을 나는 힘껏 껴안았다. 그녀를... 아니... 그 속의 그녀와, 그 속의 그녀... 또 그 속의 나이테처럼 굳어 있는 모든 그녀들을 나는 안아주고 싶었다. 몹시도 뜨거운 무언가가 밀착된 가슴을 통해 흘러가고 흘러드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 황량한 벌판의 축복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단단히, 우리를 하나의 집합으로 묶어주던 어둠과... 떨리는 현처럼 길고 긴 무곡을 연주하던 북극의 머리칼... 순은의 가루눈을 흩, 뿌려주던 나무들의 축복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서서히... 나는 그녀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가져갔다. 첫눈처럼 부드러운 무언가가

혜성처럼 강렬하게 다가오고 부딪혔다. 그, 비밀스런 어둠 속에서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분화구에 갇힌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구덩이 너머의 세상은 깊은 물속에 잠긴 듯 고요하고 고요했다. 그것은 꿈이었을까? 혹은 가혹한 세계가 우리에게 베풀어준 한순간의 환(幻)이었을가? 서서히 떨어지던 입술과... 내 뺨을 스치던 그녀의 입김과... 그녀의 눈과... 무곡의 리듬을 탄 두 개의 북처럼... 끝없이 울리던 서로의 가슴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나는 평생을 살아온 기분이었다.

39p.
그 무렵 읽은 잠언집의 한 귀퉁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있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이따금 말에서 내려 자신이 달려온 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한다.
말을 쉬게 하려는 것도, 자신이 쉬려는 것도 아니었다.
행여 자신의 영혼이 따라오지 못할까봐
걸음이 느린 영혼을 기다려주는 배려였다.
그리고 영혼이 곁에 왔다 싶으면
그제서야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61p.
미래에 대한 생각... 이를테면 진로나 그런 것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곧 귀찮아지곤 했었다. 두려운 일도 진지하게 귀찮아, 해버리면 왠지 극복했다는 느낌을 받곤 했던 나이였다. 

66p.
밥은 어떻게 해결하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친구는 거듭 소설의 치명적인 결함들을 지적했었다. 우선 섹스 씬이 없잖아. 나라면 섹스 씬이 없는 소설은 돈을 주고 사보거나 하진 않아. 정 여자가 없다면 북극곰이라도 겁탈하든가.

68p.
젊은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특별한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를 사랑해 온 인간의 망므은 오래 신은 운동화의 속처럼 닳고 해진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어떤 빨래로도 그 것을 완전히 되돌리진 못한다... 변형되고, 흔적이 남은 채로... 그저 볕을 쬐거나 습기를 피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했었다.

69p.
당신의 얼굴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눈 속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었어요
달과 별은 모두 당신이 제게 준 선물이었죠
이 어둡고 텅 빈 하늘에서, 내 사랑
처음 당신의 얼굴을 보았을 때 말이에요
당신의 얼굴을...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 로버타 플랙)

74p.
그럼 어떤 걸 써야 하지? 어떤 걸이라니, 뷰티풀 걸(Girl) 같은 걸 써야지. 빈 잔 가득 맥주를 따라주며 친구가 말했다.

그러니까 좋은 걸 쓰라는 얘기야. 인간도 소설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좋은 건... 좋은 걸까? 하고 나는 친구를 향해 되물었다. 그리고... 왜 좋은 걸까? 바보, 하고 녀석이 말했다. 그건 이유가 없어. 좋다는 건 말이야... 말하자면 소피 마르소와 같은 거야. 그냥 좋잖아. 이를테면 기억을 상실한 남자 말고도 다른 좋은 게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야. 그냥 한눈에 누가 봐도 좋은 것... 그런 게 좋은 거지. 말도 마.

84p.
그나저나 별관조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거긴 여자애들도 더 예쁘고... 하긴 오늘 특별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긴 애를 보긴 했어. 아! 누군지 알겠다, 나도 첨에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니까. 걘... 정말 너무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도록 해. 원래 백화점엔 없는 게 없으니까, 그런 것도 있겠지 생각하라구. 하여간에 잘 해봐라.

87p.
통로나 코너에 차 세우는 놈들 있지? 절대로 여기 태시면 안 됩니다, 라고 얘기하지 마. 고객님, 이 자리에 대시면 차를 빼실 때 굉장히 불편하실지 모릅니다. 대시면, 빼실 때, 불편하실지... 무조건 <시>자를 넣어주면서 제가 좋은 자리로 <특별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그런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 생각하거든. 그래도 차를 안 뺀다! 손님 이 자리는 코너가 좁아 다른 차가 긁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저쪽 <안전한> 자리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해. 자기가 손해 보는 건 죽어도 못 참는 인간들이니까. 그래도 안 뺀다! 손님 이곳은 일반고객들이 대는 곳입니다. 저쪽 <VIP> 코너로 모시겠습니다, 라고 하는 거야. 무식한 인간일수록 명예에 약한 거니까. 꽤나 드물지만 그래도 안 뺀다! 때리지 말고 날 불러, 알았지?

95p.
가게를 나와서 안 일이지만, 우리가 걸어온 방향의 반대편 - 즉 입간판의 또 다른 면엔 역시나 아크릴로 크게 <호프>가 적혀 있었고, 그 아래 적힌 작은 영문의 <HOPE>를 우리는 볼 수 있었다. 난데없는 희망이 그토록 우리의 가까이에 있던 시절이었다.

99p.
들으셨습니까?
물론입니다만, 저로선 뭐랄까... 일단 그쪽에선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전 일단... 올라가게셥니다,로 듣긴 했습니다.
그런가요? 제 귀는 분명 비음을 포착했는데. 즉, 올라갛겧셯ㅂ니다 라고.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데 여운이 있지 않았나요?
여운이라!
즉 올라갛겧셯ㅂ니다ㅎ 에 보다 근접한 것이라 저는 주장하고 싶네요.
실례일 것 같습니다만... 그렇다며 시작의 비음도 간과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여운은 보다 더 강한 톤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구요. 말하자면 ㅎ올라갛겧셯ㅂ니다흐 가...
아아...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과연 <올라가겠습니다>로 봐야 할지 어떨지.
아직은... 하지만 뭔가 간과한 것이 있진 않을까요?
저도 그런 기분입니다. 보다 밀도 있는 연구가...

헉, 내려간다는 군요. 하지만 들으셨습니까?
일단은 내ㅎ려갑니다...로 킵을 했습니다.
캅ㅁ니다 가 아니었구요?

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엘리베이터를 내려와야 했었다.

109p.
그러고 보니 고양이는 그냥 고양이일 때가 제일 고양이 같군, 하고 요한은 중얼거렸다. 아마 인간도... 그냥 무엇도 아닌 인간일 때가 제일 인간답겠지?

128p.
동떨어진 초식동물처럼, 그리고 그녀는 광장 귀퉁이의 화단 끝에서 등을 돌린 채 혼자 서 있었다.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잎들이, 곧 다가올 세월처럼 주변의 가로수에 매달려 몸을 떨고 있었다. 나는 걸었고, 그녀의 등 뒤에 이르렀으며, 뭔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저기요, 하고 그녀를 불렀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등을 돌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녀와, 그 눈동자가 떠오른다. 그리고 머뭇, 높은 가지의 잎사귀를 바라보는 트리케라톱스처럼... 나는 말했다. 저랑 친구 하지 않을래요?

131p.
괜찮아, 들어와.요한의 뒤에

그녀가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에요? 그녀가 화장실을 간 사이 내가 물었다. 널 위해 두 시간을 설득했어... 그 전에 또 한 시간, 저 친구와 함께 외근 나갈 일을 만드느라 시간을 허비했지. 이런 일이 알려지면 막사이사이상의 후보가 될지도 모르겠어. 아아... 하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람을 이렇게 당황하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당황이라... 하고 요한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당황이란 말을 들으니 마치 체조를 막 끝낸 여자에게 다가가 술 한잔 할까요? 말이라도 던진 기분인데? 당할 도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맥주를 들이켰다. 포수가 공을 빠트린 사이 홈을 밟은 3루 주자의 앳된 얼굴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고 있었다. 다 좋은데 야구 얘기는 하지 마, 하는 거 아니야. 후 연기를 뿜으며 요한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알아둬, 지금 화장실에는 거울을 보고 있는 한 여자가 있다는 걸.

135p.
괜찮아요, 물어보세요 내가 얘길 꺼내는 순간 요한이 돌아왔다. 신사 숙녀 여러분, 하고 자리에 앉은 요한은 번갈아 5초쯤 우리를 쳐다본 후 이렇게 얘기했다. 똥을 누고 왔습니다. 그런, 요한이

나는 진심으로 부러웠었다. 모든 걸 매끄럽고 쉽게, 편하게 만드는 그 능력을 나는 배우고 싶었다. 열아홉 살인 내가, 이를테면 국수를 먹기 위해 - 물을 올려놓고 밀가루를 반죽하고... 그런데 생각처럼 반죽이 잘 안 되고... 또 나도 모르게 그만 이마의 땀을 떨어트리고... 어쩌지, 사람들이 알려나... 먹어도 상관은 없을려나... 인체에 큰 해는 없겠지 하는데 - 빨리 먹자, 면 불겠어 하며 젓가락을 꽂은 컵라면을 쥐어주는 느낌이었다. 반죽한 건 어쩌죠? 버려. 그래도 아깝잖아요, 길 건너 분식점에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툭, 휴지통까지 내미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139p.
그날 선배는 그렇게 얘기했어요. 더없이 작은 목소리였지만 지극히 단호한 목소리였어요. 그땐 무척 놀랐어요. 마치 내 마음을 꿰뚫어본 듯한 말이었거든요. 뭐라고 했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 하지만 쟤는
진심(眞心)이야.

그렇게 속삭였어요. 저 사실 그때 당신을 믿지 않았거든요. 아니, 실은 믿고 싶었지만... 믿을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요.

149p.
그리고 그게 우리 엄마였지... 미납대금 400 같은 걸 적으면서도, 아들에게 쓸 말은 한 마디도 없었던 걸까? 아무튼 뭔가... 이상한 유전자임은 분명한 거야.

어쩌면... 하고 내가 말했다. 어머니께선 너무 많은 말을 쓰고 싶었기 때문에 단 한 줄도 쓰지 못하셨을 거에요. 그건... 제가 소설을 써봐서 알아요.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많을 땐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게 인간이거든요. 하청업체 따윈 아무런 애정이 없으니까... 쉽게, 아무렇게나 쓸 수 있는 거예요. 분명 그랬을 거라고... 장담해요.

157p.
사랑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익이었고, 세상의 가장... 큰 이익이었다. 천문학적 이익이란 아마도 이런 걸 뜻하는 게 아닐까, 무렵의 나는 생각했었다.

그것은 묘한 경험이었다.

작은 씨앗과 같은 것이었고, 납득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내면에 스며든 것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던 느낌... 자라던 줄기와 피어나던 색색의 꽃을 잊을 수 없다. 길을 거닐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상의 나무를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가 키워 올린 나무였고 이미 뿌리를 내리고 선 나무였다.

157p.
사랑하는 누군가가 떠났다는 말은, 누군가의 몸 전체에 -즉 손끝 발끝의 모세혈관까지 뿌리를 내린 나무 하나를, 통째로 흔들어 뽑아버렸다는 말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뿌리에 붙은 흙처럼

딸려, 떨어져나가는 마음 같은 것... 무엇보다 나무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뻥 뚫린 구멍과... 텅 빈 화분처럼 껍데기만 남아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상상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참담한 것이었다. 그런 나무를 키워본 인간만이, 인생의 천문학적 손실과 이익에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172p.
이뻐와 착해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그 페이지를, 그러나 실은 누구나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안 것도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그것이 인생이다. 어떤 인간도 돈 있어, 만으로는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수 없으며 어떤 여자도 오빠, 나 오늘 이뻐? 로 평생을 버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내가 아는 어떤 여자와도 달랐고... 나는 그런, 그녀를 만난 지극히 평범한 또래의 남자일 뿐이었다.

174p.
모든 인간에게 완벽한 미모를 준다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때는 또 방바닥에 거울을 깔아놓고 내 항문의 주름은 왜 정확한 쌍방 대칭 데칼코마니가 아닐까, 머릴 쥐어뜯는 게 인간이라구. 신이여, 당신은 왜 나에게 좌우비대칭 소음순을 주신 건가요... 당신은 왜 나에게 짝부랄을 달아준 건가요 따지고 드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지.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민주주의니 다수결이니 하면서도 왜 99%의 인간들이 1%의 인간들에게 꼼짝 못하고 살아가는지. 왜 다수가 소수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야. 그건 끝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기 때문이야.

176p.
아무리 작은 속삭임에도 에코를 부여해 주는 건물이었다. 대화를 할수록 우리는 밀착되었고, 결국 귓속말을 하다시피 저런 작품을 깎고 빚을 때 조각가의 마음은 어떤 걸까요? 그녀가 속삭였다. 귀에 닿는 여자의 입김이 그토록 간지럽고 따뜻한 것임을 안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따. 잠시 나는 어지러웠고, 계산을 하고 화랑을 나와서도 여전히 그 입김이 귓속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었다. 길을 걷다 말없이 나는 왼쪽 귀를 더듬어 보았다.

귀는

누군가의 입김이 빚어놓은 조각처럼, 어지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관이었다.

178p.
... 그리고 잠깐만요,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을 뿐이었다.

테이블 위로 겹쳐진 두 팔 위에
그녀는 얼굴을 파묻은 채 앉아 있었다.
아니, 울고 있었다.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던 내 모습과
웅크린 고양이처럼 꼼짝 않던 시간
문득 사막처럼 고요해진 주변의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새나오던 한 마디 말을
잊지 못한다. 전... 하고
그녀는 흐느끼며 말했다.

너무 못생겼어요.

마음속에서 
켄터키의 모든 닭들이
일제히 홰를 치며 하늘로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

알아요.

하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좋아요. 앞으로는 계속 더 아름다운 모습만 볼 수 있을 테니까. 봄이나... 가을의 고궁처럼 말이에요. 부탁이니까, 그렇게 나를 길들여줘요. 

179p.
다만 함께 걸어가던 골목의 어둠과... 시장의 그, 비릿한 채소 냄새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어둠에 섞여, 서로를 길들인 짐승처럼 우리는 나란히 그 길을 걸었고, 그 어둠의 어딘 가에서 나는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녀의 작은

손은

누군가의 손을 얹기 위한 조각처럼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기관이었다.

181p.
이윽고 사막의 어딘 가에 서 있던 여우가 생각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다음날 어린 왕자는 다시 그리로 갔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오는 게 좋을 거야, 여우가 말했다.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는 수많은 다른 여우들과 똑같은 여우일 뿐이었어. 하지만 내가 그를 친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우야.

192p.
성공한 인생이란 무엇일까? 적어도 변기에 앉아서 보낸 시간보다는, 사랑한 시간이 더 많은 인생이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변기에 앉은 자신의 엉덩이가 낸 소리보다는, 더 크게... 더 많이 <사랑해>를 외쳐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몇 줌의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있는 자판들을 어루만지며, 나는 다시 그녀를 생각한다. 생각해

본다.

219p.
찢어지게 가난한 인간의 방에 엠파이어스테이트나 록펠러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피식하기 마련이야. 하지만 비키니니 금발이니 미녀의 사진이 붙어 있다면 다들 그러려니 하지 않겠어? 즉 외모는 돈보다 더 절대적이야. 인간에게, 또 인간이 만든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서 말이야.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이는 그만큼 커, 왠지 알아? 아름다움이 그만큼 대단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그만큼 보잘것없기 때문이야. 보잘것없는 인간이므로 보이는 것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거야. 보잘것없는 인간일수록 보이기 위해, 보여지기 위해 세상을 사는 거라구.

236p.
고개를 숙인 채 데친 문어처럼 앉아 있던 나 자신과, 저도 여태 <숭어>로 알고 있었어요... 라며 테이블 아래로 내 손을 잡아주던 그녀가 생각난다.

265p.
그러니까 저... 정말이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선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너무나 갑자기 그곳을 떠나왔으므로,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변명 같지만 결코 당신을 따돌리거나 외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말을 해야지 해야지 하는 사이 요한 선배의 일이 터졌고... 잠시 머뭇 하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고 만 것입니다. 게다가 당신은 대학이란 곳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라졌다는...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조금은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니 생각보다 훨씬 더 당신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느새 저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286p.
어느 날 아침 알 수 있었습니다.

저의 전부가... 보이지 않는 세포 하나하나까지... 당신을 보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눈을 뜨고 바라보던 방안의 풍경과... 흐트러진 이불이며, 그런 사소한 사물들과... 베갯잎에 떨어진 몇 올의 머리카락마저도... 당신을 그리워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결국 매일 아침 당신이 보고 싶고... 당신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여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288p.
이렇게, 이런 얼굴로 태어난 여자지만 저의 마지막 얼굴은 당신으로 인해 행복한 얼굴일거에요. 그리고 끝으로... 꼭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한 번도 못한 말이고 다시는 못할 말이지만... 부디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곡차곡 이 말을 눌러쓰면서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저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계시기 바랍니다.

323p.
바르지 마, 바르면 더 웃겨.

그래서 한 번도 매니큐어를 바르지 못했을 그녀의 손톱을 떠올렸었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만날 수 있다면 평범한 색일지언정 작은 매니큐어 하나를 선물해 주고 싶었다. 별다른 말이 아니라 해도... 그리고 그저, 좋은데? 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에 이르자 갑자기 조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340p.
... 생각 끝에 결국

나도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매우 이상한 경험이었다. 꼬박 매달려 한 통의 편지를 썼을 뿐인데,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 있었다. 읽다 고치고 읽고 다시 시작하고... 읽고 포기하고 읽고 갈등하던... 하여 마침내 완성한 편지의 전문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평범한 문장으로 채워진 것이었다. 게다가 지극히 간결한 내용이었다. 말하자면 안부와

그간의 심정, 이런저런 간추린 나의 생각들과 주소를 알게된 경위... 또 그곳을 찾아가 보았으며 그냥 돌아왔다는 사실... 그리고 바라건대... 12월의 생일을 함께 보내고 싶다는 얘기... 공장 근처의 카페에 대한 얘기... 퇴근시간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일곱 시부터 정류장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얘기... 만약 이런 만남이 싫다면 나오지 않아도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 그러나 가능하다면... 그런...

얘기들이 그야말로 간결하고 평범한 문장들로 적혀 있었다. 그리고 더는, 어떤 말도 적을 수 없었다. 정성껏 봉한 편지를 품고 걸어가던 그 길을... 그 길의 끝에 서 있던 빨간 우체통의 작은 틈새를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가까스로, 마치 신체의 일부를 떼어낸 느낌으로 나는 편지를 밀어 넣었고... 툭, 그 느낌에 비해 결코 가볍다고도 무겁다고도 말할 수 없는 통 속의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가 내는 소리였고... 나는 비로소 스스로의 모든 걸 운명에 맡긴 기분이었다. 기억하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 역시 다음과 같이 짧고, 간결한 두 줄의 문장이었다. 오로지 진실인 이유로 평범할 수밖에 없는 문장들이었다.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스포주의-------------------------------------------------------

376p. 
장소는 달랐어도... 분명 저 역시 같은 분량의 시간을 지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나란히,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인간에겐 큰 축복이라고...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나란히라... 그렇군요, 라고 그녀가 속삭였다.

380p.
자칫, 나는 울 뻔했지만... 울지 않았다. 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택시를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잠시 답변을 미루었고, 곧 얼굴을 들어 괜찮아요... 걸어갈 만한 거리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럼... 하고 그녀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리고... 만나서 정말 기뻤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악수를 나누었다. 오래전 스무 살이었던 여자의 손은 서른다섯이 된 남자의 손보다는 작고, 따뜻한 것이었다. 그녀는 조금 걷다가... 말없이 손을 들어 보이는 나를 돌아보고는 잠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리고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뒷모습은 조금씩
조금씩 작아져갔고

또 조금씩
작아지다가

이상하게 더는
작아지지 않았다.

착시일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굳어진 그녀의 뒷모습은 얼어붙은 작은 눈사람처럼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떤 알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는 그녀의 뒷모습과... 또 조금씩 커지다가, 더는 그 모습이 커지지 않을 만큼 다가선 후에야... 나는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서 있다가

말없이, 그 작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주었다. 순간 뒤돌아선 그녀의 얼굴이 뜨겁게 내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를 부둥켜안은 것은 분명 나였지만, 오히려 더 큰 품으로 나를 감싸준 것은 그녀의 입김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우리... 하고 그녀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참을 울었고 또다시...

또다시 이렇게 헤어지진 말아요.

라고 속삭였다. 드문, 어깨에 내려앉은 눈을 맞으며 우리는 그렇게 꼼짝 않고 서로를 껴안았다. 기나긴 시간을 지나 다시 돌아온... 어둡고 순 내린 순은의 세계에서 무사했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다만 고요히 눈이 내리는 밤이었다.

-------------------------------------------------------------------스포!!!!!!!!!!!--------------------------------------
401p.
저 역시 눈이 쏟아지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순간이... 하룻밤 사이 인생에서 가장 끔찍하고 죄스러운 순간으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가슴 뛰며, 끝없이 달콤한 꿈을 꾸며 누워 있던 그 밤 내내... 어디선가 피를 흘렸을 당신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차마 삶이라곤 말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삶도 죽음도... 생활도 아닌 그 어떤 형태로, 저도 그후의 일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408p.
그리고 저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평범한 얼굴에 속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런 느낌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사이 제가 예버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여자들이 함께, 나이를 먹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다 함께 늙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그래서 서로가 비슷해져 간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습니다. 더 세월이 흐르고... 노인이 된다면 세상의 모든 얼굴은 비슷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네, 이렇게 저도 서서히 늙어가고 있습니다. 늙어가는 만큼...

또 그만큼, 당신과 저의 거리도 점점 좁혀져 간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그래서 이 삶이 제게는 하나의 길처럼 느껴질 따름입니다. 걸으면 걸을수록... 우리는 점점 비슷해지고, 또 결국엔 같아질 거란생각입니다.

418p.
와와 하지 마시고 예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 서로의 빛을, 서로를 위해 쓰시기 바랍니다. 지금 곁에 있는 당신의 누군가를 위해, 당신의 손길이 닿을 수 있고... 그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말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빛을 밝혀가시기 바랍니다. 결국 이 세계는 당신과 나의 <상상력>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의 상상에 따라 우리를 불편하게 해온 모든 진리는 언젠가 곧 시시한 것으로 전락할 거라 저는 믿습니다.

418p.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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