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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책속의 명언32 - 은교 / 박범신
게시물ID : lovestory_670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4
조회수 : 2445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6/24 19:39:41

출판일 10.04.06
읽은날 14.06.24

11p.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22p.
처음엔 소녀의 숨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소나무 그늘이 소녀의 턱 언저리에 걸려 있었다. 사위는 물속처럼 고요했다. 나는 곤히 잠든 소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얬다.

쇠별꽃처럼.

30p.
정말 무지한 것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주입된 생각을 자신의 생각이라고 맹신하는 자야말로 무지하다.

52p.
가령 유리를 닦을 때,

그애는 들고만 있을 뿐, 유리창 세정제를 잘 쓰지 않는다. 한사코 유리창에 입김을 화아, 불고 마른 걸레질을 꼼꼼히 한다. 뽀드득하고 유리창에서 소리가 난다. 그애는 그럼 뒤로 물러나 거리를 두고 유리창을 살핀 다음, 다시 붙어 서서 입술까지 꼭물고, 재바르게 닦는다. 어디에 있든, 나는 예민하게 들을 수 있다. 들짐승처럼. 화아, 뒤에, 뽀드득뽀드득, 이 따라붙고, 뒤로 물러나는 발짝 소리, 이리 보고 저리 보느라 좁혀진 미간, 그리고 다시 유리창에 붙으면 또 화아, 뽀드득뽀드득...... 하는. 힘주어 닦고 있을 때면 가느댕댕했던 팔에 살짝, 귀여운 알통이 생기는 것도 같다. 얼룩 하나 없이 닦였다 싶으면 그제야 활짝, 소리 없이 그애는 웃는다. 햇빛보다 환한 표정이다. "유리창 닦는 게 좋은 게로구나." 내가 물어본 일이 있다. "네, 할아부지, 거울 닦는 것도 저 좋아해요!" 그 순간의 그애는 목소리까지 덩달아 뽀송뽀송해진다.

55p.
참 좋은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 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59p.
네 등불의 갓은
너를 포도주 빛깔로 물들이고
- H. 카로사(Carossa), '집에 가는길'에서 - 

97p.
10월 어느 날, 청소를 다 끝낸 네가 내 서재로 들어왔다. "언젠가, 할아부지께서 제게 물어보셨어요." 네가 말했고, "무엇을?" 내가 반문했다. "제 가슴에 그려진 창에 대해서요. 헤나요." "아하, 어떤 남자애가 그려주었다는 그 창?" "네. 할아부지. 할아부지가 그런 걸 해보고 싶어한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이미 너라는 창이 늙은 내 가슴에 단단히 꽂혀 있다는 것을 너는 그때 이미 눈치챘던 것일까.

106p.
차로 돌아와 비로소 휴대폰을 켰다. 메시지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중에, 은교, 네가 있었다. "할아부지!" 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맑고 고즈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어디 가셨어요, 할아부지? 서재 깨끗이 치워놨구요, 오늘은 뒤꼍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 접시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려두었어요. 저는 할아부지가 책상 앞에 앉아 시 쓸 때가 젤 좋아요. 근사해요. 빨리 오셔서 시 쓰세요." 나는 녹음된 너의 목소리를 열 번쯤 들었다.

117p.
밤에 사랑의 추가
항시恒時와 전무全無 사이를 흔들 때에
너의 언어는 가슴의 달에 부딪히고
소낙비 올 듯한 너의 푸른 눈은
지상의 천국을 주었다
- P. 첼란(Celan), '밤에'에서 - 

135p.
형형색색 화려한 카페의 불빛들에게 나는 한순간 비열한 질투심을 느꼈다. 내겐 아예 청춘이 없었다. 젊을 때에도 중늙은이처럼 오로지 일만 했다. 먹고살기 위해, 학비를 벌기 위해 하루 스무 시간 일한 적도 있었고,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최루탄의 무차별적인 세례와 몽둥이찜질을 견딘 날도 부지기수였다. 유신시대엔 십 년이나 차가운 옥방에서 살기도 했다. 그렇게 헌신해 겨우 얻은 것들을 카페 안의 저들이 독점하고 있다고 나는 새삼 느꼈다. 화가 났다. 달려내려가 희희낙락하는 저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너희가 지금 누리는 달콤한 인생을 누가 주었느냐고, 어디로부터 온 것이냐고, 마음대로 너희들만 누릴 권리는...... 없다고.

그러나 미친 상상에 불과했다.

저들의 누가 늙은 애비, 늙은 시인의 과거를 알겠는가.

200p.
"연애가 주는 최대의 행복은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쥐는 것이다."

스탕달이 '연애론'에서 한 말이다.

206p.
은교는 틀림없이 다른 때처럼 뛰어나올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려고 뛰어본 적이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자를 향해 뛰고 있는 사람은 다 아름답다. 그러므로 사랑에는 하나의 법칙밖에 없다.

그것은 그리운 그를 향해 뛰는 것이다.

224p.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다는 말을 한 것은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다. 질투심이 꼭 정열의 증거는 아니라고 했다. 정말 질투심이었다면, 나의 질투심이 은교를 선생님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아니면 선생님을 은교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은 질투심인지, 그것이 아니면 재능에 있어 선생님의 그림자조차 따라갈 수 없는 고통에 따른 질투심인지, 알 수 없었다.

231p.
창에 비친 그림자는 양손을 올려 제 머리를 좌우로 감싸 쥐고 있었다. "할아부지가 왜 문도 안 열어주고 그러시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공부도 안 되고요, 영 잠이 안 와요." 그애 머리칼이 바람에 조금 날리는 듯했다. 달빛을 사선으로 받은 그림자였다.

238p.
"저는요, 그날 교문 앞에서요, 할아부지에게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날, 하루 종일, 할아부지를 만나 할아부지 차를 탈 생각만 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맛있는 저녁 사달라고 조를 참이었어요. 교문으로 뛰어나오는데, 할아부지 차가요, 벌써 출발해 저만큼 가고 있더라구요. 저도요, 무지 삐졌었어요. 화나서 그날, 집까지 걸어왔는걸요. 왜 그러셨는지, 말하기 싫으면요, 안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요, 할아부지 그렇게 가버리고, 집에도 못 오게 하고, 저도 상처받았다는 건 알아주세요."

248p.
맥베스가 되어, 배신당한 맥베스의 심정으로 피를 토하듯 속으로 외쳤다. 서지우가 내게 선물한 대사였다.

"남을 사도로 끌어들이기 위해 악마들이, 악마들이 진실을 말하는 일이 종종 있다. 조그만 진실로 끌어들였다가 심각한 결과로 배신, 배신하기 위해!"

250p.
늙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노인은 '기형'이 아니다, 라고 나는 말했다. 따라서 노인의 욕망도 범죄가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라고 또 나는 말했다. 노인은, 그냥 자연일 뿐이다. 젊은 너희가 가진 아름다움이 자연이듯이,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

라고, 소리 없이 소리쳐, 나는 말했다.

259p.
J.J.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썼다. 10세는 과자, 20세는 연인, 30세는 쾌락, 40세는 야심에 미친다고.

265p.
"내가 누워 있는 화강암이 회색으로 돌변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그리고 내가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 같고, 그러면 사람들이 나의 방문을 부수고 우르르 밀려들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 나도 모르게 말해선 안 될 것까지 모든 것을 털어놓은 것 같고, 그런가 하면 아무리 이야기를 하고 싶어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라서 끝내 한마디 말조차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말테의 수기' -

279p.
그애와 촛불이 켜진 카페에서 마주 앉아 와인으로 건배를 하면서 저녁 한때를 보내고 싶은 꿈이 그렇게 용서받을 수 없는 꿈이던가. 감미로운 발라드를 한 곡쯤 백 뮤직으로 거느리고 그애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면서, 낮에 있었던 일이며, 앞날의 희망이며, 그리운 사랑에 대해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는 꿈이 혁명보다 더 불온한 꿈이던가. 다 발라먹고 버린 탁자 위의 돼지뼈들이 늙은 나, 혹은 늙은 나의 꿈처럼 느껴졌다.

305p.
그애가 한참 만에 찾아 입고 나온 것은 반바지와 흰 면티였다. 반바지는 종아리까지 내려왔고, 라운드 면티는 허리를 넘어 엉덩이까지 다 가릴 정도였다. "킥, 보세요, 할아부지. 원피스예요." 그애가 키득키득 웃었고 나도 허헛, 웃었다. "할아부지, 우리 라면 끓여먹어요." 이제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애의 목소리가 한 뼘쯤 솟아올랐다. 내 마음속 가로등 초롱불이 일제히 켜지는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310p.
나의 욕망은 한껏 당겨져 있었다. 그런데도 내 몸은 고요했다. 그것은 고요한 욕망이었다. 한없이 빼앗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 아니라 내 것을 해체해 오로지 주고 싶은 욕망이었다. 아니 욕망이 아니라 사랑, 이라고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비로소, 욕망이 사랑을 언제나 이기는 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애를 오로지 소유하고 싶었던 욕망은 관능조차 이길 수 없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나의 사랑으로 관능과 욕망을 자유롭게,

공깃돌처럼,

갖고 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356p.
나는 가만히 문을 열고 이층을 향해 귀를 나발처럼 열었다. 은교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분명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까지 은교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도 그렇거니와, 은교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 사이사이로

씨익씨익,

하는 거친 숨소리 같은 게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도 범상하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맨발로 층계를 반 이상 올라가 서재 불빛이 보이는 자리에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 그러니까, 씨익씨익, 오목한 데, 씨익, 간지럼을 타는 데, 씨익씨익, 그거 성감대지. 여기!" 서지우의 낮은 목소리 ,거친 숨소리였다. 사위는 조용했다. 서지우가 어떻게 했는지, 키드득 하는 웃음소리 사이에 참을 수 없다는 듯, 은교가 이번엔 낮은 신음을 보태고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서 일단 얼른 방으로 돌아왔다. 씨익씨익, 이 나를 따라붙고, 키드득키드득, 이 역시 나를 쫓아 방 안까지 따라붙었다. 귓구멍을 막아봐도 헛일이었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소용없었다. 그것은 단근질이었다. 고문이었다.

369p.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 '소음'에서

385p.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누가 아침 이슬에게 경배하겠는가
고꾸라지고 베이고 허물어져도 청노루 눈빛
그 아침빛이 너를 통과해와 세계의 구석방
내 안에 꽃초롱으로 둥지를 튼다 새는 날마다
저녁으로 떠나가고 나는 아직 모른다 저기
자갈투성이 해안선 끝나는 곳에
어떤 아우성들이 또 물레를 돌리고 앉아 있는지
- 시집 '산이 움직이고 물은 머문다', '빈 들'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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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3p.
"이거, 태운 게...... 죄라면요, 처벌받을게요. 저는요, 바보같이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녀가 이윽고 화장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아부지가...... 나를요, 이렇게...... 갖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구요. 이까짓 게, 뭐라구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쳤다. "뭐예요.,..... 바보같이, 자기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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