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숫자는 해석되어야 한다. 코르헤르는 병합 지역의 전전(戰前) 유대인 인구를 79만 명으로 잡고
총독령 유대인 수는 200만 명으로 잡았는데, 이는 1931년의 폴란드 인구센서스를 그대로 대입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와 너무 유사하다. 그는 또한 1942년 12월 31일에 총독령에 생존해 있던 유대인을 297,914 명으로
집계했는데, 그 속에 포함된 바르샤바 유대인 5만 명은 너무 낮은 수치다. 그리고 “소개(疏開)” 인원
222,117과 1,274,166 속에는 게토에 일시적으로 수감되었던 비폴란드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독일, 빈, 프라하, 룩셈부르크에서 이송된 유대인 2만 명이 우지 게토에 있었고, 독일과 슬로바키아에서
이송된 유대인 수천 명도 총독령의 게토에 있었던 것이다.
코르헤르는 “소개된” 인원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제시했다: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222,117 바르테란트(우지와 그 인근)로부터 바르테가우의 수용소(헤움노)로 “통과된” 사람 145,301 비아위스토크 지구로부터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이송된 것을 뜻함) 46,591 고지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아우슈지츠와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것을 뜻함) 30,225 총독령으로부터 총독령 수용소(베우제츠, 소비부르, 1,274,000 트레블링카, 루블린)로“통과된” 사람
우리는 이 통계를 1943년과 1944년에 이송된 유대인에 대한 부분적인 자료로 보충할 수 있다.
코르헤르에 따르면 1942년 말에 87,180 명이 수감되어 있던 우지 게토가 1944년 8월에 해체되었는데,
그 때 63,000 명이 이송되었다. 이는 우지시 통계국 파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1943년에 7만 명이 남아있던 바르샤바 게토는 봉기와 진압으로 인하여 전쟁터가 되었고,
그 때 수천 명을 제외한 전원이 현장에서 죽거나 루블린과 트레블링카로 이송되었다.
갈리치아에서는 친위경찰지휘관 카츠만이 1943년 6월 30일에 유대인 21,156 명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다른 지역과 관련된 문서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코르헤르는 앞에 제시한 폴란드 유대인 통계에서 “출생자를 초과하는 추가 사망자와 이민자”라는 항목을
제시했을 뿐, “이민”과 “추가 사망자”를 각각 별도로 계산하지 않았다. 그가 병합지역과 총독령에서
사라진 그 두 개 범주의 유대인 수를 각각 334,673 명과 427,920 명으로 계산했을 때에도 두 개념을 구분하지
않았다. 또한 그 두 개의 수를 비교해보면 그 비율이 이상하다는 점이 금방 눈에 띈다. 보통의 평가처럼
2:5가 아니라 거의 4:5인 것이다. 이 명백한 상위점은 원칙적으로 독일 점령 초기에 병합된 지역의 유대인들이
총독령으로 도망갔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총독령으로 이동한 유대인의 수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략 5만 명 내지 7만 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334,673과 427,920은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그릇된 것일 수 있으나, 그 두 숫자를 합산해서 얻을 수 있는 762,593은 두 지역 전체에서 없어진
유대인 수에 근접할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만으로는 열악한 조건 때문에 생명을 상실한, 확정 불가능한
유대인 수를 파악할 수 없다. 그 지역으로부터 특히 소련 내륙으로 도망친 유대인은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숫자를 코르헤르의 “이민자” 통계에서 빼야 한다. 그들 모두가 이민자였던 것이
아니다. 그들 일부는 홀로코스트 사망자.
코르헤르는 오스트란트와 우크라이나에 포함된 폴란드 지역에 대한 통계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점령
이전 유대인 인구는 55만 명이었다.
1931년 인구센서스를 토대로 하여 유대인 인구를 행정단위별로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직할령 오스트란트 리투아니아 총감 지구 빌뉴스 지역 10만 명 이상 벨로루시 총감 지구 민스크 감독 지구 빌레이카-구에보키에 지역 2만 명 이하 바라노비체 감독 지역 10만 명 이상 제국직할령 우크라이나 볼리니아-포돌리아 총감 지구 볼리니아와 폴레시에 대부분 약 33만 명
그곳에서 소련 내륙으로 도망친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독일군이 빌뉴스에 진입했을 때 빌뉴스 지역의
유대인 거주민의 1/3 이하가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독일군이 곧바로 접수하게 되는
인근 지역까지밖에 피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친위특공대 B의 친위특무대 9가 1941년 여름에 빌뉴스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사살했고, 친위특공대 A의 친위특무대 3 역시 1941년 11월 25일까지 그 지역에서
34,622 명을 사살했던 것이다. 특무반에 따르면 그 시점에 빌뉴스 게토에 남아있던 유대인은 군수생산
때문에 학살을 모면한 1만 5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빌뉴스 인근의 소형 게토의 유대인들은 친위특공대의
작전에 의해 계속해서 감소했고, 일부는 빌뉴스 게토로 이송되었다. 1943년 여름에 빌뉴스 게토에는 유대인
2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노동자는 12,332 명이었다. 그러나 1943년 여름에 그들 중에서
수천 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소비부르로 보내져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선별되어 학살당했다.
빌레이카 지역의 유대인들은 1942년 3월에 학살 작전의 목표물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 7월 31일에 벨로루시의
총감 쿠베가 또 다른 학살 작전에 대해 보고했다. 쿠베는 또한 인근의 구에보키에와 그 주변에서 펼쳐져서
유대인 1만 명을 죽였던 독일군의 성마른 작전도 기록했다.
바라노비체 지구는 1941년과 1942년에 사살 작전으로 얼룩졌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8일까지 총 9만 5천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고 6천 명이 도주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42년 말에는 벨로루시의 고트베르크로부터 출격한
친위경찰대가 유대인 3,658 명을 사살하여 그 지구 서부 지역으로 도망친 유대인의 수를 절반으로 줄여놓았다.
볼리니아는 친위특공대 C와 총독령의 보안경찰 분견대가 1941년에 종횡으로 휩쓸었던 지역이다.
그 때 유대인 수천 명이 사망했다. 1941년 11월에는 고위 친위경찰지휘관 남부의 경찰부대가 로브노에서
유대인 1만 5천 명을 학살했고, 1942년 여름에 또 다시 강력한 학살 물결이 몰려왔다. 1942년 12월 29일,
힘러는 히틀러에게 그 해 8월부터 11월까지 우크라이나, 남러시아, 비아위스토크 지구에서 유대인 63,211 명을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그 때 사망한 유대인 대부분이 볼리니아-포돌리아 총감 지구의 볼리니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때의 작전은 우마차를 생산하는 노동자건, 직물을 생산하든 노동자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게토마다 유대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하룻밤 사이에 제거되었다. 그로 인하여
볼리니아 유대인 전체가 절멸되었다.
폴란드 유대인 전체를 살펴보면, 50만 명 이상이 게토에서, 70만 명 이상이 사살 작전에서, 170만 명 이하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소련에서 피난처를 구했다가 열약한 조건 때문에 생명을 상실한 유대인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계산하면 잘해야 근사치만 얻을 수 있을 뿐이지만, 이상의 덧셈을
단순한 뺄셈과 비교해보도록 하자.
1939년 8월 현재 유대인 인구에 대한 폴란드의 공식 통계 3,351,000 1945년에 폴란드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등록된 생존자 55,000 소련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 185,000 난민 유대인: 1946년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100,000 이상 1945년 폴란드 군복무 유대인 약 15,000 1939~44년에 팔레스타인 등지로 이민 간 유대인 15,000 이상 소련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생존자 수천 소련의 전쟁 이전 영토에 남은 피난민 수천 소련이 실행한 이송의 희생자 수천 전쟁 사망자 수천
전후의 뺄셈으로도 정확한 숫자를 얻기란 힘들지만, 이상의 계산은 생존자와 홀로코스트와 무관한 사망자가
40만 명 이하였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덧셈에서나 뺄셈에서나 폴란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는
3백만 명에 근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소련
1939년과 1940년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 지역과 발트해 지역, 루마니아 일부를 합병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독일군은 이 완충지대를 돌파하여 구소련으로 밀고 들어갔다.
점령 소련 지역에 대한 독일의 보고서에는 1939년의 소련 영토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보고서 일부에 적시된
포괄적인 유대인 사망자 통계는 그 국경의 동과 서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소련 영토에
집중하려면,
특정 지역과 관련된 굉장히 많은 통계를 끌어와야 한다. 다음은 소련 지역의 사망자 통계를 취합한 것이다.
I. 독일 점령 지역 1. 특공대 작전 (1) 친위특공대 A: 1942년 2월 1일까지 유대인 218,050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는 훨씬 높았다.
작전 지역은 발트해 지역, 러시아 북부, 민스크, 바라노비체였다.
그들 중 소련 지역 사망자 수 ----- 수만 명
(2) 친위특공대 B: 1942년 9월 1일까지 유대인 126,195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도 그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주요 작전 지역은 군 집단 중부의 후미 지역이었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약 100,000
(3) 친위특공대 C: 친위특무대 4a는 1941년 11월 30일까지 59,018 명을 학살했고, 친위특무대 5는 1941년
12월까지 36,147 명을 사살했다. 친위특공대 C가 죽인 사람은 모두 120,000 명이 넘었던 것 같다. 주요 작전 지역은 우크라이나였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100,000 이상
(4) 친위특공대 D: 1942년 4월 8일까지 91,678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는 약 100,000 명 정도였다. 주요 작전 지역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코카서스였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약 90,000
2. 고위 친위경찰지휘관의 작전
(1) 1941년에 베르디체프, 드네프로테프로프스크 등 지에서 학살한 소련 유대인 수 ----- 약 50,000
(2) 1942년과 1943년에 벨로루시의 구소련 지역 내에서 학살한 사람 수 ----- 수천 명
(3) 1942년에 비아위스토크 지구,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에서 피살된 유대인 363,211 명 중에서 구소련 지역 유대인 수 ----- 수천 명
3. 독일군과 지방 당국이 벌인 소규모 학살 작전과 소련군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학살 작전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 수 ----- 100,000 미만
4. 게토에서 죽은 사람과 도망가다 죽은 유대인 수 ----- 수만 명
II. 루마니아 점령 지역(트란스니스트리아)
(1) 오데사-달닉, 골타, 베레조프카에서 사살된 소련 유대인 수 ----- 150,000 미만
(2) 트란스니스트리아 게토에서 죽은 소련 유대인 수 ----- 수만 명
* 합계 ----- 700,000 명 이상일 수 있음.
위 통계는 친위특공대의 가장 늦은 활동보고서에서 추려낸 것이다. 특공대가 그 후의 시기에 벌인 작전에
대한 파편적인 자료가 몇 개 있고, 추후 벌어지게 되는 사살 작전에 대한 부분적인 언급도 있다.
예컨대 1942년 2월 4일에 친위특공대 C는 하르코프 유대인을 사살하기 위한 준비 상황에 대해 보고했고,
1942년 여름에 로스토프를 경유하여 코카서스의 피아티고르스크-예센투키-키슬로봇스크로 이동한 친위특공 대 D는
키슬로봇스크의 유대인들에게 집합을 명하는 1942년 9월 7일자 공고문을 남겼다. 그에 반하여 코르헤르의 보고서에는
“동부 작전 초기부터 구발트해 지역을 포함하는 러시아 지역들”의 유대인 633,300 명이 “소개”되었다는
언급만이 있다. 크로헤르는 그 수치를 제국보안청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보고서에 밝혀놓았고, 전후의 심문에서는
그는 그것이 “집안통계”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집안통계라는 단어는 독일 통계학자들이 겉으로는 정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숫자를 지칭하던 은어였다. 그러나 제국보안청이 친위특공대의 실적
전체를 전달하려고 애썼다는 점과, 멀리 있는 관찰자가 입수된 자료만으로 작업을 해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코르헤르는 보고서의 결론 지점에서 자신이 “동부 점령 지역에서 사망한 소비에트 러시아 유대인 수”를
부분적으로만 기록할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그는 힘러에 직접 보고하던 고위 친위경찰지휘관들의
학살 작전 통계를 입수하지 못했고, 또한 게토에서 죽은 사람 수를 추정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루마니아인들에 의해 죽어간 유대인 수는 개략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전쟁 중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오데사 작전의 경우, 한 독일 정보 장교는 루마니아 정보원으로부터 59,000 명이란 숫자를 들었다. 전후
루마니아 측의 추정은 사망자 수가 그보다는 낮았음을 보여준다. 골타에서 벌어진 작전의 희생자 수는 전후의
재판에서 70,000 명에 육박했다는 진술들이 나왔다. 친위대 혈통독일인 지원청이 조직하여 혈통독일인 부대가
수행했던 베레조프카 작전에 대해서는, 약 28,000 명이 희생되었다는 문서 기록이 있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소련 유대인의 수는 다수의 트란스니스트리아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보고서에서 추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다만 그곳에는 루마니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외에도 현지의 유대인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유대인들의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소련 유대인들의 사망률도 그보다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 유대인의 총규모를 생각하면 소련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뺄셈 작업의 기준점은 1939년과 1959년의 센서스 결과다:
1939년 1월의 유대인 인구 3,020,171 1959년 1월의 유대인 인구 - 2,267,814 = 752,357
1959년의 2,267,814 명 중에는 1939년에 소련의 영토가 아니었던 폴란드, 발트해, 루마니아 지역의 유대인들
생존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수는 최소 100,000 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59년까지 구소련 지역의
유대인들 중에서 사라진 유대인이 850,000 명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1939년과 1959년 사이의 출생과 정상적인 사망은 어느 정도였을까? 1939년에서 1941년까지는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질렀다. 전쟁은 비점령 지역의 위축된 유대인공동체에서도 출생률을 낮추고 사망률을 높였다.
그 변화는 아마도 1944년 1월까지 전쟁 전의 인구 증가분을 삭감했을 것이다. 그 후 15 년 동안의 인구 변동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959년 1월, 0세~14세의 연령집단에 속하는 유대인 어린이가 약 434,000 명이었다.
그 중에서 415,000 명은 전쟁 이전 소련 지역에서 출생했던 부모 태생이다. 그렇다면 전후 15 년 동안
연간 28,000 명에 약간 미달하는 수가 태어났던 셈이다. 그런데 1959년 이전에 기간의 연간 사망자 수는
21,686 명이었다. 유대인의 사망률은 소련 전체의 사망률과 마찬가지로 전시에 최고점을 기록한 뒤 1959년까지
낮아졌는데, 이를 전쟁 이전 시기에 적용하면 그 시기의 연 평균 사망자 수는 24,000 명이 된다.
그렇다면 전후 15 년 동안 증가한 유대인 인구는 약 60,000 명 정도였음이 드러난다.
이 숫자를 1939년의 소련 영토에서 사라진 유대인 수에 더하면 모두 900,000 명이 된다. 그 수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숫자에서 홀로코스트와 무관한 사망자 범주 최소 다섯 개를 빼야한다:
(1) 전투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부상과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소련군 유대인 병사
(2)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유대인으로 식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 소련군 유대인 병사
(3) 레닌그라드와 같은 전투 지구에서 사망한 유대인 민간인
(4) 독일의 반유대주의 작전 이외의 동기에서 도망치거나 이송되었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유대인
(5) 수련의 교정 노동수용소에서 사망한 유대인
이 범주의 숫자를 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병사들에 대해서는 추정이 가능하다.
포로수용소 외부에서 전투 중에 죽은 소련군 병사는 700만 명이 넘는다. 전쟁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되었다. 1939년에 유대인은 소련 인구의 1.77%였다. 그러나 유대인 병사의 비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보다 낮았다. 첫째는 유대인 출생률이 전쟁 이전 30년 이상 동안 소련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았다.
비록 도시의 유아 사망률이 낮아서 유대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유리하기는 했지만, 낮은 출생률 때문에
징집 연령대의 유대인 남자 수도 적었다. 둘째,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남자들이 적시에 동원되지
않았고, 전쟁 초기 이후의 시기에 그들은 더 이상 소련 국가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련군 사망자에서
유대인 병사의 몫이 1.25%였다고 가정하면, 사망한 소련군 유대인 병사만 90,000이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부상, 질병, 기아로 사망한 유대인은 100,000 명이 넘었을 것이다. 나머지 세 개 범주에 속하는 유대인
사망자를 5만 명 내지 10만 명으로 잡으면, 1939년과 1959년 인구센서스의 격차는 약 700,000 명으로 줄어든다.
이는 유대인 사망자 수를 더해서 얻은 숫자와 대략 일치한다.
다음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 사망자를 사망원인에 따라 도표화한 것이다.
도표 B-1. 홀로코스트 사망자의 원인별 분류
게토화와 박탈 800,000 이상 독일 점령 동유럽 지역의 게토 600,000 이상 테레시엔슈타트와 게토 밖의 박탈 100,000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 식민촌 (루마니아 및 소련 유대인) 100,000
사살 1,400,000 친위특공대, 고위 친위경찰지휘관, 루마니아 및 독일군의 기동 작전; 갈리치아 유대인들을 이송하다 벌어진 사살; 전쟁포로 사살; 세르비아 등지에서의 사살
수용소 2,900,000 이하 독일 학살수용소 2,600,000 이하 아우슈비츠 1,000,000 이하 트레블링카 800,000 이하 베우제츠 434,508 소비부르 150,000 이상 헤움노 150,000 이상 루블린(본부 수용소) 50,000 이상 수만 명 이하가 죽은 수용소들 150,000 이상 수용소 (베르겐 벨젠, 부헨발트, 마우트하우젠 다카우, 스투트호프 등) 학살 작전이 펼쳐진 수용소 (포니아토바, 트라브니키, 제문) 노동수용소와 기착 수용소 루마니아 골타 단지와 베사라비아 기착 수용소들 100,000 크로아티아 등 50,000 미만 합계 5,100,000
* 주석 :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의 게토, 총격, 아우슈비츠의 사망자 수는 10만 명까지 끝수 처리한 숫자이고, 나머지 범주는 5만 명까지 끝수 처리한 숫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