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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전차님 보세요. 유대인 학살자 수 관련.
게시물ID : sisa_653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sPaul
추천 : 1
조회수 : 1482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09/03/04 12:44:40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 저 / 김학이 역  『유럽 유대인의 파괴』부록부분에서 퍼왔습니다.

내용이 제법 기니 관심있는분만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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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6일, 전직 친위대 보안국 소령 빌헬름 회틀은 

1944년 8월 말에 그가 아이히만과 가졌던 대화의 내용이 담긴 법정진술에 서명을 했다. 

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회틀에게 모두 6백만 명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그 중 4백만 명은 수용소에서, 나머지 2백만 명은 다른 곳에서, 특히 소련전 기간 동안 총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말했다. 

뉘른베르크의 국제전범재판소는 1946년 9월 30일의 판결문에 그 6백만 명을 인용하고 

회틀은 언급하지 않은 채 아이히만의 발언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아이히만이 6백만 명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즈음 아이히만은 자기 집무실에서 열린 한 회의에서,

자신은 유대인 사망자 5백만 명에 대한 책임을 지고 웃으면서 무덤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말했고, 

1961년에 예루살렘 법원에서도 5백만이라는 숫자를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제국보안청에 근무하는 동안 통계 수치가 담긴 수많은 보고서들을 받던 인물이다. 

그가 그 통계 숫자들을 합산했을 수도 있다. 전후에 유대인 단체들도 나름대로 계산을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아이히만과 정반대였다. 유대인들의 계산 방법은 기본적으로 전전(戰前)의 센서스 숫자 혹은 추정치에서 

전후(戰後)의 숫자(생존 신고자 포함)를 빼는 것이었다. 

1945년 6월에 뉴욕의 유대인문제연구소는 한 미간행 보고서에서, 유대인 사망자 수가 1939년 8월의 소련 영토 안에

사살된 유대인 1,250,000 명을 포함하여 모두 5,659,600 명에서 5,673,100 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 보고서에 언급된 소련 지역 사망자 수는, 독일 점령 지역의 원래 유대인 수가 2,100,000 명이었는데 

그들 중 도시 거주민의 절반은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데려갔고, 남은 유대인은 생존자 3만 명을 제외하고 

모두 피살되었다는 가정 하에서 도출한 숫자다. 1년 뒤인 1946년에 야콥 레슈친스키는 세계유대인총회에서,

1939년 8월의 소련 영토 안에서 피살된 유대인 150만 명을 포함하여 모두 5,978,000 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500만 명에서 600만 명 사이의 수치를 제시한다. 계산법도 대부분 똑같다.

독일 기관과 위성국 당국과 유대인평의회의 때로 파편적인 자료에서 사망자 수를 뽑아내어 합산하거나, 

전전 통계 숫자에서 전후 통계 숫자를 차감하는 방법이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는 원자료는 그 자체로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두터운 배경 자료를 고려하여 분석되어야 하며, 

그 배경 자료 자체가 면밀하게 분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작업이 동반되지 않으면, 가정 위에 가정이 세워지는 과정이 연속되고, 

그런 가운데 작은 오류들이 쌓이고 또 쌓일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하므로 사실상 정확한 통계를 제시하기란 불가능하다. 





1. 덧셈

더하는 셈법은 전쟁 문서에 들어있는 숫자의 기원과 의미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 숫자의 거의 대부분은 실제 희생자 수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 숫자는 대부분 세 가지 범주로 나뉜다: 

(1) 주로 게토의 기아와 질병에서 비롯된 생명의 상실 (2) 사살 (3)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송. 

이러한 분류는 독일 관료제의 관할권 배분 방식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의 상실 통계는 유대인평의회가 기록하여 감독 기관에게 보고했고, 

그 독일 당국은 그 통계에 입각하여 배급 식량의 양과 공간의 크기를 조절했다. 

독일과 체코 보호령 지역의 경우 그러한 통계들이 있고, 바르샤바와 우지의 게토에 대한 자세한 통계도 있다. 

그러나 그 외 지역의 통계는 드물다. 따라서 생명 상실 통계는 사망자 수를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전체 희생자들 중에서 이 범주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낮고, 그 숫자 역시 가장 부실하다.


사살 통계는 친위경찰 부대, 특히 친위특공대가 제시한 통계다. 그 부대들은 때로 그 숫자를 근거로 하여 

자기 부대의 존립을 정당화하려 했던 듯이 보이기도 한다. 예컨대 친위특공대 친위특무대 3은 희생자들을 

날짜, 장소, 희생자의 유형별로 상세하게 분류한 현장 보고서를 작성했다.


제국보안청은 친위특공대의 작전보고서를 취합한 일일보고서를 만들어서 특정한 수신자들에게 배포했다. 

그 기나긴 문서에는 많은 통계들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것은 친위특무대 3이 현장에서 작성한 6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통계만큼 자세하지는 않다. 제국보안청의 일일보고서에 기록된 누적 통계는 특정한 시간대를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다른 부대와 공동으로 펼친 작전의 피살자 전체 통계를 제시하면서 

그 근거를 밝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고위 친위경찰지휘관이 주도한 작전의 결과로서 제시된 통계는

종종 근사치다.


친위특공대 보고서의 중대한 결함은 또 있다. 1942년과 1943년 학살에 대한 보고서는 1941년 작전 보고서보다 부정확하고,

군대와 친위 경찰부대 혹은 민간 기관이 전선의 후미 지역에서 벌인 소규모 사살작전은 보고되지 않았다.


희생자 수가 가장 많았던 것은 세 번째 범주인 강제이송 통계이다. 

우리는 이송 유대인의 수가 꼼꼼하게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서유럽, 독일, 체코 보호령,

슬로바키아에서 이송은 명단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졌다.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우는 기착 수용소에서

작성된 이송자 명단이 대부분 고스란히 남아있다. 마케도니아, 불가리아가 지배하던 트라키아 지방과 헝가리에 대해서도

차이가 거의 없는 한 개 이상의 통계가 남아있다. 

폴란드의 경우 철도청은 보안경찰에게 운임을 청구하기 위하여 직원들에게 기차에 탑승한 이송 유대인의 수를 정확하게 세도록 지시했다.


경우에 따라 문서에는 이송의 장소만이 아니라 도착지도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철도청 직원이나 치안경찰

경비대원의 보고서 일부에는 이송 열차의 노선까지 명시되어 있다. 우지 게토나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로 온

열차들도 기록되어 있다. 민스크, 리가, 카우나스로 이송되어 학살된 유대인들도 지역 사살 작전 보고서에

언급되어 있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봉기에서 생포된 유대인 6,926 명에 대한 스트로프의 보고서에는 

트레블링카로 보낸 유대인의 수가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학살 수용소에 도착한 유대인들에 대한 체계적인

통계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부르에 이송된 유대인들은 도착하자마자 가스실로 보내졌다.

아우슈비츠와 루블린에서도 당분간 살려둔 유대인의 숫자만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대부분은 도착 즉시 가스로 학살되었다.


독일 측 자료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친위대 통계학자인 코르헤르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에 대하여 작성한 문서다.

1943년 3월 23일자에 작성된 16 페이지에 달하는 그 문서는 1942년 12월 31일 현재 상황을 정리한 것이다.

이송 통계만을 제시한 7 페이지짜리의 보충 보고서는 1943년 첫 번째 세 달의 학살 통계다.


크로헤르 보고서의 모든 것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 문서는 실상 목적조차 분명치 않다. 

코르헤르가 1942년이라는 그 학살의 한 해 말을 기준점으로 삼았다는 사실에서, 그 문서가 최종해결의 진척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리라는 추론이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그 문서에는 단순한 합산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1942년 말에 힘러는 군수부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와 보충군 사령관 프롬 장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직책 때문에 인력의 보존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인물들이다. “최종해결”은 

유대인 잠재 노동력을 고갈시키고 있었고, 수용소는 잠재적인 독일군 병사를 삼켜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공모한 것이 틀림없는 슈페어와 프롬은 히틀러에게 제국보안청의 포획 및 체포 통계의 적절성과 진실성을 문제 삼았다.

친위대가 인력을 얼마나 처리했는지 밝히기를 거부한다는 그들의 비판은 힘러에게 오래된 딜레마를 안겨주었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성취를 히틀러에게는 모두 밝히면서도 그 사실을 적절한 용어로 은폐할 수 있을까? 

이 때문에 힘러에게는 친위대의 통계 전문가, 폄하될 수 없는 실력을 갖추고 있던 코르헤르의 작업이 필요했다.

1943년 1월 18일에 힘러는 코르헤르에게 관련 보고서를 작성하되, “특수 처리”되었다는 점은 누락시킴으로써

보고서를 읽게 될 사람들이 그저 거명되지 않은 수용소를 “통과한” 유대인의 수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코르헤르의 통계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제국보안청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코르헤르는 전후의 증언에서 그가 참석했던 회의와 논의에 대해서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와 달리 아이히만은 사망자 전체 통계를 제시하려 애쓰면서 그 “무뚝뚝한” 통계학자를 분명하게 기억해냈다.

아이히만은 자기들끼리 수용소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면서, “물론” 친위경찰지휘관 글로보스니크가

총독령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보냈고,” 친위특공대 대장들이 죽인 유대인이 몇 명이나 

되는지도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법원에서 코르헤르는 친위대 경제행정청에게 아우슈비츠, 루블린, 기타 정규 수용소의 등록 수감자 수에 대하여 문의했고,

유대인평의회 직원 한 명에게 독일 출신 유대인에 대하여 문의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자신이 그들의 

진술이 맞는지 검증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그가 외교부나 제국철도에게 강제이송과 관련된 문의를 

했을 리는 없다. 외국 정부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코르헤르의 보고서는 헝가리 유대인 노동대, 루마니아의 사살 작전,

크로아티아 수용소를 취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보고서의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거나,

친위특공대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그의 진술은 더더욱 믿기 어렵다. 전후의 서독 법원에서

그는 증인으로건 피고인로건 그저 겁먹은 사람이었고, 그저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1944년과 1945년에도 아이히만의 집무실에 통계가 쌓였지만, 그 두 해 동안에 대한 최종 보고서는 작성되지 않았다.

전쟁의 마지막 반 년 동안, 즉 유대인들의 도보 행진이 시작되고 수감자들이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부단히 이동하던 그 때, 나치 체제는 붕괴되었고, 그와 함께 희생자 수의 집계 작업도 끝났다.




2. 뺄셈

희생자 수를 더하는 덧셈법의 원리적인 문제점은 죽은 자 전원을 알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되는 불완전성이다.

뺄셈법의 어려움은 측정 단위와 결과를 재조정해야 된다는 데 있다. 우선은 1938년의 국경과 1946년의 

국경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폴란드와 소련이 특히 그렇다. 두 번째 고려 사항은 인과적 요인이다. 

전쟁 이전 마지막 해와 전후 첫 번째 해 사이의 기간에 나타난 인구 감소는 홀로코스트만이 아니라 전쟁, 

이민, 출생률 및 사망률의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소련처럼 인구센서스를 1939년과 1959년에 한 경우

어려움은 증폭된다. 또한 정상적인 죽음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죽음, 혹은 전쟁으로 인한 죽음과 홀로코스트로 인한

죽음을 개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은 없다.


게토가 완전히 봉쇄되기 직전의 조건 때문에 사망한 사람, 도피 중에 혹은 도피 후에 사망한 사람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가? 1939년 이후 독일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의 평균 연령도 높았다. 다른 곳에서도 유대인들 중에는

기대 수명이 낮을 수밖에 없는 노인들과 환자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쨌든 발생했을 사망을 홀로코스트

총계에서 배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공동체는 독일 점령 하에서 비로소 가상적인 정상성이 아닌, 

진정한 어려움에 직면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정복된 폴란드에서 유대인의 정상적인 죽음은 갈수록 적어졌다.


그러나 도피한 뒤에 사망한 희생자는 문제가 전혀 다르다. 이 때 핵심은 난민의 도피 동기다. 

독일이 1941년 6월 22일에 소련을 침공한 이후 유대인 150만 명이 이동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비유대인들이

소련의 내륙으로 도피하거나 이송되었고, 그들의 사망률 역시 정상적인 사망률보다 높았다. 

따라서 우리는 도피한 유대인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름 아닌 독일의 지배 하에서 유대인들이 겪게 될

운명 때문에 도피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론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특정한 도시에서 슬라브인 

주민의 1/2과 유대인 주민의 2/3가 이동했다면, 적어도 그 차이만큼은 분석되어야 한다. 피난민 사망자의 

전체는 아니더라도 그 중 일부는 분명히 홀로코스트 사망자다. 그러나 이 단언을 숫자로 옮기기란 

현실적으로 대단히 어렵다.


그리고 뺄셈으로 파악될 수 없는 수만 명이 있다. 가해자들이 유대인으로 분류하여 학살한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기독교 세례를 받았던 그 사람들 중에서 많은 이들은 혼합혼 덕분에 면제되었다. 

그러나 파괴의 소용돌이에 빠진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 바르샤바 게토에도 기독교인이 드물지 않았다.





3. 요약 정리

희생자 수의 계산에는 반드시 의문부호가 찍힌다. 폴란드와 소련이 특히 그렇지만, 일부 국가의 경우 

명료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덧셈으로 얻은 수치와 뺄셈으로 얻은 수치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물론 그런 크로스체크 작업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독일과 동맹국들의 보고서에는 1938년 혹은 1946년의

지도에 없는 지역이 언급된다: 체코 보호령, 총독령, 트란스니스트리아, 오스트란트, 제국직할령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와 크로아티아도 새로이 만들어진 나라였고, 세르비아와 살로니카라는 군정 지역도 새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지역에 대하여 보고된 숫자를 익숙한 국경을 가진 식별 가능한 국가의 숫자로 변환하는 일은

가공할 작업이다. 여기서는 사망자의 70%를 차지하던 폴란드와 소련을 대표적인 예로서 설명하겠다. 


1) 폴란드

나치 유럽의 지도에는 폴란드가 없었다. 전쟁 이전의 폴란드 국경을 나치 시대의 행정구역으로 재구성할 때

고려해야 하는 지역은 (1) 병합된 지역(고지슐레지엔, 우지, 동프로이센에 합해진 지역, 비아위스토크), 

(2) 크라쿠프, 바르샤바, 라돔, 루블린, 갈리치아의 다섯 개 지구로 이루어진 총독령, 

(3) 제국직할령 오스트란트의 일부가 된 북동부 지역(빌뉴스와 폴란드 벨로루시)과 제국직할령 우크라이나

일부(볼리니아)이다. 그리고 그 세 구역에는 모두 계산상의 문제점들이 제각각 있다.


병합된 지역과 총독령에 대한 가장 완벽한 통계는 코르헤르의 보고서에 제시된 숫자일 것이다. 아래 제시한

등식의 숫자는 모두 코르헤르의 보고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처음 열(列) 세 개에 제시된 숫자는 코르헤르가

추정하거나 보고서의 숫자를 합산해서 얻은 것이다. 마지막 열의 숫자 두 개는 코르헤르가 추론한 것이다.

독일 점령 이전 남은 유대인 출생자를 초과하는 유대인 추정치 (1942. 12월 31일) “소개된” 수 추가사망자와 이민자

병합된지역 790,000    - (233,210 + 222,117) = 334,673
총독령 2,000,000 - (297,914 + 1,274,166) = 427,920

이 모든 숫자는 해석되어야 한다. 코르헤르는 병합 지역의 전전(戰前) 유대인 인구를 79만 명으로 잡고 

총독령 유대인 수는 200만 명으로 잡았는데, 이는 1931년의 폴란드 인구센서스를 그대로 대입하여 얻을 수 있는

결과와 너무 유사하다. 그는 또한 1942년 12월 31일에 총독령에 생존해 있던 유대인을 297,914 명으로 

집계했는데, 그 속에 포함된 바르샤바 유대인 5만 명은 너무 낮은 수치다. 그리고 “소개(疏開)” 인원 

222,117과 1,274,166 속에는 게토에 일시적으로 수감되었던 비폴란드 유대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독일, 빈, 프라하, 룩셈부르크에서 이송된 유대인 2만 명이 우지 게토에 있었고, 독일과 슬로바키아에서 

이송된 유대인 수천 명도 총독령의 게토에 있었던 것이다.

코르헤르는 “소개된” 인원을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제시했다: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222,117
    바르테란트(우지와 그 인근)로부터
    바르테가우의 수용소(헤움노)로 “통과된” 사람 145,301
    비아위스토크 지구로부터
    (아우슈비츠와 트레블링카 이송된 것을 뜻함) 46,591
    고지슐레지엔과 동프로이센에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아우슈지츠와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것을 뜻함) 30,225
총독령으로부터 총독령 수용소(베우제츠, 소비부르,                1,274,000
트레블링카, 루블린)로“통과된” 사람

우리는 이 통계를 1943년과 1944년에 이송된 유대인에 대한 부분적인 자료로 보충할 수 있다. 

코르헤르에 따르면 1942년 말에 87,180 명이 수감되어 있던 우지 게토가 1944년 8월에 해체되었는데, 

그 때 63,000 명이 이송되었다. 이는 우지시 통계국 파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다. 

1943년에 7만 명이 남아있던 바르샤바 게토는 봉기와 진압으로 인하여 전쟁터가 되었고, 

그 때 수천 명을 제외한 전원이 현장에서 죽거나 루블린과 트레블링카로 이송되었다. 

갈리치아에서는 친위경찰지휘관 카츠만이 1943년 6월 30일에 유대인 21,156 명이 남았다고 보고했다. 

다른 지역과 관련된 문서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준다.


코르헤르는 앞에 제시한 폴란드 유대인 통계에서 “출생자를 초과하는 추가 사망자와 이민자”라는 항목을

제시했을 뿐, “이민”과 “추가 사망자”를 각각 별도로 계산하지 않았다. 그가 병합지역과 총독령에서 

사라진 그 두 개 범주의 유대인 수를 각각 334,673 명과 427,920 명으로 계산했을 때에도 두 개념을 구분하지

않았다. 또한 그 두 개의 수를 비교해보면 그 비율이 이상하다는 점이 금방 눈에 띈다. 보통의 평가처럼 

2:5가 아니라 거의 4:5인 것이다. 이 명백한 상위점은 원칙적으로 독일 점령 초기에 병합된 지역의 유대인들이

총독령으로 도망갔다는 사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병합된 지역으로부터 총독령으로 이동한 유대인의 수를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략 5만 명 내지 7만 명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334,673과 427,920은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그릇된 것일 수 있으나, 그 두 숫자를 합산해서 얻을 수 있는 762,593은 두 지역 전체에서 없어진

유대인 수에 근접할 것이다. 그러나 이 통계만으로는 열악한 조건 때문에 생명을 상실한, 확정 불가능한 

유대인 수를 파악할 수 없다. 그 지역으로부터 특히 소련 내륙으로 도망친 유대인은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였다. 따라서 우리는 그 숫자를 코르헤르의 “이민자” 통계에서 빼야 한다. 그들 모두가 이민자였던 것이

아니다. 그들 일부는 홀로코스트 사망자.


코르헤르는 오스트란트와 우크라이나에 포함된 폴란드 지역에 대한 통계는 제시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점령

이전 유대인 인구는 55만 명이었다.

1931년 인구센서스를 토대로 하여 유대인 인구를 행정단위별로 제시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국직할령 오스트란트
  리투아니아 총감 지구
    빌뉴스 지역 10만 명 이상
  벨로루시 총감 지구
    민스크 감독 지구
      빌레이카-구에보키에 지역 2만 명 이하
  바라노비체 감독 지역 10만 명 이상
제국직할령 우크라이나
  볼리니아-포돌리아 총감 지구
    볼리니아와 폴레시에 대부분 약 33만 명

그곳에서 소련 내륙으로 도망친 유대인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독일군이 빌뉴스에 진입했을 때 빌뉴스 지역의

유대인 거주민의 1/3 이하가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독일군이 곧바로 접수하게 되는 

인근 지역까지밖에 피난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친위특공대 B의 친위특무대 9가 1941년 여름에 빌뉴스에서 

유대인 수천 명을 사살했고, 친위특공대 A의 친위특무대 3 역시 1941년 11월 25일까지 그 지역에서 

34,622 명을 사살했던 것이다. 특무반에 따르면 그 시점에 빌뉴스 게토에 남아있던 유대인은 군수생산 

때문에 학살을 모면한 1만 5천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빌뉴스 인근의 소형 게토의 유대인들은 친위특공대의

작전에 의해 계속해서 감소했고, 일부는 빌뉴스 게토로 이송되었다. 1943년 여름에 빌뉴스 게토에는 유대인

2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 노동자는 12,332 명이었다. 그러나 1943년 여름에 그들 중에서 

수천 명이 사살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소비부르로 보내져서, 노동을 강요당하고 

선별되어 학살당했다.


빌레이카 지역의 유대인들은 1942년 3월에 학살 작전의 목표물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 7월 31일에 벨로루시의

총감 쿠베가 또 다른 학살 작전에 대해 보고했다. 쿠베는 또한 인근의 구에보키에와 그 주변에서 펼쳐져서

유대인 1만 명을 죽였던 독일군의 성마른 작전도 기록했다.


바라노비체 지구는 1941년과 1942년에 사살 작전으로 얼룩졌다. 그리하여 1942년 8월 8일까지 총 9만 5천 명의

유대인이 사살되고 6천 명이 도주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1942년 말에는 벨로루시의 고트베르크로부터 출격한

친위경찰대가 유대인 3,658 명을 사살하여 그 지구 서부 지역으로 도망친 유대인의 수를 절반으로 줄여놓았다. 


볼리니아는 친위특공대 C와 총독령의 보안경찰 분견대가 1941년에 종횡으로 휩쓸었던 지역이다. 

그 때 유대인 수천 명이 사망했다. 1941년 11월에는 고위 친위경찰지휘관 남부의 경찰부대가 로브노에서 

유대인 1만 5천 명을 학살했고, 1942년 여름에 또 다시 강력한 학살 물결이 몰려왔다. 1942년 12월 29일, 

힘러는 히틀러에게 그 해 8월부터 11월까지 우크라이나, 남러시아, 비아위스토크 지구에서 유대인 63,211 명을

"처형했다”고 보고했다. 그 때 사망한 유대인 대부분이 볼리니아-포돌리아 총감 지구의 볼리니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때의 작전은 우마차를 생산하는 노동자건, 직물을 생산하든 노동자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게토마다 유대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이 하룻밤 사이에 제거되었다. 그로 인하여 

볼리니아 유대인 전체가 절멸되었다.


폴란드 유대인 전체를 살펴보면, 50만 명 이상이 게토에서, 70만 명 이상이 사살 작전에서, 170만 명 이하가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소련에서 피난처를 구했다가 열약한 조건 때문에 생명을 상실한 유대인도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로 간주되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계산하면 잘해야 근사치만 얻을 수 있을 뿐이지만, 이상의 덧셈을

단순한 뺄셈과 비교해보도록 하자.


1939년 8월 현재 유대인 인구에 대한 
폴란드의 공식 통계 3,351,000
  1945년에 폴란드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등록된 생존자 55,000
  소련으로부터 귀환한 유대인 185,000
  난민 유대인: 1946년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 100,000 이상
  1945년 폴란드 군복무 유대인 약 15,000
  1939~44년에 팔레스타인 등지로
  이민 간 유대인 15,000 이상
  소련에 병합된 폴란드 지역의 생존자 수천
  소련의 전쟁 이전 영토에 남은 피난민 수천
  소련이 실행한 이송의 희생자 수천
  전쟁 사망자 수천


전후의 뺄셈으로도 정확한 숫자를 얻기란 힘들지만, 이상의 계산은 생존자와 홀로코스트와 무관한 사망자가

40만 명 이하였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덧셈에서나 뺄셈에서나 폴란드 유대인의 홀로코스트 희생자 수는 

3백만 명에 근접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소련

 1939년과 1940년에 소련은 폴란드 동부 지역과 발트해 지역, 루마니아 일부를 합병했다. 

1941년 6월에 독일이 소련을 공격했을 때, 독일군은 이 완충지대를 돌파하여 구소련으로 밀고 들어갔다. 

점령 소련 지역에 대한 독일의 보고서에는 1939년의 소련 영토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 보고서 일부에 적시된

포괄적인 유대인 사망자 통계는 그 국경의 동과 서 모두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구소련 영토에 

집중하려면,

특정 지역과 관련된 굉장히 많은 통계를 끌어와야 한다. 다음은 소련 지역의 사망자 통계를 취합한 것이다.


I. 독일 점령 지역
1. 특공대 작전
(1) 친위특공대 A: 1942년 2월 1일까지 유대인 218,050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는 훨씬 높았다. 

                  작전 지역은 발트해 지역, 러시아 북부, 민스크, 바라노비체였다. 

                  그들 중 소련 지역 사망자 수 ----- 수만 명

(2) 친위특공대 B: 1942년 9월 1일까지 유대인 126,195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도 그보다 그리 높지 않았다.
                  주요 작전 지역은 군 집단 중부의 후미 지역이었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약 100,000

(3) 친위특공대 C: 친위특무대 4a는 1941년 11월 30일까지 59,018 명을 학살했고, 친위특무대 5는 1941년 
                  
                  12월까지 36,147 명을 사살했다. 친위특공대 C가 죽인 사람은 모두 120,000 명이 넘었던 것 같다.
                  주요 작전 지역은 우크라이나였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100,000 이상

(4) 친위특공대 D: 1942년 4월 8일까지 91,678 명 학살. 최종 사망자 수는 약 100,000 명 정도였다. 
                  주요 작전 지역은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코카서스였다. 소련 지역 유대인 사망자 수 ----- 약 90,000

2. 고위 친위경찰지휘관의 작전

(1) 1941년에 베르디체프, 드네프로테프로프스크 등 지에서 학살한 소련 유대인 수 ----- 약 50,000

(2) 1942년과 1943년에 벨로루시의 구소련 지역 내에서 학살한 사람 수 ----- 수천 명

(3) 1942년에 비아위스토크 지구,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에서 피살된 유대인 363,211 명 중에서 구소련 지역 유대인 수 ----- 수천 명

3. 독일군과 지방 당국이 벌인 소규모 학살 작전과 소련군 전쟁포로 수용소에서 발생한 학살 작전으로 인하여 사망한 사람 수 ----- 100,000 미만

4. 게토에서 죽은 사람과 도망가다 죽은 유대인 수 ----- 수만 명

II. 루마니아 점령 지역(트란스니스트리아)

(1) 오데사-달닉, 골타, 베레조프카에서 사살된 소련 유대인 수 ----- 150,000 미만

(2) 트란스니스트리아 게토에서 죽은 소련 유대인 수 ----- 수만 명

* 합계 ----- 700,000 명 이상일 수 있음.

위 통계는 친위특공대의 가장 늦은 활동보고서에서 추려낸 것이다. 특공대가 그 후의 시기에 벌인 작전에 

대한 파편적인 자료가 몇 개 있고, 추후 벌어지게 되는 사살 작전에 대한 부분적인 언급도 있다. 

예컨대 1942년 2월 4일에 친위특공대 C는 하르코프 유대인을 사살하기 위한 준비 상황에 대해 보고했고, 

1942년 여름에 로스토프를 경유하여 코카서스의 피아티고르스크-예센투키-키슬로봇스크로 이동한 친위특공
대 D는

키슬로봇스크의 유대인들에게 집합을 명하는 1942년 9월 7일자 공고문을 남겼다. 그에 반하여 코르헤르의 보고서에는

“동부 작전 초기부터 구발트해 지역을 포함하는 러시아 지역들”의 유대인 633,300 명이 “소개”되었다는

언급만이 있다. 크로헤르는 그 수치를 제국보안청으로부터 제공받았다고 보고서에 밝혀놓았고, 전후의 심문에서는

그는 그것이 “집안통계”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집안통계라는 단어는 독일 통계학자들이 겉으로는 정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미를 숨기고 있는 숫자를 지칭하던 은어였다. 그러나 제국보안청이 친위특공대의 실적

전체를 전달하려고 애썼다는 점과, 멀리 있는 관찰자가 입수된 자료만으로 작업을 해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코르헤르는 보고서의 결론 지점에서 자신이 “동부 점령 지역에서 사망한 소비에트 러시아 유대인 수”를 

부분적으로만 기록할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그는 힘러에 직접 보고하던 고위 친위경찰지휘관들의 

학살 작전 통계를 입수하지 못했고, 또한 게토에서 죽은 사람 수를 추정하려 시도하지도 않았다.


루마니아인들에 의해 죽어간 유대인 수는 개략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전쟁 중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오데사 작전의 경우, 한 독일 정보 장교는 루마니아 정보원으로부터 59,000 명이란 숫자를 들었다. 전후 

루마니아 측의 추정은 사망자 수가 그보다는 낮았음을 보여준다. 골타에서 벌어진 작전의 희생자 수는 전후의

재판에서 70,000 명에 육박했다는 진술들이 나왔다. 친위대 혈통독일인 지원청이 조직하여 혈통독일인 부대가

수행했던 베레조프카 작전에 대해서는, 약 28,000 명이 희생되었다는 문서 기록이 있다.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소련 유대인의 수는 다수의 트란스니스트리아 게토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에 대한 보고서에서 추정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다만 그곳에는 루마니아에서 추방된 유대인들 외에도 현지의 유대인들도 수감되어 있었다.

루마니아 유대인들의 사망률이 특히 높았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소련 유대인들의 사망률도 그보다 

낮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련 유대인의 총규모를 생각하면 소련의 인구센서스 자료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뺄셈 작업의 기준점은 1939년과 1959년의 센서스 결과다:

1939년 1월의 유대인 인구         3,020,171
1959년 1월의 유대인 인구       - 2,267,814
                                      =   752,357

1959년의 2,267,814 명 중에는 1939년에 소련의 영토가 아니었던 폴란드, 발트해, 루마니아 지역의 유대인들

생존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수는 최소 100,000 명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59년까지 구소련 지역의 

유대인들 중에서 사라진 유대인이 850,000 명이었음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1939년과 1959년 사이의 출생과 정상적인 사망은 어느 정도였을까? 1939년에서 1941년까지는 출생률이

사망률을 앞질렀다. 전쟁은 비점령 지역의 위축된 유대인공동체에서도 출생률을 낮추고 사망률을 높였다. 

그 변화는 아마도 1944년 1월까지 전쟁 전의 인구 증가분을 삭감했을 것이다. 그 후 15 년 동안의 인구 변동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959년 1월, 0세~14세의 연령집단에 속하는 유대인 어린이가 약 434,000 명이었다. 

그 중에서 415,000 명은 전쟁 이전 소련 지역에서 출생했던 부모 태생이다. 그렇다면 전후 15 년 동안 

연간 28,000 명에 약간 미달하는 수가 태어났던 셈이다. 그런데 1959년 이전에 기간의 연간 사망자 수는 

21,686 명이었다. 유대인의 사망률은 소련 전체의 사망률과 마찬가지로 전시에 최고점을 기록한 뒤 1959년까지

낮아졌는데, 이를 전쟁 이전 시기에 적용하면 그 시기의 연 평균 사망자 수는 24,000 명이 된다. 

그렇다면 전후 15 년 동안 증가한 유대인 인구는 약 60,000 명 정도였음이 드러난다.


이 숫자를 1939년의 소련 영토에서 사라진 유대인 수에 더하면 모두 900,000 명이 된다. 그 수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숫자에서 홀로코스트와 무관한 사망자 범주 최소 다섯 개를 빼야한다:

(1) 전투에서 사망했거나, 혹은 부상과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소련군 유대인 병사

(2)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유대인으로 식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 소련군 유대인 병사

(3) 레닌그라드와 같은 전투 지구에서 사망한 유대인 민간인

(4) 독일의 반유대주의 작전 이외의 동기에서 도망치거나 이송되었다가 목숨을 잃어버린 유대인

(5) 수련의 교정 노동수용소에서 사망한 유대인

이 범주의 숫자를 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병사들에 대해서는 추정이 가능하다. 

포로수용소 외부에서 전투 중에 죽은 소련군 병사는 700만 명이 넘는다. 전쟁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진행되었다. 1939년에 유대인은 소련 인구의 1.77%였다. 그러나 유대인 병사의 비율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보다 낮았다. 첫째는 유대인 출생률이 전쟁 이전 30년 이상 동안 소련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았다. 

비록 도시의 유아 사망률이 낮아서 유대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유리하기는 했지만, 낮은 출생률 때문에 

징집 연령대의 유대인 남자 수도 적었다. 둘째,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남자들이 적시에 동원되지

않았고, 전쟁 초기 이후의 시기에 그들은 더 이상 소련 국가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련군 사망자에서 

유대인 병사의 몫이 1.25%였다고 가정하면, 사망한 소련군 유대인 병사만 90,000이 된다. 포로수용소에서 

부상, 질병, 기아로 사망한 유대인은 100,000 명이 넘었을 것이다. 나머지 세 개 범주에 속하는 유대인 

사망자를 5만 명 내지 10만 명으로 잡으면, 1939년과 1959년 인구센서스의 격차는 약 700,000 명으로 줄어든다.

이는 유대인 사망자 수를 더해서 얻은 숫자와 대략 일치한다.

 다음은 유럽 전역의 유대인 사망자를 사망원인에 따라 도표화한 것이다.

도표 B-1. 홀로코스트 사망자의 원인별 분류

게토화와 박탈 800,000 이상
  독일 점령 동유럽 지역의 게토 600,000 이상
  테레시엔슈타트와 게토 밖의 박탈 100,000
  트란스니스트리아 유대인 식민촌
  (루마니아 및 소련 유대인) 100,000

사살 1,400,000
  친위특공대, 고위 친위경찰지휘관, 루마니아 및
  독일군의 기동 작전; 갈리치아 유대인들을 이송하다
  벌어진 사살; 전쟁포로 사살; 세르비아 등지에서의 사살

수용소 2,900,000 이하
  독일
    학살수용소 2,600,000 이하
      아우슈비츠            1,000,000 이하
      트레블링카            800,000 이하
      베우제츠 434,508
      소비부르 150,000 이상
      헤움노 150,000 이상
      루블린(본부 수용소)            50,000 이상
    수만 명 이하가 죽은 수용소들 150,000 이상
      수용소
        (베르겐 벨젠, 부헨발트, 마우트하우젠
        다카우, 스투트호프 등)
      학살 작전이 펼쳐진 수용소
        (포니아토바, 트라브니키, 제문)
      노동수용소와 기착 수용소
  루마니아
    골타 단지와 베사라비아 기착 수용소들 100,000
  크로아티아 등 50,000 미만
합계                                  5,100,000

* 주석 : 독일이 점령한 동유럽의 게토, 총격, 아우슈비츠의 사망자 수는 10만 명까지 끝수 처리한 숫자이고, 나머지 범주는 5만 명까지 끝수 처리한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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