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의 볼펜
1
“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어서 일어나 아침이야!”
“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어서 일어…….”
“뚝”
오늘도 아침이 왔다. 눈은 떠지지 않는다. 솔직히 뜨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러나 밖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를 이기지 못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밥은 언제나 맛있다. 하지만 언제나 많다.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알겠는데 제발 적당히 좀 줬으면 좋겠다.
“잘 먹었습니다.”
“다 먹어. 남기지 말구.”
“배불러 너무 많어.”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아 하고 입을 여는데 입 냄새랑 방금 먹은 된장찌개 냄새가 섞여서 역한 냄새가 난다. 난 칫솔에 치약을 더 짠다. 양치질을 하면서 거울을 한번 바라본다. 내 얼굴이라지만 아무리 좋게 보려 해도 볼품없는 얼굴이다. 잘 생각해보니 나라는 놈 자체가 참 볼품없는 인간이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키가 큰 것도, 그렇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을 박차고 나온다. 나 자신에게 또 나를 이렇게 낳아버린 엄마에게 화가 나서 괜히 현관문을 세게 닫아버린다. 막상 그러고 나니 나도 깜짝 놀랐다. 나중에 엄마가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등굣길은 언제나 지루하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로만 다니다보니 언제나 같은 사람, 같은 풍경을 본다. 하지만 지루하다는 생각도 잠시다. 사실 우리 집은 학교와 그리 멀지않다.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학교에 도착한다.
“영호, 안녕?”
짝 진헌이가 인사한다. 누가 봐도 형식적인 인사치레다. 그저 짝으로서의 의무적인 인사다. 심지어 두 눈은 책상 위의 참고서에 고정 된 채 내 쪽은 의식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다 알면서도 최대한 진심을 담아 친절하게 답례한다.
“어 진헌아, 반가워.”
혹시나 하는 마음이지만 역시다. 내게 다시 돌아오는 말은 없다.
진헌이는 우리 반 회장이다. 얼굴도 잘생겼고 공부도 잘한다. 요즘말로하면 두말 할 나위없는 ‘엄친아’ 그 자체다. 나와 같이 다니는 학원에서도 언제나 부동의 ‘1등 원생’이다. 진헌, 진헌, 진헌이라… 생각해보니 진헌이는 이름도 멋진 것 같다. 내 이름은 영호라니……. 이름이 이 모양으로 촌티 나고 평범하니 내 인생도 이런 것 같다. 진지하게 개명을 고민해본다.
“김영호 완전 칼이야. 12분만 되면 번개같이 나타난다니까!”
“등교하는 것만 놓고 보면 완전 전교 1등 안 부럽지.”
내 단짝친구 준호와 준석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2가 될 때까지 진짜 친구라고는 이 둘밖에 사귀지 못했다. 나와 공통점이 많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이 친구들과 함께하면 언제나 편안함을 느낀다. 나와 똑같은 평범한 이름을 가지고 있고, 비슷한 성적에 잘난 구석 없는 외모까지도 닮았다.
“알게 뭐냐. 이러다 보면 진짜 전교 1등 될지.”
말은 꺼냈지만 참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 때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신다.
“모두 1교시 수업 준비하도록 하세요. 그리고 오늘 상담은 6번 김건우, 7번 김영호니까 점심시간에 밥 빨리 먹고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아뿔싸! 올게 왔구나. 나는 울상이 돼서 준호와 준석이를 쳐다봤다. 근데 저 자식들은 이미 날 보면서 웃고있다.
“영호야, 이 성적 가지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한시가 바쁜 와중에 6월 모의고사보다 성적이 훨씬 더 많이 떨어졌잖아. 그리고 요즘 보니까 수업시간에 딴 생각하는 시간이 너무 많은 거 같아. 앞으로는 학교수업도 신경 써서 듣자. 알았지?”
선생님은 언제나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얘기하신다. 근데 가끔은 이게 더 짜증난다. 괜히 더 스트레스 받는다. 이럴 때는 차라리 시원하게 매라도 맞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신이 확 들어서 공부할 것 같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다니, 나 스스로도 참 이해가 안 간다.
‘아니 넌 왜 공부는 죽어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는 받는 거야?’
공부를 잘하든지 못하든지 스트레스는 받는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학생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공부를 많이 해서 오는 스트레스는 아닌 것 같다. 학생이라는 신분 자체가 가지는 틀과 형식에서 오는 것 같았다. 선생님의 말씀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겨우 상담이 끝났다. 교실에 올라가니 5교시 수학 수업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서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내 하루는 늘 그랬듯이 평범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그런데 오늘은 좀 달랐다.
2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바닥에 웬 소포상자가 떨어져 있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자유.’
우편번호도, 보낸 이도, 받는 이도 적혀있지 않았다. 그저 손바닥 크기의 상자에 적혀있는 거라곤 이게 다였다. 어차피 주인도 없어 보이는 물건 같아서 난 아무 고민 없이 그 소포를 집어 들었다.
소포상자에 들어 있는 건 그냥 볼펜이었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흰색과 검정색만 들어가 있는데 시중에서 가장 싼 값에 팔리는 것들과 비슷하게 생겼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상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 그런 싸구려 볼펜이라고 하기에는 부드럽고 성능이 좋은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옆에 꽂혀있던 1학기 기말고사 시험지를 꺼내서 한 줄 쭉 그어본다.
“스으으으으윽”
“이거 정말 좋다.”
그런데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든다. 다시 펜을 잡아본다. 선을 그으려 볼 포인트를 시험지에 가져가던 그 순간, 내 눈에 환영 같은 것이 비친다. 시험 문제 위에 숫자가 하나씩 하나씩 떠다니는 게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그 숫자는 놀랍게도 시험지에 정답이라고 체크되어있는 숫자다.
‘내가 요즘 너무 고생했나보다. 이젠 헛것이 다 보이다니.’
그래도 속으로는 이게 사실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펜을 다시 시험지로 가져가본다. 몇 번이고 반복해본다. 몇 번이고 종이에 가져다 대본다.
“이거어어…… 정말 좋다!”
3
오늘은 학원에서 평가고사를 보는 날이다. 요 녀석을 시험해보기로 한다. 아직은 반신반의 하는 마음이지만 집에서는 몇 번이고 시도해서 모두 성공했다. 학원 차에 올라타며 생각한다.
‘이게 밖에서도 된다면 대박이다.’
차안의 모습은 언제나 날 짜증나게 한다. 아이들은 차 안에서도 단어외우기에 열중이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들를 새도 없이 학원으로 향하지만 그 차 안에서조차 학생들은 여유를 가질 수 없다. 난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싫어서 일부러 차 안에서는 책을 보지 않는다. 항상 음악을 들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그런데 저번 주 부터는 이것도 힘들게 되고 말았다. 학원에서 차 유리창이 있는 자리에 커다란 현수막을 붙여 놨다. 잔인한 놈들……. 안에서도 희미하게 그 내용이 보인다.
‘강동구 최다 37명 S대 합격! 최고의 학습시설 최고의…….’
도대체 몇 년 동안 37명을 S대에 보냈다는 건지는 나와 있지도 않다. 내가 생각할 때 한 오륙년은 합쳐서 37명일 거다. 순진한 학부모님들은 작년 한 해에만 37명을 보낸 줄 아시겠지. 내 생각에 이건 완전한 과대 포장광고다.
학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까 좀 살 것 같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또 숨이 막혀온다. 길 건너 보이는 7층짜리 회색 건물. 사거리 곳곳에 세워진 학원차량에서 내리는 수많은 아이들. 또 그 아이들의 긴 행렬. 그 모습은 마치 겨울을 날 채비를 하기 위해 식량을 구해서 그것을 개미집으로 운반해오는 일개미들 같다. 난 일개미가 되는 게 별로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일부러 아이들이 줄지어 다니는 길을 피해 빙 돌아서 학원에 들어간다. 학원 입구에서 내 핸드폰을 출석기계에 찍는다. 이렇게 하면 부모님의 핸드폰으로 내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간다. 정보화 사회 한번 끝내주게 좋다.
담당 선생님이 시험지 다발을 들고 교실에 들어오신다. 그리고 드디어 시험지가 배부된다. 나는 필통을 열어서 펜을 찾았다. 그리고 시험지에 가져갔다. 천천히.
‘보인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숫자들. 하늘이 내가 열심히 사는 걸 알고 이렇게 축복을 내리시는구나. 나는 거침없이 답안을 작성했다. 시험시간으로 주어진 시간은 2시간인데 답안을 모두 체크하는데 걸린 시간은 채 3분이 되지 않았다. 나는 보험이라는 생각으로 직접 몇 문제를 풀어봤다. 역시나 정답이 확실한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남의 빈 집에 들어온 좀도둑이 된 기분이었다. 집을 터는 사이 집주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나는 숨죽여 장롱 속에 숨어있는 그런 기분. 나는 문제를 다 풀었지만 남은 시간동안 계속 문제를 푸는 척 해야만 했다. 손이 떨려서 쥐었던 펜을 몇 번이고 책상에 떨어뜨렸다. 차마 눈동자도 들지 못하고 시험지를 응시한 채 그저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린다. 시험을 칠 때는 항상 모자랐던 시간인데 이렇게 손 놓고 기다리자니 두 시간은 참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몇 가지 잔꾀를 내어 몇몇 문제를 일부러 틀리게 체크했다. 그러다 보니 서서히 죄책감은 사라져갔고, 나는 승리감에 젖어갔다. 이제 곧 시험은 끝날 것이고 내일 내 이름은 이곳 1층 카운터에 붙어있을 것이다.
‘XX학원 평가고사 성적상승 부문 1위 김영호.’
매번 평가고사가 끝날 때 마다 카운터에는 몇 가지 부문을 정해 1위부터 3위까지 이름을 걸어 놨다. 어차피 내 이름은 걸리지도 못할 거 매번 볼 때마다 속으로 욕만 해댔다. 하지만 막상 내 이름이 걸릴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다. 갑자기 이 펜을 주웠을 때 포장지에 적혀있던 문구가 생각났다.
‘당신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래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다. 난 이놈을 한번 잘 써보기로 다짐한다. 나에게 두려운 건 없다. 이제 손이 떨리지 않는다. 심장도 쿵쾅거리지 않는다.
4
꿈같은 몇 주가 지나갔다. 나는 그동안 학교에서 본 수행평가 2개에서 만점을 받았고, 만점을 받은 사람은 우리 반에서 나와 진헌이 둘뿐이었다. 학원 1층 카운터에는 내 이름이 대문 짝 만하게 적혔다. 그 옆에는 진헌이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진헌이는 성적 우수자 부문 1위였다. 나와는 차원이 다른 부문의 상이었지만 진헌이와 이름을 나란히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경험이었다. 물론 언제든 저 진헌이의 이름을 내리고 내 이름을 올릴 수도 있지만, 이정도만 해도 대만족이었다.
학교와 학원에서의 일이 있은 뒤로 진헌이는 부쩍 나에게 친절해졌다. 공부에 대한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고, 노하우도 알려주었다. 물론 새겨들을 필요 따위는 없었지만, 나는 언제나 경청하는 척 했다. 그토록 친해지고 싶어 했던 진헌이인데 마다할 필요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랑 진헌이는 그렇게 친해지기 시작했다. 준호와 준석이는 요즘 나한테 성적 향상의 비법이 뭐냐고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따라다닌다. 은근히, 아니 대놓고 나를 부러워하는 눈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헌이가 말해줬던 비법들 중 머리가죽에 붙어 아른거리는 몇 개를 말해줬다. 근데 하도 흘려들어서 그런지 생각나는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준호와 준석이는 고맙다고 받아 적는다. 이런 기분은 태어나서 처음이다. 이제 시험도 두렵지 않다. 내 생애 중간고사가 이렇게 기다려진 적은 없었다. 시험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하고 이틀이다. 남은 시간동안 독서실 간다고 하고 피씨방에서 게임이나 해야겠다.
5
대망의 중간고사 첫째 날 아침이 밝았다. 난 오늘 무슨 과목을 치는지 모른다. 가방에는 필통 하나만 달랑 들어있다. 그리고 필통 안에는 그 볼펜과 컴퓨터용 사인펜 이렇게 두 개만 들어있다.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다. 일요일 하루 쉬고 다시 하루, 이틀이 지나 시험이 끝났다.
주요과목은 모두 90점대 초반으로 치고, 나머지 과목은 모두 80점대 후반으로 쳤다. 결과는 정확하다. 확신할 수 있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이번 시험이 특별히 어려웠다고 난리다. 하지만 그런 건 나한텐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늘 평균 90대 중반을 받던 진헌이에 이어 반 2등 어쩌면 전교 2등을 할 것이다. 달라진 내 모습에 모두가 놀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제는 성적표가 기다려진다. 선생님께 내려가서 성적표는 언제쯤 나오는지 여쭤봤다. 이주일은 걸린다고 하신다. 그러면 꼬리표는 언제쯤 나오는지 여쭤봤다. 꼬리표는 늦어도 일주일 안에 나올 것 같다고 하셨다. 꼬리표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교실로 올라가서 진헌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번시험이 어렵긴 했어. 그치? 나도 90점 겨우겨우 넘었다니깐!”
웃으며 말했는데 왠지 진헌이는 표정이 좋지 않다. 내가 뭐 실수라도 했나?
6
꼬리표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나는 바뀌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다니는 준호와 준석이가 눈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영호야, 영호야, 하면서 졸졸 따라 다니는 게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안 그래도 요즘 진헌이 기분이 별로인 것 같아 보여서 마음이 거슬리는데, 이 녀석들이 나를 더 짜증나게 한다. 그 때 준호가 팔로 내 목을 감아 돌리면서 말을 건다.
“영호야!”
나는 뿌리쳤다.
“탁”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 거야? 이제 제발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건 그만둬. 이제 나와 넌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알아?”
말 해 놓고 내가 더 놀랐다. 3년 지기 친구에게 이렇게 험한 말로 상처를 주다니. 그런데 마음과 다르게 내 입에서는 계속해서 험한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미 수습하기에는 늦어버렸다. 준호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은 채 내 말을 듣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너무 미안했지만 그 녀석들이 나를 짜증나게 한 건 사실이었다. 나는 내 자리에 앉아 한참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일부러 마음을 독하게 먹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앞으로 더 멋진 친구들도 많이 만날 수 있을 텐데 준호와 준석이는 나에게 짐만 될 거야. 그래 차라리 잘 된 거야. 이제부터는 나도 내 수준에 맞는 친구들을 만나야지.’
다음날, 드디어 기다리던 꼬리표가 나왔다. 내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꼬리표를 받아들고 내 자리로 와서 앉았다. 역시 내가 계산했던 점수가 그대로 나왔다. 진헌이도 꼬리표를 받아왔다. 내가 장난삼아 흘끗 쳐다보자 불같이 화를 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보지 마!”
당황할 시간도 없이 담임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영호는 선생님한테 잠시 내려오세요.”
“예.”
나는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내려갔다.
“영호가 정말 공부하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구나. 선생님이 10년이 넘게 교직생활을 했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정도로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어. 새삼 사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느껴지는구나. 이렇게 잘 할 수 있는 녀석이 지금까지는 왜 그런 거야?”
“하하 그러게 말이에요. 진작에 마음만 먹었더라면 더 좋은 성적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요.”
“그러게 말이야. 요즘 들어 영호가 성적도 오르고 성격도 활발해진 것 같아서 선생님도 기분이 좋단다.”
“다 선생님 덕분이죠 뭐.”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웃음이 나온다. 이건 선생님 덕분도 내 마음가짐 덕분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 교복 안주머니에 꽂혀있는 한 자루 펜. 그냥 그거 하나 덕분이다.
“자, 이게 우리 반 성적일람이야.”
“아, 네…”
“영호가 평균 88.67로 우리 반 1등을 했어. 이 점수가 전교 1등이기도 하고.”
이건 무슨 소린가? 내가 전교 1등이라니? 이건 예상하지 못한 결과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고 뭘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이렇게 한꺼번에 성적을 올리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시험 난이도가 전체적으로 높아서 이번에는 평균 80점 이상도 전교에 열 명 정도 밖에 안 되는 구나. 어쨌든 축하하고, 선생님은 영호에게 정말 놀랐단다. 1교시 곧 시작하겠다. 그만 올라가봐.”
이 정도면 선생님도 내가 부정행위를 했는지 의심해 볼만한 성적인데, 그런 말씀은 한마디도 없으시다. 하긴 우리학교가 시험보안이 철통이기도 하고, 컨닝으로 전교 1등을 한다는 건 불가능 하니까. 그리고 방금 전 한 가지 해답이 풀렸다. 왜 진헌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지. 왜냐하면 내가 자기를 이겼으니까.
7
“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어서 일어나 아침…….”
“뚝”
이제 이 소리가 채 한 번이 끝나기도 전에 일어난다. 밖에서 재촉하는 엄마의 목소리도 없다.
“잘 먹겠습니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의 양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달라진 점이라면 내가 꾸역꾸역 다 먹었다는 것이다.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에 치약을 묻힌다. 치약은 조금만 짜도 충분하다. 양치질을 하면서 바라본 거울 속 내 모습은 어떻게 보면 잘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다녀오겠습니다.”
현관문은 가볍게 천천히 닫는다. 오늘은 왠지 엘리베이터도 이미 우리 층에서 대기 중이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두 달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진헌이는 내게 말이 없다. 내가 말을 건네도 언제나 ‘어’, ‘아니’ 단답형으로만 대답한다. 그리고 준호와 그 일이 있은 후로 준호, 준석이와의 관계가 단절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 교실에서 친구는 이제 없다. 가끔 혼자서 급식을 먹다보면 내가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들은 나와 레벨이 다를 뿐이다. 녀석들보다 그릇이 크다는 게 전부였다. 집에서의 내 위치는 성적표가 나온 이후로 나날이 높아져갔다. 부모님은 이제 독서실에 간다고 밖에 나가도 전혀 의심하지 않으신다. 먹고 싶은 것도 말만하면 구해다 주실 정도다. 미안한 마음 같은 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결과적으로 나는 잘 하고 있으니까 상관없다. 나보다 공부를 잘하던 동생에게도 괜히 다가가서 이것저것 가르쳐준다. 예전 같으면 방해하지 말라고 소리칠 녀석이지만, 이제는 내 말도 제법 열심히 들어준다. 지난달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수학경시대회에도 참가하고 왔다. 결과는 만점이었다. 역대 만점이 단 한 명도 없었다기에 내가 최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했다. 참가신청서에 붙여냈던 내 증명사진은 ‘수학천재소년의 등장’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에 실렸다. 그리고 이제 나는 학원에 돈을 벌러 다닌다. 더 이상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끊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오히려 그쪽에서 나에게 제의가 왔다. 한 달에 100만원을 줄 테니 학원에 계속 다니라는 것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나는 그 조건대로 각종 잡지사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성적향상의 비법 같은 건 없습니다. 그저 XX종합학원을 꾸준히 다녔을 뿐이에요.”
내가 이렇게 대담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오직 시험으로만 평가받는 이 세상에서 나를 말해주는 건 시험점수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시험점수만 좋다면 다른 건 필요 없이도 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검증과정이라고 할 만 한 건 없었고, 점수통지표 하나면 만사형통이었다. 난 상위권이라는 녀석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인사가 되었다. 숱한 인터뷰의 주인공이자, 학원 차에 대문 짝 만하게 붙은 현수막 속 얼굴의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아줌마들이 나를 더 잘 알아본다. 역시 우리나라 치맛바람은 알아줘야 한다. 각종 교육 자료를 얼마나 찾아 뒤졌으면 특별하지도 않은 내 얼굴을 한 번에 알아보실까? 한번 크게 놀라게 해드릴까? 이번 기말고사에서는 평균 100점을 한번 받아봐야겠다. 사흘 남았구나.
8
“빰빰빰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어서 일어나 아침…….”
“퍼억 탁”
손바닥으로 너무 세게 쳤나보다. 자명종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파편이 중지 가운데를 찢고 지나가서 피가 난다. 휴지를 대충 뭉쳐서 지혈하고 부엌으로 간다.
“잘 먹겠습니다.”
역시나 엄청난 양이다. 그래도 엄마가 해주는 밥은 맛있으니까 다 먹는 게 그리 힘들지 는…
“욱! 엄마 밥에 돌이!”
엄마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씀하신다.
“어? 밥에 돌이 들어가 있다고? 요즘은 웬만해서는 돌이 없는데 이상하네…… 그래도 엄마가 쌀 좀 더 깨끗하게 씻을 걸 잘못했구나.”
“엄마, 밥 말고 다른 거 없어?”
“엄마가 미숫가루 타줄게 이거라도 먹고 가.”
“아, 안 먹어. 나 그런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화장실에 들어가서 칫솔에 치약을 짠다. 근데 치약이 더 이상 안 나온다. 치약이 없다.
‘아 기말고사 첫날부터 기분 나쁘게 뭐야.’
대충 입안을 물로 헹구고 집을 나선다. 오늘은 인사하고 갈 기분이 아니다. 문도 일부러 세게 쾅 닫고 간다. 엄마가 왜 그랬냐고 물어보면 그냥 짜증나서 그랬다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9
시험지가 막 배부되고 있던 차에 교실에 도착했다. 감독관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제자리에 가서 앉으라고 하신다. 예전 같았으면 마구 화를 내셨을 분이다. 공부 좀 하니 좋기는 좋다. 시험지가 배부되기 전에 내 보물을 꺼내기 위해 나는 가방에서 필통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필통은 보이지 않는다. 비좁은 가방이지만 구석 어딘가에 필통이 끼어 있을까봐 샅샅이 뒤졌는데도 필통은 없다. 당황해서 시험지가 배부된 줄도 몰랐다. 감독선생님께서 큰 소리로 화를 내시며 내 쪽으로 뛰어오셨다.
“너 뭐하는 짓이야! 시험지 배부된 거 안보여?”
“……”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빨리 가방 내려놓지 못해!”
“……”
“어허 이 녀석 봐라. 셋 셀 동안 가방 내려놓지 않으면 당장 학생부로 끌고 간다!”
“……”
“하나.”
“……”
“둘.”
“……”
“세……”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내려놓는다.
“털썩”
“빨리 준비하고 시험 쳐!”
아무리 생각해봐도 필통에 대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시험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나는 시험에 집중하기는커녕 온통 그 필통 생각뿐이다. 나는 머릿속으로 어제 하루 나의 일과를 되새겨본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간식을 먹다가 학원 가방을 챙겨서 학원으로 갔지.’
학원 가방을 챙길 때 필통을 본 기억은 확실하다. 계속 생각해본다.
‘학원에서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잠들었고, 바로 오늘 아침이었지.’
그런데 오늘 아침에 필통을 본 기억은 도무지 나질 않는다. 그렇다면 결론은 났다.
‘학원이다! 거기서 필통을 잃어버린 거야.’
일단 내 필통을 잃어버린 장소는 알아냈으니 우선은 눈앞에 닥친 시험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 집중력을 잃어버린 내게 시험문제가 눈에 들어 올 리는 없었다. 그 때 언젠가 책에서 본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야생의 원숭이가 어느 날 우연히 신발을 신게 되었고, 한번 신발을 신게 된 원숭이는 그 푹신함과 편안함에 빠져 다음부터 맨발로 숲을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였다. 지금 내 꼴이 완전히 원숭이였다. 한번 그 펜의 달콤함을 맛본 나는, 더 이상 내 힘으로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첫째 날 시험은 끝났다.
그날 이후 나는 미친 듯이 학원을 뒤지고, 내 필통을 수소문 했지만 모든 일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둘째 날, 셋째 날… 마지막 날 시험까지도 그렇게 끝이 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차라리 하늘이 무너지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10
중간고사로 흥한 나는 기말고사로 망했다.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은 끝없이 이어졌고, 내 성적에 관한 소문은 이미 학원에까지 펴졌다. 내 성적 하락에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는 사실을 안 학원은 이제 학원을 다니는 것은 내 자유라는 연락을 해왔다. 다시는 얼굴을 들고 그곳으로 못 들어갈 것 같아서 끊어버렸다. 현수막에는 내 얼굴이 내려가고 대신 진헌이의 얼굴이 올라갔다. 가족들에게는 성적표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대충 얼버무렸다. 친구들은 여전히 내게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진헌이는 그 반대였다. 하지만 이제는 웃는 얼굴로 다가와 거짓 위로를 건네는 그 녀석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때 생각난 건 두 사람 뿐이었다.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준호와 준석이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뭐하고 있었어?”
“……”
“와 사커매거진 1월호가 벌써 나왔어? 나도 같이 보자.”
준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받아친다.
“저리 꺼져…….”
나로서는 꺼지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는 준호와 준석이가 시키는 대로 꺼져줬고, 지난 몇 달 불타올랐던 내 인생의 촛불도 그렇게 꺼져버렸다.
11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얻었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난 그 작은 펜의 능력이 마치 나의 능력인 양 행동했고, 가족을 속이고 친구를 속이고 무엇보다 내 자신을 속이는 파렴치한 행동을 했다. 눈 앞의 것에 홀려 한 치 앞의 일조차 내다보지 못했고, 나를 원숭이로 만들어버린 그 펜과, 그것으로 얻은 가짜 영광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모든 진실을 깨닳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이런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젠 모든 것이 부질없이 느껴진다. 진실을 깨달았지만 뭔가 아득한 느낌이 든다. 그냥 이렇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어질어질 아파오기 시작했고, 눈꺼풀은 눈동자의 굴곡을 따라 호를 그리며 서서히 떨어진다. 벗어날 수 없는 무기력한 느낌에 교실 책상에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어디선가 날 부르는 목소리 같은 것이 들리기도 한다……
12
“영호야!"
"……"
"김영호! 요 녀석아, 일어나라!”
“퍽!”
“아! 음……”
“이놈은 자습시간만 주면 잠이나 쳐 자고 말이야. 빨리 일어나!”
수학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생각한다.
‘이놈의 망할 인생은 가만히 잠을 자는 것조차 못하게 하는 구나.’
그 때 준호와 준석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 쟤 더 맞아야 돼요.”
“시원하게 등짝을 한 번 더 갈기셔야죠. 히히히”
이건 무슨 상황인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정신없는 와중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다.
“중간고사가 눈앞인데 김영호군은 이렇게 세상만사 모르고 취침을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정신들 똑바로 차리시고 이런 무식한 행동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기말고사 끝난 지가 언제라고 벌써부터 중간고사 타령이신지……. 나는 선생님께 대꾸한다.
“괜히 이제 고3이라고 오버해서 말씀하시지 마세요. 그래봤자 삼 개월은 남았어요.”
“허허. 이 녀석아, 너 꿈꿨냐?”
선생님의 말씀에 사방에서 웃음이 터진다. 갑자기 머리가 빠르게 회전한다.
‘꿈? 꿈이라고? 잠시만, 이게 모두 꿈이었다는 건가? 그래 꿈이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더니 눈물이 울컥 하고 나오려고 한다. 그만큼 길고 생생한 꿈이었다. 그대로 책상위에 다시 엎드려서 안도감에 젖어들었다.
“퍽!”
“아야!”
“이 자식이 선생님한테 개기는 거야 뭐야?”
나는 수학시간 이후로 학교가 끝날 때 까지 준호, 준석이에게 내가 꾼 꿈 이야기를 해줬다. 계속해서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준호, 준석이를 배신한 그 부분에서는 특히 더 그랬다. 그리고 짝 진헌이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꿈속의 진헌이는 그리 멋진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13
학교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정말 놀라운 일이 펼쳐진 하루였다. 꿈 속에서의 내 모습과 수학시간의 내 모습을 번갈아 상상해보며 혼자서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어! 저건!”
아스팔트 위에 떨어져 있는 저 소포는 분명히 꿈에서 본 그것이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번에도 당신이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선택은 당신의 자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꾼 건 꿈이 아니었던 건가?’
아니다 그건 꿈이 확실했다.
‘그럼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난 이 소포는 대체 뭐란 말인가?’
하지만 그 순간에 나는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냈다. 오늘 꾼 꿈에서 배운 사실이었다. 더 이상의 의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나는 소포를 다시 한 번 잘 살펴봤다. 크기며 색이며 모양이며 모두 다 똑같았다. 적혀있는 문구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지만, 꿈에서 본 그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꿈과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나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소포를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렸다.
“………… 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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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여름방학 때 연세대 백일장에 출품했던 소설입니다.
고등학생만이 참가 가능한 백일장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필요 이상으로 어려운 수준의 어휘와 문학적 효과를 사용하는 모습이 제가 볼 때는 어색하게 느껴져서....
제 때 제 뜻을 가진 어휘를 사용하는데 고민하느니 최대한 쉬운 말로 최대한 학생답게 최대한 간단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쓴 글입니다.
그래서 다소 유치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구요^^
결과적으로는 1차 예선에서는 합격하고 2차 본선에서는 입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고3 시절의 추억이 서려있는 글이기에 이렇게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