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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최고의 지도자로 꼽혔던 자, 여운형
게시물ID : humorbest_6756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스팸메일차단
추천 : 67
조회수 : 3404회
댓글수 : 1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5/12 16:51:58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5/12 01:24:00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05.25 ~ 1947.07.19]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  당시의 시대를 가장 잘 파악하고 외교술에 능했던 자.

 

1945년 8월 초.(아마 광복 3일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네이버 기관단체사전에서는 당일날 아침 8시로 서술하였습니다.) 총독부 정무총감인 엔도 류사쿠(遠藤降作)가 여운형의 집에 찾아왔다.

"잠깐 할 말이 있소."

여운형은 당황했다. 그는 44년 8월부터 조선건국동맹이라 하여, 일본의 패망에 따른 해방 후의 조선 건국을 준비하는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 활동이 들켰을까 하는 마음이였다. 변절을 요구하면 어째야하나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엔도는 뜻 밖의 말을 전했다. 곧 있으면 일본에서 무조건항복을 한다는 것이였다. 그들이 무조건적 항복을 하면, 조선 내에 거주중인 모든 일본 인사들과 군인들은 일본으로 돌아가야하는데, 36년의 통치를 당했던 조선 백성들이 이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기에, 엔도가 급하게 찾은 것이였다. 여운형은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가장 신망받는 사람이였으므로, 여운형이 백성들에게 그들을 놔두자고 하면 놓아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운형도 그냥 보내줄 수는 없었기에 조건을 걸었다. 모든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 경성(서울) 시민이 당장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확보해줄 것, 치안 유지와 건국 사업에 대한 간섭 배제, 학생과 청년 활동에 대한 간섭 배제, 자주적인 치안 유지 등 5개 조건을 제시했다. 이 협상을 통해서 일본군은 무사히 물러나고 여운형은 치안 유지와 재건을 위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하게 된다.

 

 

 

 

 

 

여운형은 일본 총독부에서 이렇게 찾았을 정도로 조선 내에서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자입니다.

생애 같은 것은 그냥 넘기고, 그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신한청년당이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네, 신한청년당하면 김규식이 떠오를 것입니다.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고 신한청년단을 발기한 사람이 여운형이라고 하는군요.

또, 1920년에 고려공산당에 가입을 합니다. 고려공산당이라고 하면 1920년 12월, 그러니까 잘 아시는 청산리 대첩과 봉오동 전투가 끝나고 일본이 한 번 보복을 한 뒤에, 힘을 합치자는 의미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합니다. 쪽바리들을 피하다가 자유시로 가게됩니다. 이 곳에서 크게 두가지의 일이 생기는데요. 외적으로는 러시아가 무장해제를 요구합니다. 또 두번째로는 상하이 고려공산당파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 간의 내부 갈등으로 인해서 갈라지게 됩니다. 결국 러시아가 우리 독립군을 무자비하게 쏴 죽이고 또 내부적 갈등으로 인해서 와해되는데요, 이 때 나오는 고려공산당파를 의미합니다. <그냥 근현대사 배울 때 나오는 거라서 설명해봤어요...>

 

고려공산당이 와해되고 나서, 어찌저찌 하다가 중국의 쑨원과 공산당들과 친해져서 중국혁명운동을 하다가, 이마저도 실패하고 맙니다. 그리고 몇년 뒤인 1929년 일본에게 잡혀 옥살이를 하게됩니다. 1932년에 출소를 하게 되죠.

 

출소를 한 후에!!! 그는 중앙일보 사장으로 취임을 하는데요. ㅋㅋㅋㅋㅋㅋ 여기서 아주 귀여운 사건 하나가 터집니다.

1936년에 베를린올림픽이 열린건 아시죠. 이 때 우리나라의 레전드 손기정 선수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데 왜 대한민국이질 못하니.. 아흐흐... 어쩐지 오늘은 발걸음이 빠르더만... 하게 됩니다. 평소에 중앙일보사는 자금난으로 허덕여서, 인쇄불량이 빈번히 발생했던 신문사였습니다. 중앙일보에서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전하려고 신문을 썼는데 일장기가 빠진 채 인쇄가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인쇄불량이냐 의도적이였냐하다가 폐간되게되었습니다.... 이것이 일장기 말소 사건입니다.

 

이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맨 앞에 썻다시피 건국동맹과 건준위를 설치하게됩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을 하면 자주적인 조선을 세우려고 했었지만, 내부에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외세가 개입하면서 자주적인 국가 건설을 꿈꿔왔던 여운형 선생님에게는 큰 시련이 옵니다. 미국이 한반도에 진출하려고 하자 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합니다. (인민이 전혀 잘못된 말이 아닙니다. 김정일 개새끼.) 하지만 미국이 남한 내의 모든 단체를 부정해버리면서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 것이 무산이 되고, 더불어 김구 선생이 이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부정되어 김구선생이 입국할 때는 임시정부 주석의 지위가 아닌 민간인의 지위로 입국을 하게됩니다.....

 

이렇게 자주적인 국가 건설이 수포가 되고 제1차 미소공위가 열리는데 여기서 협상이 결렬이 됩니다. 그러자 이승만 개새끼가 단독정부 발언을 정읍에서 하게됩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서 김규식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미군정이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하면서 큰 호응을 얻을려고 합니다.

 

사실 여운형이 신망받는 지도자로 부상을 하면서 수많은 극우파들에게 암살 위협을 당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거처에서 돌아다니면서 지내다가, 옷을 가지고 오려고 잠시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들어옵니다. 옷가지만 빨리 가지고 나와서 차를 다시 타고 나왔는데, 양쪽 골목을 차로 누가 막아버리는 겁니다. 이때 여운형은 아차 했습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현실로, 극우파 한지근이라는 씨벌새끼때문에 여운형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였습니다.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나서, 좌우합작위원회도 흐지부지하게 되어버립니다.....

 

 

 

여운형이 얼마나 대단했냐면요, 독립운동가로는 특이한 이력도 보입니다.

1946~1947년에 제11대 조선체육회 회장을 지내셨구요.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이후에는 체육부 코치로 지내셨다고 합니다.

키도 엄청 크셨구요, 등빨도 장난 아니셨습니다. 얼굴도 괜찮지 않습니까????

이런 여운형의 엄청난 피지컬의 영향을 그대로 딸들이 물려받게 됐습니다.

 

 

여운형이 만약 암살당하지 않고 좌우합작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더라면... 어땠을까요???

참 아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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