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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만약에
게시물ID : humorbest_67607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정디
추천 : 17
조회수 : 3703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5/13 10:53:37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5/11 21:09:31
(우리는 만약이라는 상황이 있어서 희망과 가능성의 나무를 창조할 수 있다)
         -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금 어떤 건물에 들어가는 이 여성의 이름은 이 유정이며, 올해 만 19세로 성인이 되었다. 그녀는 노란 단발머리에 반팔 티와 짧은 바지에 컨 버스 화를 신고 있었고 밖은 작열하는 태양이 더위를 미칠 듯이 토하고 있는 복날 한 여름의 낮이었다.
 
이유정은 스멀스멀 배어나오는 땀을 손으로 씻어내면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왼손으로 들고 있는 쪽지를 보며(오층이라 했지? 그래, 삼층만 더 오르자)라고 속으로 약속을 했다. 그런 그녀가 가고자 하는 곳은.......

 “만약을 살고 있는 당신을 위해 한층 더 크고 한층 더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는 곳 (만약 스테이트)지.”
 
그녀가 (만약 스테이트)를 가고자 하는 이유를 따지고 들자면 지긋지긋한 삶을 외면하고 만약을 찾으러 간다고 해야 하겠지만 그건 하나의 변명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만약 스테이트)를 가고자 하는 하나의 명쾌한 이유는(하나의 재밌는 휴가 또는 경험을 하고 싶어!)라고 들겠다.
 
사층을 오르고 마지막 오층이 끝이 나고(만약 프라이스)라는 문구가 붙은 문이 보일 때 그녀가 감격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 이유는 찌는 듯한 더위에 한 층마다 오십 블록이 있는 계단을 올랐기 때문이다.
 
"여긴 엘리베이터도 없어요?"

그녀가 (만약 프라이스)의 문을 열고 외치려고 한 소리였지만 그럴 용기는 눈앞의 상황에서 꼬리를 내리고 도망쳐 버렸다. 그 말은 즉, 눈앞에 수염을 해그리드 마냥 국수면발 같이 쭉 늘어뜨리고 인상은 울긋불긋 무서운 동네 아저씨 풍의 남성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자기소개를 겉모습에 맞지 않게 방정맞게 하였다. 

"만약 프라이스에 오신 걸 환영해요! 이 유정님이 첫 고객입니다! 아, 참 제 소개를 잊었네요. 저는 뭐, 이 회사에서 비서역할을 맡고 있는 이 성각이라고 합니다만 뭐, 비서라고도 할 수 없는 게 ......."

이유정은 방정맞고 앞 뒤 안 맞는 비서가 매우 괴상하고도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호랑이가 토끼 앞에서 탭댄스를 추는 꼴이니 말이다.
 
그는 회의실로 따라 오라하고 그 곳까지 갈 때 쉴 새 없이 수다를 해서 이 유정을 당황스럽게 했다. 회의실에 도착해 의자를 뺄 때도 책상다리에 무릎을 부딪쳐 비명을 질러 그녀를 놀래기 까지 하였다. 커피까지 탄 이 성각은 머그컵 한잔을 그녀 앞에 놓고 다른 한 잔은 후루룩 마시면서 의자에 앉았다. 그가 손을 장난스럽게 움직이면서 이 유정에게 물었다.

 “음....... 유정 씨는 만약의 상황을 보고 싶으셔서 우리 회사에 오신 것이겠죠?”
 
그녀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만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럼 먼저 이 동의서에 사인부터 해주세요.......”

그는 말을 더 이으려고 했지만 너무 뜨거운 커피를 한 번에 들이키는 바람에 정수기로 달려가 찬물을 마셔야만 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다음 그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덤벙대죠. 성격이 그래서 말이죠. 제가 또 성격이 왜 이렇게 되었냐 하면요.......” 
“여기 사인 다 하고 조항도 읽어봤어요.” 

그녀가 말을 잘랐다. 비서는 고맙다는 듯이 싱글벙글 웃었다.

 “우리 회사가 말이죠. 어제 창설 되서 말이죠. 고객 분이 아무도 없으셔서 걱정했는데 또 어떻게 알으시고 오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요. 그래서 첫 고객 분이시니 비용은 전액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이유정은 그럼 이게 무료가 아니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속으로만 묻어 두었다.

 “우리 회사가, 아니 너무 작아서 회사라고도 할 수 없네요. 아무튼 우리 회사가, 만약의 상황을 경험시켜드리는 회사니깐 그에 걸맞게 한층 더 품격 있고 한 층 더 즐겁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한층 더 크고 라고 수정하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 역시 속으로 묻어 두었다.
 
“말이 없으신 걸 보니 혈액형이 A형이신가 봐요? 저도 A형인데 말입죠. 하하.” 

(말이 없는 것이 A형인데 당신은 말이 너무 많아!) 그녀는 이제 비서의 재미없는 농담을 무시하기로 했다.

 “아! 이제 만약 타임을 하실 시간입니다. 여기 동의서에 사인도 해주셨으니 말이죠. 자, 저를 따라 오세요!”
 
비서는 뭐가 기쁘다는 마냥, 즐겁게 걸었다. 그런 비서를 그녀는 따라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탕 꾸러미가 들어있는 바구니가 싸구려 그림이 걸려있는 못에 같이 걸려 있었다. 옆에는 누가 보면 배꼽을 잡고 누울 듯, 우스꽝스럽다 못해 괴기스러운 바탕화면이 있는 컴퓨터가 있었다.

 “자, 들어오세요!” 

작은 문구로 (만약의 나)라고 적힌 문을 열고 이 성각이 말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살폈다. 레드카펫이 깔려 있는 바닥과 위에는 샹젤리제에 그 밑에는 안락의자가 있었다. 그리고 검은 탁상 위에는 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다니는 구슬이 놓여 있었다.

 “별 것 없지만, 참으로 훌륭한 곳이죠! 여기에서는 환상적이지 못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걸 겪어요!”

흥분한 그를 무시하고 그녀가 구름이 둥둥 떠 있는 구슬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저 구슬은 뭐에요?”

그러자 비서는 구슬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그것을 아기 만지는 듯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에, 이건 말이죠. (만약 프라이스)의 보물이죠! 만약의 상황을 경험시켜 주는 것이니까요!  앞으로 유정 씨가 겪을 만약을 위해 필수적인 존재죠.”
 
“그 구슬로 어떻게요?”
 
누군가 아주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목소리로 비서가 일단 안락의자에 몸을 묻으라고 권했다. 그녀가 몸을 안락의자에 파묻자 이 성각은 무언가를 감추고 있던 검은색 커튼을 치워내었다. 그랬더니 그 곳에는 하나의 큰 모니터와 무언가를 넣는 구멍이 있는 상자가 있고 그 뒤에 전선이 안락의자와 연결 되어 있었다.
 
그는 갑자기 장난스러운 목소리 톤을 누그러뜨리고 구슬을 들고 그녀 앞으로 가서 저음의 알토로 말했다.
 
“앞으로 이 유정 씨가 겪을 만약의 상황은 제가 들고 있는 구슬에 따라 포근하고 달콤한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위험천만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답니다. 조항 읽어 보셨죠? 외상 후 스트레스나 정신적 질환이 오셔도 저희 회사 측에서 책임을 질 수 없어요.” 

그가 다시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바꾸었다.
 
“뭐, 구슬 마음대로죠!”
 
비서는 말을 끝내고 구슬을 상자 위에 있는 구멍으로 넣고 이유정의 두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셔도 걱정 마세요. 제가 저 모니터로 보고 있다가 구해드릴 겁니다. 그럼 만약의 상황을 즐겨보세요!”
 
그녀는 뭐라 대답하려 했지만 온 몸에서 힘이 빠져 축 늘어지는 바람에 말할 기운도 없게 되었다. 몇 초가 흐른 후 그녀는 주위가 뭉개지는 걸 느끼고 하얀 구름이 손에 만져지다가 어떤 길거리로 떨어졌다.
 
주위를 살펴보니 비서는 온데간데없고 그녀 앞에는 매연만 내 뿜는 차들과 사람들이 지나는 온갖 높고 낮은 건물들만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생김새와 건물들을 보니 서울 이었다.
 
(그렇다면 만약의 상황이 뭐라는 걸까?)

 그녀가 좀 더 자세히 주변을 관찰 해보니 그제야 그 만약의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만약 사람들의 목소리가 없다면)

평소에 소란스러워야 할 명동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없어지고 자연의 소리, 바람소리, 사람들이 걷는 신발소리, 문 여닫는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비행기 떠다니는 소리, 물 뿌리는 소리, 자동차 움직이는 소리, 도둑고양이가 야옹 거리는 소리와 그 밖의 갖가지 소리가 서로 리듬을 맞추면서 흘렀다. 마치 그녀는 모든 것이 평온하고 세상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때 달리는 신발이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유정의 귀를 간질였다. 그 신발의 주인은 소매치기였는데 제대로 면도도 하지 않아 덥수룩해 보였다. 그 젊은 소매치기는 여러 사람들의 어깨를 치면서 달아나고 있었고 핸드백을 소매치기 당한 여성의 목소리나 소매치기범의 목소리나 모든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하이힐의 또각 거리다 마는 소리와 운동화 소리만 더 울릴 뿐 이었다. 소매치기 당한 여성이 불쌍한 점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저놈 잡아라! 소매치기야!)라고 써져 있는 종이를 한 손에 번쩍 들고 범인을 쫓는 다는 것이었다. 이유정은 그녀가 너무 안쓰러워 소매치기 범이 자신 앞으로 달려올 때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핸드백은 약 1.5초 동안 공중에 붕 떴고 범인은 코피가 철철 나 코를 움켜쥐고 있었고 여성은 핸드백을 돌려받았다. 
 
이유정은 핸드백의 주인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더니 물결치는 긴 머리에 온갖 명품 옷들을 치장하고 하이힐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돈은 없는데 명품만 찾아다니네)

그녀가 명품 옷차림의 여성에 대해 결론지었다. 여성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물론 종이에 감사합니다. 라는 글씨를 썼다) 마침 잘 아는 술집이 있는데 한잔하고 싶다고 했다. 마침 어떻게 해야 할 줄 몰랐던 이유정은 순순히 승낙을 했고 경찰들에게 조용히 체포되는 소매치기 범을 뒤로 한 채 술집으로 향했다.
 
그녀들은 어떤 분위기 있는 술집으로 들어가서 의자에 앉았다. 여성은 마치 말하지 않고 종이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펜을 들고 자기가 마실 피노노아 하나를 쓰고 그 쪽은 뭘 드실  거냐는 눈빛을 이 유정 에게 쏘았다. 물론 만19세에 불과한 그녀는 아는 와인이라곤 전혀 없었으므로 그 피니니아 인지 피노노아 인지 헷갈려하며 같은 것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피노노아 두 잔을 내받으면서 여성은 자기 이름이 이 유정 이라고 답했다.

 유정 씨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올해 스무 살이에요
 그럼, 남자친구는 있나요?
 아니요 

정 소리는 글씨쓰기만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글씨가 매우 예뻤다. 몇 가지 사소한 것이 종이 위에서 춤을 추다가 이유정은 왜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 와인 한 모금을 들이 키고 종이에 글씨를 휘갈겼다.

 왜 사람들은 목소리를 잃게 되었죠?

정 소리는 궁금해 하는 문장을 보며 그걸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면서 종이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썼다.

 우리의 본래 목소리가 사라졌기 때문 이죠
 그게 무슨 소리죠? 유정 씨! 정말 몰라요?
 네.......

정 소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장문을 썼다.

우리가 본래의 목소리로 대화하는 걸 잊었기 때문이에요. 휴대폰, 채팅, 텔레비전, 각종 기계음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대신해간다는 것 말이죠. 상담하는 사람들도 휴대폰 하나쯤은 꼭 있죠. 휴대폰이 있다는 자체가 우리 목소리를 기계에 판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가족들의 단란한 시간들은 텔레비전 이라는 바보상자 앞에서 멍하니 같이 보는 것으로 되고 키보드라는 목소리가 우리들의 목소리를 빼앗아 갔어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의 목소리는 여러 가지 도시 음에 파묻히고 각종범죄들이 우리의 소리를 파괴해 가고야 말았죠.

저는 어쩔 때 고양이들이 부럽다니깐 요. 최소한 걔네들은 자기들의 소리라도 자유롭게 낼 수 있잖아요?

이유정은 그 문장을 보면서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짓고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모든 것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였다. 첫 번째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야기를 같이 썼던 정소리가 녹아내리고 술집과 술을 마시던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두 번째로 녹아내렸다. 그녀는 너무나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녹아내렸던 것들이 구름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장소가 바뀌는 걸까?)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구름들은 초록색 풀밭과 중세시대 옷을 입은 곱슬머리의 남성으로 변했다. 곱슬머리 남성은 딱 보아도 중세시대 유럽 쪽 사람 같이 보였다. 이유정은 장소가 바뀌는 것에서 충격이 바뀌는 것이 후폭풍으로 지나간 후 하나의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은(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이였다. 남자는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본다는 듯 외치기 시작했다.
 
“줄리엣! 뭐해요? 어서 도망쳐야죠.”
 
여기서 딱 보아도 그 만약이라는 것이(만약 세상이 소설 속의 세계라면)이라고 짐작이 가겠지 만은 그런 경우가 아닐 수도 있으니 그녀는 묵묵히 침묵하다가 그 로미오라는 작자한테 손목이 이끌려 어디론가 냅다 달리기 시작하였다. 로미오는 이 유정, 아니, 줄리엣의 손목을 잡고 풀밭 사이로 달리다가 어느 바닷가를 발견 하게 되는데 그곳 돛단배에 타고 있던 사람은 늙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부셔질 것만 같은 돛단배에서 묘기를 부리는 듯 물고기를 낚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거대한 참치였다. 그럼 또 여기서 그녀는 생각을 할 것이다.(설마 저건 노인과 바다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법사 같은 구름이 그녀 주위를 둘러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구름은, 폐허밖에 안 남은 여러 건물로 바뀌었다. 로미오와 노인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파도가 그녀를 집어먹을 듯이 무서운 속도로 오고 있었다. 
 
(이건 잘 모르겠는데.......)
 
그녀가 생각했다. 하지만 곧 그 생각이 멍청한 짓임을 깨닫게 되고 비명을 지르면서 냅다 달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느낀다. (그건 내버려두고 일단 도망쳐야겠어!) 이유정은 젖 먹던 힘 까지 내어 달리다가 마침 옆에 지하로 가는 계단이 보여 그곳 안으로 기다시피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백발 머리의 주름살 많은 노인이 외쳤다.
 
“거기 처녀! 어서 들어와!”
 
그녀는 사양 않고 매우 빠른 속도로 그가 있는 강철 문안으로 들어갔다. 노인은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문을 재빠르게 닫은 다음에 철로 된 걸쇠를 좌르륵 소리를 내면서 문에 걸었다. 그녀는 혼비백산한 나머지 구석에 헛구역질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아기 우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자기를 구해 주었던 노인은 자신 옆에 앉아 있었고 우는 아기를 달래고 있는 어머니와 초록색 글씨로 (나무)라고 문구가 박혀있는 책을 읽고 있는 교복 입은 안경 낀 소년과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회사를 다녔다고 해도 믿을만한 중년 남성이 소보로 빵을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아가씨 정신이 들어? 비명이 얼마나 기똥찬지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뻔 했다니깐!”
 
노인의 말에 그녀는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대답은 노인 대신 안경 낀 소년이 했다.
 
“해일 5구역이라고 해야겠죠.” “해일 5구역?”
 
이유정이 궁금해 하자 소년은 책장을 넘겼다.
 
“그러니깐 거대한 해일이 5번째로 오는 구역이라는 소리요.”
 
마지막 책장을 넘기고 말을 이었다.
 
“결빙 1구역에서 오셨나? 왜 이렇게 몸을 떠세요?” 그의 말에 그녀는 냉정을 잃고 울부짖었다.
“결빙 1구역은 또 뭐야? 해일이고 결빙이고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성각 씨 빨리 여기에서 저를 꺼내주세요!”

묵묵히 소보로 빵을 먹던 중년 남성이 입 안에 있는 것을 우물거리다가 꿀꺽 삼키고 말했다.
 
“이 성각이란 놈은 누구고, 또 여기서 꺼내달라니 무슨 소리야? 드디어 아가씨가 정신이 나간건가? 내 하나만 불평해보지, 나는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 그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짜증난다는 거지!”
 
상황은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더욱 긴장되었다. 이유정이 그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말을 꺼내려고 할 쯤 아기의 어머니가 말했다.
 
“아가씨, 완전히 다른 세계사람 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이 아주머니가 하나 알려줄게.”
 
이 유정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듣기도 싫다는 듯이 빈정거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에게는 집 같은 건 없어진지 오래됐어. 왜? 자연이 집들을 쓸어갔기 때문이야. 그래, 그것만 하면 바랄 것도 없지. 하지만 말이야, 뉴스에서 봤는데 이것들 때문에 세계 인구가 총 75억 중반에서 1억 2000 명 정도로 줄었대. 그러니깐 90퍼센트 이상의 인간들이 쓸렸다고 하면 맞겠지?” 

그녀는 어렸을 때 시골의 할머니가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줄 때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아. 이곳에는 5분 간격으로 해일이 와. 그래서 해일 5구역. 1구역 분들은 첫 번째 차례가 되시겠지?”
 
이유정은 여기서 탈출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그건 불가능 하다는 걸 느꼈다. 자치 잘못하다 해일에 깔려 묵사발이 될 수도 있고 설사 탈출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죽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식량은 어떻게 하시죠?” 
“정부에서 지원을 해줘. 헬리콥터로 두 달분 식량을 주지. 식량이라고 해봤자 저 아저씨 빵이야. 근데 정부라고 할 수도 없겠지. 세계 대륙들이 물에 잠기고 얼었을 텐데.”

아주머니의 말에 그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헬리콥터가 온다는 소리면, 그들한테 여기서 구해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아주머니는 분노한 듯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우리 영토도 잠긴 마당에 그 헬리콥터에 탄 놈들이 국민들 생각을 할까? 자기 살 영토를 찾는 곳에 급급하겠지. 식량을 배급 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해. 그러고  보니, 식량은 또 어디서 구하는지를 모르겠네.”
 
노인이 아주머니의 말을 자르고 외쳤다.
 
“그렇게 말할 필요도 없어! 이건 다 인간 놈들이 초래한 짓이니깐! 여름에 에어컨 빵빵 틀고 겨울에 사막 같이 보일러 쌩쌩 돌리니깐 그 많던 남극과 북극의 빙하는 아이스크림 빨아먹듯이 쭉쭉 다 녹아서 해수면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쳐 오르고! 그래서 해일이 온 것 아니겠어! 환경을 그렇게 파괴하지 말라고 자연이 똥줄 타게 경고를 얘기 했구먼!” 

그녀는 노인의 외침에 그제야 깨달았다.
 
(만약 인간들이 자연에게 벌을 받는다면)
 
“또 해일 놈이 강림하시겠구먼!” 

그가 외치자마자 철문 밖에서 거대한 해일이 몰아치우는 소리가 공포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자연이 울부짖는 소리 같이 들렸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요?” 

이유정이 무심코 던진 말에 안경 낀 소년이 말했다.
 
“만약, 희망이 있다면 희망이 있겠죠.” 

그가 한숨을 쉬었다.
 
“만약이 있어서 우리는 희망을 가지는 거죠. 그것이 해일이든. 행복한 미래든.” 

말을 끝낸 소년이 안경을 벗고 주머니에서 안경닦이를 꺼내 그것을 닦았다. 안경을 닦고 있는 소년의 마음에는 내포된 의미가 두 가지 있었다.

(그저 희망이라고 보이지 않는 현재를 만약 행복한 미래가 온다면 을 믿는 것, 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는 살아가야만 하는 것.)

노인이 우중충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농담 하나를 꺼냈다.
 
“토끼 한 마리가 있었단다. 그 토끼는 어느 날, 당근 밭을 발견해 좋아서 미치고 팔짝 뛰었지. 그런데 딱 한 가지 안 좋은 점이 있었다. 그 당근 밭에는 호랑이가 있다는 점이었지. 여기서 문제. 토끼는 호랑이가 있든 말든 환장하게 당근을 뽑아먹었을까, 자기 있는 것에 만족하고 당근 밭에서 등을 돌렸을까?” 

안경 낀 소년이 그 문제에 첫 번째로 답했다.

“음....... 글쎄요, 제 생각에는 토끼가 자기 있는 것에 만족할 것 같은데 말이죠.” 
“그럼 넌?” 

중년 남성이 노인의 말에 답했다.
 
“나도 저 녀석의 말에 동감.” 
“아줌마는?” 
“아기 키우는 입장으로서 난 토끼가 당근 안 뽑아 먹을 것 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예쁜 아가씨는?” 

이유정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혀를 내둘렀지만, 결국 그녀도 농담에 끼고 말았다.
 
“저도 토끼가 호랑이한테 잡혀 먹힐까봐 무서워서 당근 밭에 가지 않을 꺼라 생각해요.” 

말이 끝나자마자 노인은 벌떡 일어나서 두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다 틀렸어! 다 편견 주의자구먼! 답은(편견이 없다는 곳에 있다)야. 그 말은 즉 우리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정말로 토끼가 호랑이한테 뜯길까봐 그렇게 좋아하는 당근 밭에 안 가는 것이라고 믿는건가? 잘 생각 해 보라고! 그것은 인간의 사고에서 갖는 편견일 뿐이야! 애초에 토끼는 호랑이 같은 거물을 보지도 못해. 설사, 본다고 쳐도 그 수는 적지. 게다가 그 노란 줄무늬 빤스같이 생긴 거대한 놈이 뭣 하는 물체인지도 모를걸? 토끼는 당근 밭에 가서 신나게 뜯어먹다 호랑이한테 황천길로 인도 되는 거지. 토끼는 그제야 알아. 이 노란 줄무늬 사각형 놈은 나를 잡아먹는 놈이구나! 적수는 나를 알고 나는 적수를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약육강식! 아니, 어쩌면 모르는 것이 약일지도? 원효 대사가 한(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가 떠오르는군! 상관이 있다는 보장은 하지 못하겠지만.”
 
노인의 말을 듣고 있던 안경 낀 소년이 반박했다.
 
“하지만 그 사파리나 동물의 왕국에서 보면 누 떼나 영양 떼, 가젤 떼 들을 보면 동료들이 사자나 다른 포식자한테 먹히는 걸 보잖아요? 그렇다면 다른 동료들은 그것을 기억할 텐데요.” 

노인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마도 그 때는 기억하겠지. 하지만 그들이 풀을 뜯어 먹을 때만큼은 절대 포식자를 기억하지 않아. 내, 그것만은 장담하지! 유혹 앞에서는 인간들도 견디기 어려운데 하물며 이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을 때 우리 귀여운 복슬복슬한 포식자들을 기억할까?” 

그가 백발을 왼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을 재빠르게 이었다.
 
“얘기가 왜 이쪽으로 가는지는 모르겠다만 내, 증언 하나 하지! 에, 그러니깐 지금부터 삼십년 전, 해일은 물론이고 그 개똥같은 것들은 없던 시절, 나는 아프리카를 여행 중이었지. 지프차를 타고 말이야. 그 때 젊음의 열기란! 그래, 그 때 나는 어떤 호수를 지나가고 있었지. 난 거기서 물을 마시고 있는 가젤 떼를 보았어! 얼마나  귀엽던지! 그 뿔에 내 창자가 찔려도 안 아프다 생각 했었어. 그래서 난 사진기를 들어서 그 귀여운 놈들을 찍으려고 삼각대 까지 설치하려고 했지. 그런데 그 때였어! 헐크 같이 생긴 젠장맞을 초록 악어 같은 놈이 우리 귀여운 가젤의 목을 따버린 거야! 나는 그 놈이 서프라이즈 쇼를 시작하자마자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어!  그리고 힘센 놈들한테 까불다가 얻어맞은 것처럼 삼각대고 뭐고 내팽겨 치고 지프차로 내뺐지!”
 
소년이 장문의 말을 끝내 숨이 차 헐떡거리는 노인을 보고 비웃었다.
 
“할아버지 겁쟁이셨군요.”
 
그의 말에 모두가 한번 풋 하고 웃음을 내뱉었다. 얼굴이 시뻘게진 노인은 소년에게 삿대질을 했다.

 닥쳐! 이 안경잡이 놈아!” 

노인이 삿대질을 거두었다.
 
“그래,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했더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모양 빠지게 달아난 다음 날 나는 그 호수로 다시 가보았어. 그 날도 역시 가젤들이 물을 귀엽게 쭉쭉 빨아먹더군! 나는 처음에 그 귀여운 것들이 어쩔 수 없이 악어한테 먹혀가면서 까지 그렇게 물이 없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눈물을 훔쳤었지.
 그런데 잠시 후, 눈물을 훔치는 내가 얼간이라고 느껴졌지. 그 이유는 즉, 그 호수 바로 앞에 큰 물웅덩이 하나가 있던 걸 보았기 때문이야! 나는 여기서, 엄청난 유혹이 눈앞에 평범하고 안전한 것을 개똥만큼 무시 한다는 걸 깨달았어!”
 
열광한 그는 너무나도 흥분한 나머지 기미 박힌 주먹을 휘두르다 모르고 철문을 쾅 내리쳐 욕 짓거리를 내뱉었다.
 
이유정은 노인을 보고 있다가 이 때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했다. 그녀는 몇 초 후 자신이 이곳을 벗어나겠다는 것을 감지했고 여자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점점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가 울리기 시작했고 (이봐! 아가씨 괜찮아요!) 라는 유모의 외침을 끝으로 그녀는 구름으로 바뀌는 안경 낀 소년,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회사원, 우는 아기, 아기를 달래는 유모,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백발의 노인을 차례대로 훑고 정신을 잃었다.


 
“정신 차리세요. 유정 씨. 자 일어나세요.” 

수염이 듬성듬성 나고 덩치는 산만한 어떤 사람이 자기를 일으켜 세우는 걸 본 이유정은 그 사람이 이 모험을 해준 이 성각 이라는 것을 깨닫고 몇 초 후 레드카펫에 먹은 것을 게워냈다.
 
“정말 죽이는 경험을 하셨네요! 보고 있는 저로써도 울음이 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이유정은 속을 진정시킨 뒤 더듬더듬 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거 다시는 안 해요. 정말 이게 가능한건가요? 아니면 내가 꿈을 꿨나요?”
 
이 성각은 곰곰이 생각하면서 턱을 긁기 시작했다.
 
“만약의 가능성과 꿈의 중간 단계라고 해야 할까요, 라나 뭐라나.”
 
그녀로서는 이 모든 것이 짜증나기만 했고 속이 더 불편해지기 시작해 얼굴을 찡그렸다.그 때 이 성각이 말을 이었다.
 
“유정 씨, 당신이 겪었던 일들은 실제로 우리의 사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당신이 겪은 것이 (만약)이죠!”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어떻게 소설, 입막음, 해일 같은 것이 사회에 일어난다는 소리인지 나는 모르겠네요.”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그녀는 숨을 고르기 시작했고 이 성각은 그것이 말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유정 씨, 0%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그 어떤 것이든, 모든 일의 가능성은 0.01% 소수점 이상입니다. 그 미만은 절대로 없습니다. 농구공을 골대에 계속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골이 들어간다는 믿음과 각도, 거리, 풍향, 심지어 공기의 미세한 진동까지도 그 가능성을 염두 해 둘 수 있습니다. 불가능은 없어요! 아, 이러니깐 무슨 광고가 생각나는데, 나만 그런 건가, 라나 뭐라나.” 

이유정은 지금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색다른 휴가를 보내려다 오히려 토만 하고 있네요.” 

그 말에 이 성각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자, 일어나세요.”

그가 그녀를 일으킨 후 그들은 문을 열고 기괴한 컴퓨터의 바탕화면이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이 때 멀쩡하던 벽이 뭉개지고 구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게 뭐…….”
 
부축을 받던 이유정이 놀라 중얼거렸다. 그녀를 부축해 주던 이 성각은 아직도 모르겠냐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유정 씨가 깨달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깨닫지 못하셨군요.”
“무엇을 깨닫죠?” 

그녀가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이 성각 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할 수 없군요. 사실 우리는 만약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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