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진 아저씨가 쪽지를 가로채서 펴고는 말했다. 그의 말대로 쪽지에는 성훈의 역할이 시체처리라고
적혀있었다.
“크흠,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합니다.”
변조된 목소리를 헛기침을 한 차례 하며, 그 녀석이 중얼거렸다.
“절차? 네 녀석한테는 사람 목숨보다 절차가 더 중요하지?”
승대 아저씨가 참지 못하고, 그 녀석을 비꼬았다.
“잊지 마세요. 제가 버튼 하나만 누르면 끝입니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흉한 목소리의 협박에 승대 아저씨는 움찔했다.
“쳇”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를 위해서라도 버튼은 자신의 역할을 못했거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만 누릅니다. 전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요,”
원진은 참으로 양심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덧 어수선했던 둘째 날이 지나가고
셋째 날의 아침이 밝아왔다. 원진도 그렇고, 승대 아저씨도 그렇고, 범진 아저씨, 모두 불안한 마음과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편히 잠들지 못하고, 복도 통로에서 날을 샜다.
“쳇, 뜬눈으로 날을 새버렸군. 얼마 안 남았는데 말이야”
승대 아저씨가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원진씨는 방안에 있는 여자가 무슨 역할인지 걱정되지 않아요?”
범진 아저씨의 느닷없는 물음에 원진은 잠깐 졸다가 확 깨서 일어났다.
“네, 뭐라고요?”
“저 방안에 있는 여자가 무슨 역할인지 걱정 안 되냐고요?”
범진 아저씨는 다시금 되물었다.
“어차피 여자 하나입니다. 저희 셋이 같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어젯밤에 지은씨가 강간을 당할 뻔 했다고 했잖아요. 그건 정당방위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원진은 조목조목 따져가며 범진 아저씨에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범진 아저씨의 표정은 점차 굳어졌고,
이에 옆에 있던 승대 아저씨가 말했다.
“강간이라고요? 성훈씨가 강간 같은 걸 할 사람으로 보였습니까? 물론 그가 우리에게 보여줬던 행동거지가 좀 난폭하고, 거친 면이 없잖아있지만 우리에게 자신의 역할을 공개한 걸 보면 나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요.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신은 어제 방에 처박힌 채, 안 나와서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어제 성훈씨와 그 여자는 꽤나 친했었다고요”
승대 아저씨의 말에 원진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저씨들의 말을 귀담아 들은 원진은 일어나서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며 지은을 불렀다.
“지은씨, 지은씨! 문 좀 열어봐요!”
하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앉아서 원진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범진 아저씨가 일어서서
기지개를 하며 말했다.
“역할은 어찌될지 모르지만 오늘로 셋째 날이군요. 내일이면 이곳도 끝입니다.”
“만약에 우리를 가둬둔 녀석이 살려주지 않는 다면요?”
승대 아저씨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흠, 그런 건 상상하고 싶지도 않군요.”
범진 아저씨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동차 앞 유리에 붙어있던 쪽지에 적힌 장소는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 박 형사가
찾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하루를 꼴딱 새운 끝에야 박 형사는 그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전 11시 50분. 먹은 것도 없이, 장소를 찾아 헤매느라 힘들었지만 사람들의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박 형사는 더욱 힘을 내며 차에서 내렸다. 풀숲이 꽤나 많이 자라서 걷기가 힘들었지만, 쪽지에 적힌 대로
그곳엔 오래된 건물하나가 있었다. 박 형사는 문을 열고 들어가, 쪽지에 적힌 대로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몇 계단을 내려가자 두꺼운 철문 하나가 보였다. 박 형사는 쪽지에 적힌 대로, 철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올렸다. 그러자 ‘덜커덩’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셋째 날 내내 지은씨는 방에 박혀서 꿈쩍도 안했고, 원진과 승대, 범진 아저씨는 서로를 경계하기 바빴다.
그러다가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너머 네 번째 날 아침을 향하고 있었다.
“내일 12시면 이 역할놀이도 끝나는 군.”
하지만 원진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꽤나 많았다. 다른 사람들의 역할이나, 처음부터 죽어있었던
두 사람 그리고 방에서 나오지를 않는 지은씨. 문을 부수려고 생각도 했지만 첫 번째 희생자가 떠올라
차마 문을 부술 수는 없었다.
“원진씨, 이거 먹지 그래?”
범진 아저씨가 자신의 방에서 꺼내온 빵과 물을 건네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원진은 그것을 넙죽 받고는 이내 입에 쑤셔 넣었다. 자신의 방에 있던 음식을, 지은씨 때문에 꺼내서
먹을 수가 없어서 굶고 있는 와중에 먹는 음식이라 원진은 범진 아저씨가 고마웠다. 빵과 물을 허겁지겁
먹는 원진에게 범진 아저씨가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거야? 이대로 원진씨는 죽을 거야?”
원진씨는 놀라서 물을 뿜으며 대답했다.
“무, 무슨 말이죠?”
“아니, 자네 역할은 우리를 가둔 녀석을 죽이는 역할이잖아, 근데 이대로 12시가 되어버리면 원진씨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해서 죽을 거 아니야?”
범진 아저씨의 말을 들은 원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급급해 정작 자신의
역할은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야겠죠.”
원진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손에 쥐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왜 더 안 먹어?”
“입맛이 없네요.”
원진은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12시가 되면 죽는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려고 했지만 원진은
애써 참아냈다. 그렇게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갑자기 원진의 방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진씨, 원진씨”
“어? 지은씨?”
“원진씨,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지은은 문에 바짝 기댄 채, 원진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시간이요? 지금 11시 40분이네요. 앞으로 20분 남았네요. 하하.”
왠지 모를 허탈감에 원진은 웃음이 났다.
순간 원진의 앞을 승대 아저씨가 가로 막았다.
“더는 못 참아!! 나도 살고 싶다고!!”
승대 아저씨는 그렇게 외치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에 있던 침대 아래에서 날이 선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는 원진과 범진 아저씨를 협박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진정하세요!”
원진과 범진 아저씨는 칼을 쥐고 서서히 다가오는 승대 아저씨를 향해 소리쳤다.
“나도 살아야 한다고!! 제발 죽어줘!! 난 살고 싶어!!”
승대 아저씨는 소리쳤다. 순간, 범진 아저씨는 잽싸게 옆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승대 아저씨는 잠깐 놀라더니 곧 원진을 목표로 삼은 듯, 원진에게 다가갔다. 원진은 순간 용기를 내어,
어차피 죽는다는 심정으로 승대 아저씨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양쪽의 방문이 동시에 열리면서 지은과 범진
아저씨가 나타났다. 범진 아저씨는 승대 아저씨의 뒤에서 양팔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어서 죽여!”
그러자 지은은 품에 있던 칼로 승대 아저씨의 머리를 목을 찔렀다. 그렇게 승대 아저씨는 비명 한마디
못 지르고 목에서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원진은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너무 놀라 뒤로 넘어졌다.
순간 천장의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은씨, 당신이 칼로 찔러 죽인 그의 방, 냉장고를 보면 쪽지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꺼내 보세요.”
지은은 범진 아저씨와 원진의 눈치를 살피다가 방에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어 쪽지를 꺼내서 가져왔다.
그리고는 꼬깃꼬깃 구겨져 있던 쪽지를 펴냈다.
당신의 역할은 칼잡이입니다.
칼로 아무나 한 명만 죽이세요. 한 명만
(칼은 침대 밑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조심하세요.)
“그의 역할은 한 사람만 죽이면 되는 칼잡이였습니다. 양심이 있었던 터라, 마지막 날까지 자신의 역할은 잊고 있다가, 결국 살고자 하는 마음에 역할을 수행하려다 역으로 죽어버렸네요. 역시나 당신들이 죽였습니다.”
스피커에서 변조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여태까지 참고 있었다는 건가?”
범진 아저씨는 쓰러져있던 원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진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순간, 원진의 눈에
승대 아저씨의 목에서 칼을 뽑아내는 지은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낀 원진은
범진 아저씨를 손을 잡고 뒤로 물러나며 소리쳤다.
“위험해요!”
지은이 쥐고 있던 칼이 허공을 갈랐다. 원진과 범진 아저씨는 가까스로 칼을 피하고는 복도 끝의 문으로
도망쳤다. 시간은 11시 50분을 약간 넘어가고 있었다. 막다른 문에 들어선 범진 아저씨와 원진은
뒤를 돌아봤다. 지은이 칼을 들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원진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지은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도 살아야 해요, 따지고 보면 이게 다 당신들 때문이에요”
지은은 냉담하게 대답했다.
‘덜커덩’
순간 원진과 범진 아저씨가 등지고 있던 두꺼운 철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설마 기적인가?”
원진이 중얼거렸다. 문이 열리고, 그곳에는 박 형사가 총을 들고 서있었다.
그리고 박 형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앞에 칼을 쥐고 서있는 지은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복도 전체에 울려 퍼지는 총성과 함께 지은은 맥없이 쓰러졌다.
“생존자들인가요? 어서 여기를 나갑시다.”
박 형사는 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자하에서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원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에요?”
“저기 형사님 이 건물 안에는 아직 우리를 가둬놓은 그 녀석이 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박 형사가 물었다.
“네 맞아요, 아직 건물 안에 있어요. 확실합니다.”
“전 제 역할을 수행해야겠어요. 가시려면 가세요.”
“저도 돕겠습니다.”
“그럼 같이 가죠.”
그렇게 셋은 계단을 계속해서 올라갔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출입금지- 라는 팻말이 붙은 실험실의
문이 보였다. 박 형사는 총을 양손에 꼭 쥐고, 그 문을 발로 찼다. 그러자 문이 활짝 열리면서,
수 십대의 모니터와 이상한 기계장치들 사이에 앉아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 하나가 보였다.
그 남성은 그들을 보고 재빨리 어떤 버튼을 누르려했다. 원진은 그게 폭탄을 터뜨리는 장치라고 확신했고,
박 형사에게 그를 쏘라고 말했다.
“탕!!”
“펑!!”
총소리와 폭발하는 소리가 동시에 퍼졌다. 눈을 질끈 감고 있던 원진은 눈을 서서히 떴다.
의자에는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진 수염 난 사내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박 형사가 가슴이 폭발한 채,
죽어 있었다. 원진은 알 수 없는 상황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간은 12시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원진에게 범진 아저씨가 땅에 떨어진 총을 주워 총구를 들이밀고는 말했다.
“이번 역할놀이는 참 인재가 없네요. 하하하”
“네?”
“그나마 지은씨가 정의의 사도라는 역할로써 살인자들을 처단했지만, 뭐 처음에 히키코모리 역할을 맡았던 현우씨를 단체로 죽이는 바람에 곤란하게 됐지만”
원진은 어리둥절했다.
“그나저나 박만도씨는 불쌍해서 어떡하나? 역할놀이를 두 번이나 했는데 결국에는 죽어버렸네요, 아, 원진씨는 박만도씨를 모르죠? 저기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이 박만도씨에요. 일부러 위험하지 않게 ‘역할놀이 관리자’라는 역할을 맡겨줬는데”
범진 아저씨는 박만도라는 사람이 죽어있는 곳에 가서 책상에 놓여있던 쪽지를 꺼내 원진에게 던졌다.
*중요역할
당신의 역할은 역할놀이 관리자입니다.
저를 대신해서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그에 따른 설명을 해주세요.
아무나 죽여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경험자인 당신이 잘 해내리라 믿습니다.
(이번엔 꼭 나가시기를)
원진은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원진씨, 경찰의 주머니를 뒤져보세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에 원진은 미친 듯이 경찰의 주머니를 뒤졌다. 그곳 역시 쪽지가 들어 있었다.
당신의 역할은 경찰입니다.
***시 ***동 ****로 찾아가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구하세요.
내일 12시까지 꼭.
좀 멀기 때문에 지금 출발해야 할 겁니다.
꼭 혼자 오셔야합니다.
참고로 그곳에는 당신이 찾는 최재희씨와 우상민씨도 있습니다.
(참고로 당신의 가슴에 달려있는 건 폭탄입니다. 행동하지 않을 시에 터질 겁니다.)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지?”
원진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아, 최재희씨와 우상민씨요? 그들은 여기 있습니다. 당신도 봤잖아요? 어떤 방에 있던 시체 두 구, 못 보셨나요? 규칙에 있죠? 역할놀이는 8명이서 한다. 나와 당신 그리고 처음에 죽은 히키코모리씨, 지은씨, 승대씨 성훈씨, 박만도씨, 그리고 저기 경찰, 무대는 점점 넓어진답니다.”
범진 아저씨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물론, 저 혼자서는 이런 일을 못 꾸미죠? 동료도 있답니다. 하하하”
“이럴수가”
“5,4,3,2,1”
범진이 중얼거렸다.
“뭐죠?”
“카운트다운이요, 12시가 됐네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셨네요.”
범진은 원진의 머리를 향해 총을 쐈다.
“탕!!”
------------------------------------------------------- 졸면서 쓰느라 이거 제가 다시 읽지도 못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