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부에서 흉악범의 얼굴 공개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할 모양이네요.
<법무부, '흉악범 얼굴 공개' 입법예고>
http://imnews.imbc.com/news/further/index.asp?newsPart=1&pageUrl=http://imnews.imbc.com/news/further/society/2307973_2906.html 얼마 전에 중앙일보가 강호순의 얼굴과 이름을 "공익을 위해" 공개하노라고 앞장서서 총대를 메던데, 뭐 어찌됐든 그 노력이 헛되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이번에 법 개정을 추진하는 법무부에서 내세우는 논리가 중앙일보가 그때 내세웠던 논리와 거의 다른 게 없는 걸 보면 거기 있는 사람들 중에 중앙일보 보는 사람이 많은가 봐요. 아니면 창의력이 부족하거나 내세울 만한 게 결국 그것밖에 없거나...
<중앙일보, 공익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 이름·얼굴 공개>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475906&ctg=1203 이번 개정안 추진의 변에서도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 그 신상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고 있고, 지난 번 중앙일보다 '공익을 위해' 연쇄살인범 강호순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고 했는데, 난 그걸 공개해서 공익에 어떤 도움이 된다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들이 법 개정 추진의 이유로 내세우는 것들은 대충 아래와 같이 요약이 돼요.
1. 얼굴을 공개하라는 여론이 높음
2.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범죄이고 향후 재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움
3. 사회적 응징에 의한 범죄 예방 효과
4. 공분의 해소
5. 추가 범죄에 대한 제보 효과
뭐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위에 링크한 기사들에서는 결국 위와 같은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래서, 위의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한번 생각을 좀 해 보려구요.
1. 얼굴을 공개하라는 여론이 높음
여론이 높아 법개정을 추진하게 됐다는 대목을 보니 좀 벙쪄요. 그것이 잘된 일이다 잘못된 일이다를 떠나서 미국산 쇠고기는 결국 수입이 재개되었고, 이번 WBC 대표팀의 병역면제는 아마도 힘들겠죠. 정치하는 사람들더러 청개구리가 되라는 말은 아니고 여론이 항상 틀리다는 말도 아니지만, 결국 여론이란 건 자기 입맛에 맞을 때 편하게 가져다 쓸 수 있는 핑계일 뿐인데 여론 때문에 추진하게 됐다는 말을 보고 있으려니 참 그래요.
2.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는 범죄이고 향후 재범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움
국민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으므로 현상수배범의 얼굴을 공개해야 된다던가(이미 공개되고 있지만), 향후 재범가능성이 높으므로 흉악범을 사형시켜야 한다던가 하는 논리라면 그것에 대한 찬성/반대를 떠나서 하나의 논리로 봐 줄 수 있겠어요(참고로 현상수배범 얼굴 공개에 반대하지 않고, 사형제도에 반대해요). 근데 범죄자는 이미 체포돼서 재판 받고 감옥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게 웬 생뚱맞은 소린지 모르겠어요. 아니면 이건 우리나라 법이 솜방망이라서 어차피 금방 출소하니까 범죄자의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재범을 조심하라는 걸까요? 아니면 우리나라 범죄자 수용시설이 엉망이라 금방 탈주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범죄자의 얼굴을 기억해 뒀다가 조심하라는 걸까요? 근데 여러분은 강호순이 재판 받고 형 선고받고 감옥에 들어가면 강호순의 이름과 얼굴을 며칠이나 더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요?
3. 사회적 응징에 의한 범죄 예방 효과
역시 범죄자는 이미 체포돼서 재판 후 감옥에 들어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뭘 어떻게 사회적으로 응징하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뜻있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서 저격수라도 고용하라는 말일까요?
최고의 형벌인 사형제조차도 범죄 예방 효과가 있네 없네 논란이 끊이질 않는데 '사회적 응징'으로 범죄를 예방하겠다니, 그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것 같아요. 사회적 응징이 도대체 뭘까요? 또 하나의 사회인 인터넷에서 네티즌수사대에 의해 사는 곳, 직장, 미니홈피 주소 등등 다 까발려져서 미니홈피 테러라도 들어가라는 걸까요? 아니면 그가 만기를 채우고 출소하면 그때까지도 그의 얼굴과 그의 흉악한 범죄를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다가 정의봉이라도 들고 가서 야심한 밤 어느 으슥한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때려죽이기라도 하라는 걸까요? 그 옛날 안두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니면 지난번 모 그룹 회장님 아들 사건에서 보다시피 법은 사적인 복수를 더욱 엄하게 처벌하니까 피해자의 유족들은 가만히 계시고, 얼굴 알려줄테니 정의감 넘치는 시민들이 사회적 응징으로 처단하라는 국가의 배려일까요?
4. 공분의 해소
설마하니 그 분노란 게 범죄자의 얼굴이랑 이름 안다고 사라지는 분노가 아닐 테니, 그 얼굴과 이름을 가지고 뭐라도 해서 분노를 해소하라는 얘기겠죠. 결국 그 '사회적 응징'하면서 분노를 해소하라는 얘기 같은데 왜 똑같은 얘기를 반복할까요?
5. 추가 범죄에 대한 제보 효과
좀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또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심이 돼요. 범죄피해자 혹은 목격자가 범인의 얼굴을 기억 못해서 신고를 못하고 있다가 공개된 얼굴을 보고 신고를 한다? 혹은 사건은 접수가 되었지만 신고자가 범인의 얼굴을 몰라 더 이상 진척이 없는 상황에서 공개된 얼굴로 인해 범인이 밝혀진다? 얼마나 그럴듯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현상수배범을 '보신 분은 연락바랍니다'와, 체포된 범죄자에게 '피해를 당하신 분은 연락바랍니다' 이거 별로 중요하지 않은 차이일까요?
그리고,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궁금해서 강호순 얼굴 공개 이후 추가 제보가 있었는지 대충 검색해봤는데, 못 찾겠어요. 뭐 있는데 기사화가 안 됐다거나, 있는데 검색을 발로 해서 못 찾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 효과가 의심이 돼요.
게다가 이런 걸 보면 잘 모르겠어요. 득이 많을지 실이 많을지. 가뜩이나 경찰 인력도 부족할 텐데.
<경찰 부녀자 납치 노이로제>
http://www.kwnews.co.kr/view.asp?aid=209030200110&s=501 범죄자 얼굴을 공개하네 마네 하는 것보다, 범죄자에 대한 형량이 적절한가라던가 아니면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를 하는 게 훨씬 더 생산적일 것 같은데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 '여론'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래서 전 그 '여론'에 궁금한 게 있어요.
흉악범의 얼굴이 궁금해요? 궁금하다면 왜 궁금해요?
<흉악범 얼굴공개 "범죄예방엔 글쎄요...">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996&yy=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