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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명언85-빈 방/박범신<아이를 밸 수 없는 자들의 참혹함>
게시물ID : lovestory_6844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0
조회수 : 39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29 18:42:50

출판일 04.06.12
읽은날 14.08.29

111p. 항아리야 항아리야
늙은 여류작가는 내가 썰렁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한심하다는 듯 상반신을 살짝 펴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바로 그때, 나는 보았다.
병적으로 말랐으니 특별히 포만한 둥근 것들을 늙은 여류작가가 갖고 있으리라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가 보았다. 내 가슴속에서 둥 하고 북소리가 났다. 숨이, 늙은 여류작가의 숨구멍을 흘러내려가 앙가슴을 고요히 울리고 강하할 때, 늙은 여류작가의 젖가슴이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둥글다는 걸 선연히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바라기 씨앗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깡마른 몸집과 달리, 뜻밖에 늙은 여류작가의 젖가슴에 해바라기 씨앗이 수없이 박혀 있다는 걸 나는 순간적으로 알아차렸다. 전 우주를 향해 둥글게 둥글게, 수많은 신생아의 씨앗들을 날릴, 빅뱅의 순간을 왕릉처럼 큰 여류작가의 젖가슴은 기다리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웅크려 있던 내 그것이 갑자기 포신처럼 일어났다.

117p. 항아리야 항아리야
나는 집광력이 육안의 265배나 되는 굴절식 망원경을 갖고 있었다. 별이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물론 심심하기 때문이었다. 밥 먹고 똥 쌀 때, 그림을 그릴 때, 혜인의 차진 고약같은 젖꼭지, 혹은 용인 읍내 여관촌에서 불러준 젖통 큰 여자들에게 잠자는 내 그것을 물릴 때, 장어구이를 꾸역꾸역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을 때, 심지어 잠의 터널 속에 빠져 있을 때조차 나는 심심했다.

134p. 항아리야 항아리야
원시인들은 달빛이 처녀막을 뚫고 들어와 애를 배게 한다고 믿었다……라는 문장이 밑도 끝도 없이 떠올랐다. 어느 책에서 읽은 문장인지, 기왕에 입력돼 있는 정보를 조합한 나의 문장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남성의 성 기능은 단지 여성의 처녀막을 찢어 달빛이 잘 들어갈 수 있도록 통로를 넓혀주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믿는 종족의 이야기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았다.

154p. 괜찮아, 정말 괜찮아
오래전, 나는 한때 사냥꾼이 되고 싶었다.
총이든 활이든, 사냥꾼들은 자신이 쏘아 날린 총알이나 화살이 목표물의 심장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을 선연히, 마치 자신의 심장에 총알이 박히는 것처럼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노루나 사슴, 심지어 표범 같은 맹수가 총을 맞고 순간적으로 허공에 분출했다가 거꾸로 쓰러질 때, 사냥꾼의 온몸 또한 강력하게 팽창했다가 극적으로 수축한다는 것이었다. 사냥꾼이 겨냥하는 것은 노루, 사슴, 표범이 아니라 노루, 사슴, 표범의 중심일 터였다.

202p. 감자꽃 필 때
더구나 지나던 벙어리 농부가 감자 씨를 들고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도와주겠다는 표정을 하고 지게를 벗어놓는 바람에 급기야 그와 함께 감자 씨를 묻기 시작했다.
몸은 건강하신지요?
어, 어, 어.
자제분들은 자주 다니러 오나요?
어, 어, 어.
웃으시는 거 보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이세요. 아저씨, 제 말이 맞지요? 항상 마음이 환하시지요? 마음이요, 화, 안, 하, 시, 다, 구, 요.
벙어리 농부는 그냥 환하게 웃었다.

214p. 감자꽃 필 때
나는 숨을 죽인다.
어떤 한순간, 그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석에 이끌리듯 내가 마당 안까지 끌려들어온 이유도 명백해진다. 나는 따뜻한 물이 내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은 감동을 느낀다.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방 안의 북쪽 벽에 기대어 그와 달리 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일까.
가르말르 타서 쪽을 쪄 올린 머릿결이 아름답다.
볼은 도톰하고 눈은 살아 있는 것처럼 수줍게 웃고 있다. 서른 살을 막 넘겼을까 말까 한 앳된 얼굴이다. 사진은 열린 방문 너머, 직사각형으로 구획된 벽의 한가운데에서 불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기 때문에 유난히 환하다. 그는 한 숟가락의 밥을 자신이 먹고 나면 다음 한 숟가락의 밥은 젊은 아내에게 먹이는  특별한 방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때론 고기 반찬이나 조기 살을 떼어 밥숟가락 위에 얹기도 한다. 목 메지 않게 국을 떠서 사진의 아내에게 먹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내에게 떠먹이는 숟가락은 사진을 향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고 올라와 잠깐식 허공에 머물다 내려온다. 침묵 속에서 행해지는 그 동작의 반복은 따뜻하고 충만한, 그러면서도 신비로운 제의(祭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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