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할배!! 읍참마속 알기나 하오 ?
게시물ID : sisa_68528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The바람처럼
추천 : 2
조회수 : 2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3/11 13:38:26

〖역사 · 문화 자료─읍참마속의 진실〗

제갈량(諸葛亮)의 제1차 북벌은 결과적으로는 인선(人選)의 실패로 어이없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데 제갈량이 이런 인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있었고, 마속(馬謖)의 목을 베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가정(街亭)은 최전방의 전선은 아니지만 보급로의 거점으로, 촉(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략적 요충지이고, 위(魏)나라 입장에서는 반드시 빼앗아야 할 요지였다. 제갈량은 가정을 지킬 장수로 중신들이 추천하는 맹장들을 제쳐 놓고, 마속을 기용했다. 맹장들은 본대 전력의 핵심 요원으로 공격에 쓸 말이지 수비에 쓸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운(趙雲, 조자룡(趙子龍))은 기곡(箕谷)에서 이미 위군의 발을 묶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위연(魏延)은 위군 본대의 주력을 격파하는 선봉장으로서의 대임을 맡고 있었다. 하여 제갈량은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본대에서 빠져도 크게 전력 부담이 없는 마속을 파견한 것이다. 물론 제갈량도 마속이 실전 경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부장으로 왕평을 붙여 주었다. 마속의 임무는 가정, 즉 후방의 보급 거점을 굳게 수비하는 것이었고, 만약 제갈량이 지시한 대로 길가에 목책을 세우고 길목을 틀어막고만 있었다면 충분히 가정을 지킬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당시 인재 부족으로 허덕이던 촉나라에서 제갈량이 끔찍이도 아끼고, 모든 일을 함께 상의했던 자기 사람 마속을 눈물을 흘리면서 벨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군법을 엄정하게 시행한다는 명분뿐 아니라 그 이면에 더 중요한 정치적인 명분이 있었다. 당시 촉나라에는 세 개의 큰 파벌이 존재하면서 내부 모순이 심화되어 있었다. 현재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비(劉備)가 거느리고 들어온 형주(荊州)파, 전임 태수 유장(劉璋)의 동주(東州)파, 그리고 익주에서 태어나 자란 본토의 사족(士族)인 익주(益州)파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선주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劉禪)이 그 뒤를 이었지만 ‘승상이 군권(君權)을 대신’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다. 이런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제갈량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상앙(商鞅)이 했던 것처럼 강력한 ‘법치(法治)’를 펴 공평무사하고 엄정하게 법을 시행했다. 덕분에 삼국 중에서 촉나라가 가장 잘 다스려졌고 치안도 가장 좋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가 선택하여 파견한 마속이 국운에 영향을 미칠 만한 실책을 범했으니, 모든 파벌들이 제갈량의 행보를 주시할 것은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마속의 목을 베지 않을 수 없었던 제갈량의 고충을 마속을 베면서 흘린 그의 뜨거운 눈물이 말해 주고 있다. 곡(哭)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소리 내어 우는 것이라면, 읍(泣)이란 소리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을 말한다. 소리 내어 울든, 소리 없이 울든 간에 한 번이라도 울어 본 사람이라면 어떤 울음이 폐부에서 나오는 진짜 ‘사나이 마음’인가를 알 것이다. 그래서 곡참마속(哭斬馬謖)이 아닌 읍참마속(泣斬馬謖)인 것이다.
 
할배 !! 읍참마속이 될려면
 
박영선을 쳐내야 됩니다.
 
지금 이 형국은 마속이 아니라 조자룡의 목을 벤거라고
 
조자룡 헌칼쓰듯 적진에 뛰어드는 정청래를 쳐내는게 아니라고
 
재고하시오! 뒤돌리시오!
출처 읍참마속은 다음 대백과에서
꼬릿말 보기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