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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명언88-외등/박범신<한국 근현대사를 궤뚫는 슬픈 연애소설>
게시물ID : lovestory_685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좋아헤
추천 : 1
조회수 : 58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9/04 19:54:08

출판일 01.05.11
읽은날 14.09.04
367쪽.

23p.
결혼하자, 우리…….
그가 그 말을 내게 처음 한 게 언제였던가.
5년쯤 전인 것도 같고 10년쯤 전인 것도 같았다. 내가 자나깨나 오빠라고 부르는 다른 남자에의 목마른 그리움으로 사는 걸 가장 가까이 지켜보면서도, 내가 자신을 닮은 아이 하나 낳아 함께 기르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남자의 고통과 자기 분열을 내 어찌 모르랴. 내가 이곳에 와 머물겠다는 말 때문에 지금 이 순간 그가 받아 씹어야 하는 배신감도.
...
수빈은 그 긴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내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이윽고 말했다.
어떤 때…… 너를 마구 두들겨 패주고 싶어.
그 말이 곧 내 누선을 자극했다.
맞은편 눈 덮인 산의 허리에 걸린 주황빛 햇빛이 물안개로 뽀얗게 가리는 게 보였다. 목젖을 급격하게 상행해 온 뜨거운 덩어리가  콧날을 지나 눈에 머물렀다. 나는 그의 가슴에 와락 쓰러졌다. 정말야. 널 패고 싶다구. 패라고, 실컷 두들겨맞으면 나도 속이 시원하겠다고 말하려 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울었다. 봇물이 터진 것 같은 눈물이었다.

86p.
저기, 사람 같아.
아냐. 눈사람이야. 앉은뱅이 눈사람.
누가 저기에 눈사람을 만들어놨겠어?
사람이라면 벌써 죽었지. 밤새 저렇게 산속에 나와 앉아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얼마 전부터, 낮에도 누가 저기에 있었대.
글쎄, 혹시 미친 사람이…… 얼어 죽었을까.
그는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움 때문에 목숨을 버릴 사람이 오늘날 어디에 남아 있겠는가. 하반신을 눈 속에 박고서 폭설이 내리는 산자락에 앉아 오로지 그리움 하나로 병원을 내려다보았을 그를 미쳤다고 하는 건 당연했다.

124p.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 줄 아니?
어느 날, 만나자마자 영우 오빠는 또 잔뜩 흥분하여 말했다. 여느 날의 혜주 언니에 대해 말할 때보다 훨씬 강한 희열의 빛이 넘치고 있었다. 손까지 떨리는 것 같았다.
몰라. 듣고 싶지도 않아.
이 손을 보라구. 오늘 혜주의 손을 잡았단 말야.
겨우 손 잡은 것 갖고 뭘 그래?
겨우라니? 내 손바닥에 찍힌 그애의 지문이 안 뵈니?
안 봬.
나는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혜주 언니 손은 다른 사람 손하고 뭐가 달라?
다르지. 다르고 말고.
언니의 손은 화장실에 가서 밑도 안 닦는가 보지? 우리 고등학생들도 손 잡는 것쯤 보통으로 여겨. 오빠는 대학생이 뭐 그래?
나한텐 유일한 손이야.
영우 오빠는 천천히, 힘주어 말했다.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랄 수 없어. 민혜주, 내겐 고유명사란 말야. 많은 여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일 뿐이라는 거야.

206p.
나는 언니, 승복할 수 없어.
내가 불쑥, 낮고 격렬히 소리쳤다.
이번엔 혜주 언니가 비스듬히 눕고 내가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상태였다. 비겁하다고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그리움이 가슴에 남아 있다면서, 사랑하는 여자를 떠나게 내버려두는 남자의 진실이 무엇이며,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남자의 품안에 들어 옷을 벗는 여자의 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을 위장한 사기이다.
나는 생각했다.

212p.
하지만 오빠는 분노하지 않고 있어.
딴 때에도 그는 그랬어. 내게 분노한 적이 없었고, 말 한마디 거칠게 하지 않았어. 그는 그런 사람이야. 한번은 왜 내게 화를 내지 않느냐고 직접 물어본 일도 있었는데, 그는 말하기를, 사랑이 앞서 나가기 때문에 화낼 겨를조차 없다고…… 내게 그렇게 말했어.

214p.
그녀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음.

영우 오빠의 노트는 기록하고 있었다.

엑스는 내 사랑의 암호이며 긴급 구조를 타전하는 에스오에스(SOS). 엑스, 엑스, 엑스라고 부르는 한밤. 나는 나무 그늘에 쭈그려 앉아 새벽이 올 때까지의 기다림. 엑스라고 쓰는 손. 손바닥에, 땅바닥에, 나무 등걸에, 가슴에 수없이 쓰는 손. 엑스. 엑스. 나의 엑스. 어둠 속의 냉기가 흐르고. 눈을 감으면 이윽고 들리는 발소리. 엑스의 발소리. 슬픈 건 새벽. 밝음이 나를 쫓는구나. 밝은 곳에선 엑스의 발소리도 들을 수 없음. 안락하고 화려한 침대. 금칠이 된 나이트 데스크와 매혹적인 향수. 엑스는 그곳에 있지만, 엑스는 내 곁에 있다. 나의 남루한 뜰에 돌아와 눕는 새벽과도 같은 나의 신부여. 너의 이름은 영원한 암호이며 긴급 구조 신호인 엑스.
나의, 나의 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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