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한 이유 SF영화에서 인류는 주로 물리적인 침략을 받거나, 고도화된 외계 문명을 동경하는 방식으로 외계인을 접한다. 그런데 이 영화의 외계인은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고(간접적인 터치는 있다) 또한 새로운 물리이론이나 수학이론을 '전수'하려 들지 않는다. 독특하게도 이 영화 외계인은 경제학 용어 중 잘 알려져 있는 '비제로섬 게임'에 대한 전인류적 해결을 촉구한다. 특히 '비제로섬 게임' 중에서도 '죄수의 딜레마' 때문에 인류의 발전이 딜레이 되고 있다고 얘기한다. '죄수의 딜레마'는 무한도전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데, 개인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선택하는 경우 모든 사람들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외계인은 3천년 뒤에 인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현재 이 시점에서 인류가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해야 3천년 뒤에 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때를 위해 지금 방문한 것이다. 외계인은 왜 12지역에 나뉘어 왔는가? 현재 인류는 국가 단위로 쪼개져 '죄수의 딜레마'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국가간의 협상은 무의미하고, 자국의 이익만 극대화하려는 경쟁은 인류를 '핵전쟁'이라는 몰락으로 내몰고 있다. 외계인은 인류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류를 적나라하게 비춰주기 위해 12지역으로 나뉘어 파견되었다. 각 국가들은 처음에는 외계인과 소통한 데이터를 서로 공유하며 대응한다. 그러다 중국 등이 반기를 들고 일어나 공유를 끊고 독자 행동을 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외계인이 지적하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다. 또한 중국이 그들만의 문화인 마작을 통해 소통하다 위험한 해독에 빠지는게 되는데, 외계인은 전인류가 통용할 하나의 문자체계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 나뉘어 파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수가 왜 12인가에 대해선, 서양인들의 역사에서 숫자 12가 가지는 상징들이 있기 때문에, 가령 예수의 12제자나 혹은 구약의 12지파와 같은 상징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뉨' 혹은 '구성'이라는 상징을 읽을 수 있다. 영화 전반 외계인과 인류의 소통 과정을 오래 보여주는 이유는? 외계인은 인류가 당면한 문제 '죄수의 딜레마'의 원인을 인류가 시간을 사고하는 방식에서 찾고 있다. 인류는 시간의 흐름을 선형적인 방식으로 이해한다. 시작과 끝의 시간의 흐름대로, 직선적인 감각으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미래의 결말을 수시로 예측하고 현재의 행동을 수시로 '바꿔버리는' 배신적 행동이 우리 인류에겐 늘 존재한다. 그런데 외계인은 선형이 아닌 원형으로 시간을 이해한다. 그들에게 '배신'이란 있을 수 없으며 최초의 선언이 영원히 신뢰된다. 이 사고방식을 전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사고체계를 구성하는 '문자'를 인류에게 '교육'시키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관객은 감독의 강요로 이 외계인의 '교육 커리큘럼'에 참여하게 된다. 감독은 영화 전반에 이 교육 과정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관객들이 높은 학점을 따내길 바랬을 것이다. 외계인이 전수해 준 새로운 '사고방식'이란? 외계인은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소통'과 '공유'의 가치를 설파한다. 헵타파드 문자를 전수한 것도 이 때문이다. 소통과 공유는 영원히 신뢰되는 선언을 단단히 결속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루이스 박사는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대화하며 완전한 '소통'을 경험하기도 한다. 헵타파드 문자 체계는 '과거형'이나 '미래형'이 없다. 현재에 그러하다는 것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미래에도 그러하기 때문에 굳이 시제를 나눌 필요가 없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한번 사랑하면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어서 배신이나 배반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영화 속 중국처럼 독자적으로 행동할 여지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헵타파드 문자는 시작과 꼬리가 맞닿아 있다. 어느 점에서 출발하든지 같은 내용으로 읽혀지는데, 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언제나 동일하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깨닫게 된 새로운 삶의 진실 영화는 시종일관 언어학자 루이스의 '과거'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관객들은 그 장면들이 루이스의 '과거'가 아닌 '미래'임을 깨닫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뒤바뀌는 접점을 눈앞에서 경험하는 그 순간 관객들도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얼핏 이해하게 된다. '루이스의 미래' 장면들의 핵심은 딸인 한나의 일생에 관한 것이다. 루이스는 한나가 병에 의해 일찍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한나를 출산하고 한나의 운명을 전혀 모르듯이 한나를 아끼고 사랑하다 결국 떠나보낸다. 감독은 한나의 일생을 통해 '비극적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주저없이 시작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외계인들은 그 질문에 '그렇다. 그래야 한다.' 라고 답할 것이다. 남편이 떠나갈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하고, 딸이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출산해야 한다. 결말을 안다고 해서 현재의 선택을 바꾸는 행위는 나 혼자만의 이기심일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세상에 머무는, 혹은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의 길이가 아닌, 시작과 끝의 그 과정 전반을 축복이냐 고통이냐로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인생의 의미는 길이가 아닌 깊이인 것처럼. 인류도 실은 작게나마 '끝'을 알고서도 행동한다. 우리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태어난 모든 것은 죽는다.' 라는 점을 알게 된다. 자녀를 계획하기 이전에 우리의 자녀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내 자녀에게 조건없는 사랑을 퍼부어 준다. 외계인의 사고방식은 그런 사랑을 인생 전반에, 모든 인간에게 확대하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현재의 선언이 미래에도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매순간 그것을 기억하고 영원히 지속되는 선언처럼 사랑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사랑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가치 영역에서 실천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이해득실만 따지는 타산적 삶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해득실을 따지는 순간 그 인생은 비제로섬게임에 빠지고 몰락할 뿐이다. 영화는 생각보다 어려운, 큰 의미의 도덕적 실천을 주문한다. 상대의 패를 계산하지 말고, '나부터' 시작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한번 마음먹은 가치는 끝까지 가져가는 신념을 주문한다. 인생을 운명으로 대해야 가능한 마음가짐이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영화를 보고나니 그 분의 마지막 말씀이 더욱 크게 와 닿는다. 그 분은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비제로섬게임을 극복하는 힘은 바로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에서 나옴을. 시작부터 끝까지 탈권위의 신념을 고수하신 바보같은 고집이 필요함을. 혹자는 그분이 유일하게 놓친 부분이 있는데, '내가 상대를 대접하면 상대도 나처럼 대해줄 것이다' 라는 선량한 착각을 하셨다는 것이다. 맞는 말 같아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당대에는 착각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그 꿋꿋한 신념이, 그 선량한 착각이, 그 바보스런 고집이 오늘의 80% 지지의 열매를 맺게 한 것은 아닐까?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의 80% 속에는 인생의 길이보다 깊이에 가치를 두는 40%의 오소리들이 두 눈 부릅뜨고 있다는 것. 이 바보같은 오소리들이 기회주의 한탕주의 뱃지들에게 죽을때까지 물어뜯어버리겠노라고 영원한 선언을 약속하고 있다는 것. 감독 말대로라면, 영화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다. 3천년 뒤에 저 일곱다리 꼴뚜기들을 구원하러 가는 선발대는 40%의 후손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