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학교를 ‘또 하나의 특목고’라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중산층 인텔리들이 제 아이를 공교육의 불합리한 현실을 우회하여 대학에 집어넣는 학교라는 것이다. 대안학교가 한두 개가 아니니 그리 말할 구석이 있는 곳도 없진 않겠지만, 분명한 건 어느 대안학교도 애당초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것이다. 다 부모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교육 불가사리’라고나 할까? 한국 부모들은 교육 문제에 관한 어떤 특별하고 의미 있는 가치도 모조리 녹여선 경쟁력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찍어낸다.
그들은 어쩌다 그런 가공할 힘을 가지게 되었는가? 여러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아무래도 복지 없는 사회의 체험, 마냥 뜯어먹고 동원만 할뿐 정작 내가 위기에 처하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사회에서 살아온 덕일 것이다. 실직자들이 넥타이를 매고 산에 오르고 길거리로 나앉던 이른바 IMF 사태를 통해 그 체험은 더욱 생생하게 각인되고 자연스레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 전이되었다. 그 덕에 오늘 한국 아이들은 감옥의 수인들처럼 하루를 보낸다.
놀이운동가 편해문은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어릴 때 제대로 놀지 못하면 평생 몸도 마음도 병든다.”고 갈파한 바 있다. 백번 지당한 말이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딱 그와 반대로 살아간다. 아이들에게 확보된 놀이 시간이란 학교 마치고 학원가는 사이 동무들과 피시방에 들러 사람을 찔러 죽이고 쏴 죽이는 게임을 하는 것 정도다. 익숙한 풍경이라 별스럽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렇게 생활하는 곳은 지구를 통틀어 한국이 유일하다. 오늘 우리가 ‘봉건체제’라 비웃는 북한의 아이들도 이렇게 생활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오늘 우리 아이들이 욕을 입에 달고 산다는 걸 아는가? 하긴 어느 아이도 제 부모 앞에선 그렇게 하지 않지만, 아이들은 마치 옛날 양아치들처럼 아무런 이유도 감정도 없이 욕을 한다. 드라마 속의 일본인이 입을 벌릴 때마다 “아노” 하듯 그들은 입만 벌리면 “씨발”한다. 폭력적인 미디어가 문제라고? 싱거운 소리 마라, 아이들이 무슨 앵무새더냐. 그게 다 신음이고 비명이다. 아이들 사는 꼴을 봐라. 그 정처 없음이 입에 욕이라도 달지 않으면 하루라도 견디겠는가?
“고래 삼촌”(아이들은 고래가그랬어 발행인인 나를 그렇게 부른다.)이라고, 이 사람만은 내 말을 들어주고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는 아이들이 제 속을 담은 편지를 보내온다. 편지들은 대개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한국이 싫어서 이민가고 싶어요.’ ‘엄마가 미워요.’ ‘자살하고 싶어요.’ 꼬박꼬박 정성을 다해 답장을 쓰지만 순간순간 기가 막혀 넋 놓고 앉아 있곤 한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일은, 아이들은 그렇게 무너져 가는데 정작 그들을 그렇게 만든 부모들은 만날 자신이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노라 말한다는 것이다.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 또한 두 아이의 아비인데 아이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왜 모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인생을 망가트리는 모든 일이 다 악의에 의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정희도 부시도, 하다못해 이명박 같은 사람도 제 나름으론 진정 나라를 위해 사회성원들의 미래를 위해 행동했고, 또 행동하는 것이다. 닮지 않았는가? ‘훗날 역사가 평가하리라’ 되뇌며 불도저처럼 몰아붙이는 이명박 씨의 모습과 ‘훗날 아이는 나에게 고마워하리라’ 되뇌며 아이를 몰아붙이는 부모들의 모습은 말이다. (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