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을 기다린 값을 하는 영화입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는 갈리겠지만 전 괜찮게 봤습니다. 장대한 전투장면을 기대하시고 볼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의 초점은 병사들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 자체를 다루고 있지, 독일군과 연합군의 치열한 전투를 다루지 않았습니다.
영화는 철저히 연합군 병사와 민간인 개개인의 입장에서 바라 본 전쟁을 다룹니다. 됭케르크 철수는 삼십만의 연합군의 기적적인 탈출 작전이며 역사를 바꾼 작전이지만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생존을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어떻게 보면 비겁하고 겁쟁이처럼 보이는, 그러나 영화의 큰 틀에서 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병사들에게 이 작전이 역사를 바꾼 대작전이라는 의식 따윈 없습니다. 승리를 생각하는 대의조차도 없습니다. 병사들에게 됭케르크는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일 뿐입니다.
영화는 오직 병사와 민간인 개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본 상황만을 다룹니다. 거기에는 우리 특유의 신파적 감성도 없고 비장함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는 개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생존을 위해 갖은 수를 다 쓰는 병사들에게 맞춰 영화는 다양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선사합니다. 보다 보면 그 당시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예측불가능한 죽음에 얼마나 쉽게 노출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화는 절대 독일군의 입장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독일군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독일군이 실체로서 연합군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보이는 모습은 공포스러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드는 전투기의 모습이 다입니다. 독일군은 사방에서 쏘아대는 총알, 해안포 공격, 어뢰 공격의 모습으로만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적의 모습이 연합군과 관객의 공포를 자극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전장에 던져진 미군의 입장에서 전투를 보여줌으로써 공포를 자극했지만 덩케르크는 이것과는 좀 다릅니다. 인간으로서의 독일군이 등장했던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는 달리 덩케르크에서의 독일군은 인간이라기보다 미지의 적, 예측불가한 보이지 않는 죽음 그 자체와 같습니다. 이 점을 인지하고 영화를 보면 내가 관객이 아니라 해안에 던져진 영국군으로써, 느낄 언제 어디서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를 간접체험할 수 있습니다.
독일군의 실체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도로 제한하고 죽음 그 자체로 이미지화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전쟁영화를 떠나서, 죽음에 맞서는 인간과 생존하려는 의지 그 자체에 대한 찬가로 의미가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거기 던져진 병사들은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었겠지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운드의 위력이 엄청납니다. 연출과 화면으로도 관객을 해변에 던져놓지만 소리로도 그 효과를 주었습니다. 총성은 무지막지한 큰 소리로, 바로 내 뒤에서 들리는 것 같고 이따끔 등장하는 독일군 전투기 특유의 긁는 듯한 소리는 듣다가 제가 고개를 움츠릴 정도였습니다. 왜 참전군인들이 그 소리를 그렇게 무서워했는지 알겠습니다.
한스 짐머의 배경음악은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기보다 전투 중 나는 소리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섞여서 이게 음악인지 효과음인지 모를 정도입니다.
전 괜찮게 봤습니다. 지금까지 감독이 만든 영화와 많이 다른 스타일의 영화고,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도 굉장히 다르지만(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그나마 제일 분위기는 비슷하나, 덩케르크는 스토리라인이 중요한 영화가 아닙니다)좋은 영화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