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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그는 살아있었다?!! <조선의 흔한 음모론, 브금 有>
게시물ID : history_1285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다크킬러14
추천 : 12
조회수 : 2514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3/12/05 23:06:09




현재 제가 게시하는 자료는 과거 타 사이트등에 올렸던 자료로 오유로 옮기는 중입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military&no=32316&s_no=6510764&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203113

1. 조선군이 도검패용 방식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military&no=32846&s_no=6553334&kind=member&page=1&member_kind=total&mn=203113

2. 조선의 활 Ste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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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실로 오랜만에 글을 올리는 THIS IS TOTAL WAR 카페의 간판 꽃미남 다크킬러 되겟습니다^^캬캬캬캬! ’08년 조선의 활 시리즈 이후 아예 손을 놓았었는데 오늘 카페의 무법자 무장햏의 요청(?)으로 이렇게 게시물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당^^

뭐 오랜만에 올리는 글에 비해선 비중이 상당히 아스트랄(?)할 정도의 뻘글이라 집중안하시고 보시면 되겠고 보실 분만 보시면 되겠습니다. 

주제는 ‘이순신장군 생존은둔설!’ 두둥!! 보라!~!~ 벌써부터 뻘짓스멜이 강하게 풍겨오지 않는가? 아앙악!! 심심풀이로 볼사람만 보라닁! 난

 경고했다능!!~!! 그럼 이제부터 ㄱㄱㄱㄱ


title.jpg


 사건의 개요


그렇다. 그렇다. 개요는 그렇게 해서 그렇다. 뭔 개소린가 하면 대제목을 보고 당연히 알 수 있겠지만 이번 글의 주제는 ‘이순신장군의 생존은둔설’이다. 한마디로 약간 뻘글!! 흔한 음모론!! 이글 뭥믜!! 라고 분류될 수 있겠다. 뭐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역사서를 재편찬하는 대장정이 시작되니 

그냥 재미로 읽어주기 바란다. 필자 본인도 이번건은 죽자고 올리는 글이 아니고 하도 쉬어서 손이 근질근질 하던 차에 삘 받아서 올리는 것이니;; 

자~ 그렇다면 왜!! 어째서 이런 설이 나오게 되었는지(이건 최근에 나온 설이 아니다;; 임란직후부터 나돌던 루머였으니...)

 그 배경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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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며,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변수림(卞守琳)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출생하였다. 따라서 충남 사투리 안 쓰신다. 전라도 사투리 쓰시는 것 아니냐고 전에 

누가 물어봤는데... 뭐 지금 중요한 게 그게 아니다;;

 

어쨌든,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칠천량에서 바닷물에 조선수군을 말아 쳐묵쳐묵 하신 원균(元均)장군은(그렇고 보니 이양반도 생존은둔설이;;;) 

그 행적이 오묘해지고 수군은 사실상 괴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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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인해 서해를 통한 해상보급로가 고스란히 왜군에게 노출되었고 보급선이 서해루트를 따라 진출하여 한강이남의 왜군에게 컨택만되면 

임진왜란 시즌 2 : 정유재란 엔딩씬 찍을 절체절명의 상황!! 결국 조선은 또 한번 치트키를 시전한다.

 

 

“SHOW ME THE 순신!”

 

 

결과야 뭐 다들 아시다시피 말 그대로 핵(Hack)의 시전;;; 또 다시 연전연승을 구가하시어 왜군을 섬멸하시옵고 ‘네 이놈 왜적!!’ 이란 

그 말씀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바다에서도 이루어지리라. 하여 그 다음해 노량해전까지 주구장창 풀옵으로 달리신다. 

그리고 운명의 날인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앞바다에서 적의 총탄을 가슴에 받으시고 전사하신다.

자! 그럼 집중해라! 바로 지금부터 본문의 주제가 시작된다!


 

 이순신은 전사하였는가?

 

이순신장군의 죽음에는 예전부터 각종 자살설등의 루머가 끊이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하면 이순신의 전사가 주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이순신이 택할 길이 결국 죽음밖에 없지 않았는가 하는 공감대가 당시부터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순신에게는 죽자고 달려드는 왜적보다 등 뒤의 서슬 퍼런 칼날, 즉 언제든 자신을 베어버릴 기회만 노리고 있는 선조와 조정이 더 큰 위협이었다. 

따라서,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생존하여 전쟁을 끝마쳤더라도 결국 김덕령의 경우처럼 억울하고 욕되게 죽임s을 당했으리라는 

막장드라마 각본은 누구든 구상할 수 있었다.

그럼 여기서 드는 의문 한가지, 선조는 이순신을 올매나 증오했을까?


 

 선조의 궁색한 입장


꿎~1.jpg

지난 2010년 3월, 전 국민을 충격과 분노에 휩싸이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바로 천안함 격침사건! 당시 특전사 00여단에서 근무 중이던 필자는 사건당일 실제로 비상소집 되어 완전군장에 전시탄을 지급받아 착탄 후, UH-60블랙호크에 탑승하여 작전지역인 북한 00도 일대로 침투하기 위하여 

발진하였기는 개뿔이 닥치고 무한 비상대기에 외출, 외박, 휴가 다 짤리고 잦은 비상소집과 이런저런 제한사항으로 우리가 먼저 북한 넘어가자며 

‘보내주십시오!!’ 

외칠 뻔했다; 뭐 각설하고;;(전쟁은 쉽게 안 나더라;) 이처럼 배 한척이 격침되어도 온 나라가 뒤집히는데 이보다 앞선 

1597년에는 무려 2백여 척을 한방에 꼬라박아버렸다.

 

이순신을 폐하고 원균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선조와 서인들은 조낸 벙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겨우 2달 후인 9월 16일! 이순신은 만신창이가된 

몸으로 더욱 처참히 망가진 조선수군 단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전선과 보급선 포함 5백척의 왜군을 진도 울돌목에서 말 그대로 씹어발겨버린다.

 

전설로 남을 전공에 비례하여 원균과 이를 옹호한 선조에게 맹비난이 쏟아진다. 역대 왕중에 머리로 치면 탑랭크인 선조가 이걸 모를 리 없었다. 

허나 머리가 똑똑하여도 세종대왕이나 정조처럼 성품이 올곧지 못하고 변덕스럽기가 미친년 치맛자락인 

선조는 반성은커녕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순신을 깍아내린다.

 

다음은 <선조실록> 1597년 10월 20일자 기록을 일부 발췌한 것이다. 


잘봐라 가관이다.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그가 그의 직분을 수행한 것일 뿐이며 큰 전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1598년 4월에는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

 

며칠 후 보다 못한 비변사(備邊司)에서

 

‘원균은 수군의 주장으로....(중략)...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그 죄는 모두 원균에게 있습니다. 그 부하들에게도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공이 있으면 상을 주어 군기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라고 하였으나, 선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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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 한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지 말아라. 이산해와 윤두수가 그렇게 시킨 것이다.’

 

라며 서인까지 더블킬 들어가신다.

지금태어나셨으면 키배로 온 인터넷천하를 정복하셨을 분이다. 지금 우리나라가 키보드워리어 강국이 된 것은 다 조상님들의 덕이다;;

 

이질알을 해대니 <선조실록>을 편찬한 사관(史官)은 저 유명한 ‘사관(史官)은 논한다.’를 남긴다.

 

‘한산도에서 남김없이 패전한 원균은 시장에 사지를 찢어 처형해야 마땅하다. 또 수군이 죄가 없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원균은 성질이 

포악한 일개의 무지한이다. 이순신을 모함하여 몰아내고 통제사가 되었으며 단번에 적을 섬며하겠다고 큰소리를 쳣으나 지혜가 

부족하여 패전하였다. 그리고서는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바람에 장병들을 모두 죽게하였다.

 이러한 원균의 죄를 누가 벌주어야 하는가........ 이런 일을 목격하니 머리가 터질 거 같고 뼈가 녹아버리는 것 같다.’

 

선조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순신이 전사한 후에는 자격지심이 발동하였는지 노량해전의 승리도 대수롭지 안핟고 말하면서 원균을 계속 두둔하여 

결국 이순신과 동등한 등급의 선무공신(宣武功臣)을 내렸다. 이것도 가관인 것이 호성공신(扈聖功臣)이라 하여 의주까지 피난하는 것을 도운 

이들에게 내리는 상은 86명에게 내렸으나 무공을 세운자에게 내리는 선무공신(宣武功臣)은 겨우 18명에게만 내렸다. 

그중 선무 1등 공신은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전사하거나 죽은 3명에게만 주었는데, 곽제우, 이원익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나 빼고 다 역모!!’ 크리 잘쓰시는 선조로써는 당연한 조치다.

 

또한 여기서 재밌는 것이 공신책정의 심사를 맏았던 공신도감이 끝내 원균을 2등 공신으로 추천하자 선조가 빡쳐서

 

‘왜란 초기에 원균은 이순신에게 청병하였으나 이순신은 스스로 출전하지 않았다. .......

(다 옮기다가는 손가락이 퇴갤할 것 같아 중략; 이순신이 출병하지 않은 이유는 추후에 다시 다루겠다.)..

이순신과 교대하여 통제사가 되자...출격할 수 없는 상황임을 역설하였음에도 비변사가 출격을 독촉하고 도원수가 곤장을 때렸다.

(아이구 그냥 권율도 까고 원균이 챙기시느라 고생이 많수다.) 나느 일찍부터 원균을 지혜와 용맹을 겸비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중략...이제 원균을 오히려 2등으로 낮추어 책정했으니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는가? 원균은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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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기도 안차는 말이지만 왕이 까라는데 안깔수가 있었겠는가. 허나 공신도감의 위원장(도제조)은 무려 이항복느님 이었으니...

 

‘원균은 왜란 초에 수군이 없는 장수였으나 이순신의 덕택으로 해전에 참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3도 수군을 전멸시켰으므로 

이순신, 권율과 같은 1등공신으로 책정하기는 어려워서 2등으로 내려 책정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상감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1등공신으로 책정하겠습니다.’

 

라고 답변한다. 현대 국어로 해석하자면...

 

아놔 시파 진짜 원균이색히 초반에 러쉬당했을 때 본진 버리고 커맨더 띄운색히 아님!! 그렇다가 순신이형한테 꼽사리 끼어서 

겨우 한자리 하던 놈이었음! 근데 이색히가 우리 수군 말아먹었다능!! 어쩔거임? 근데 이색히를 순신이형이랑 율이형하고 

도매급으로 묶자는 거임? 님 미쳤음? 사리판단 안됨? 아.......됬고 잘나신 너님 하도 징징거려서 우리가 졌음. 너님 맘대로 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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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항복이형의 아우라는..........

위와 같은 상황이 전후 6년이 지난 시점에 벌어진 시츄에이션이니 당장 전시에는 이순신에 대한 증오가 충분히 

그를 죽이고도 남았으리라 예상되어진다.

 


 ‘내가 죽어야지...내가 죽어야지...’ 이순신의 바람.


<충무공전서>를 작성한 이여(李畬)는 이순신에 대한 정탁의 구명상소문을 전재한 후미에 이런 글을 남긴다.

 

‘공로가 클수록 용납되기 어려움을 스스로 깨닫고 마침내 싸움에 이르러 자기 몸을 버렸으니, 이순신의 죽음은 미리부터 계획한 

것이었다고들 말하는데, 그때의 경우와 처지로 보면 그 말에 혹시 타당한 점도 있다 하련가! 아 슬프도다!

 

라는 구절이 있으며, 그보다 엎서는 기록으로 이민서(李敏叙; 1633~1688)는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는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고 또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저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죽었으며, 호남과 영남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들 경계하였다는 것이다.’

 

라고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에 남겼다.

 

뭐 누구나 알다시피 선조의 피해망상증은 징징이왕, 허구헌날 우는왕 등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에서도 

‘왕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라는 식의 표현이 있다. 이런 심성허약하고 얄궂기로는 솔라시스템內 최강인 선조가 종전 후 이순신이 자신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로써 세력을 규합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역사에 ‘IF...’ 드립 따위는 없지만 당시 정황을 보자면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 순신이횽을 잡아 족치려 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1598년 중반에 접어들자 간덩어리가 콩알만한 선조도 이쯤되면 전쟁이 조선의 승리로 끝나게 될 것이며, 이는 단지 시간과 과정의 문제란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이 4월 달부터 이순신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등 살살 밑장을 깔기 시작하신다.

다른 의병장들은 열거 할 필요도 없이 이순신이 전사하기 한 달 전부터 유성룡은 영의정에서 쫓겨나 죄를 기다리는 상황이었으며 이순신 

전사한달 후에는 파직되어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죄인이 되어 고향으로 쫓겨간다.

 

유성룡이 누구인가? 영의정을 떠나서 평양과 서울을 수복할 당시 도제찰로서 병력과 제반사항을 총지휘하였고 권율로 하여금 최강의 캠프포지션인 

행주산성에 짱박히게하여 대승을 일궈낸 장본인이다. 따지고 보면, 이순신 다음가는 전공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유성룡과 이순신은 배프라는 사실!!! 바로 절친이었다는 것!!

 

이쯤 되면 전쟁이 끝나자마자 번호표 뽑고 대기타던 유성룡과 퇴근하는 이순신을 도매급으로 묶어서 처리하려 했으나 불행중 다행(?)으로 

이순신은 전사했고 그에 따라 유성룡은 그쯤에서 끝난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성립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이 과연 전후 자신의 행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당장 당신 스스로가 2번이나 백의종군하시며 갖은 고초와 역경을 겪었고 그 와중에 모친상을 당하셨는데 말이다.

 

‘이 신발! 이색히 이거 또 질알질알 할 텐데....’

 

자살설이 괜히 나온 게 아니란 말이다.


 

 살아생전 하셨던 말들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이순신에게 올린 제문에

 

‘평시에 사람을 대하실 때 [나는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므로 오직 한번 죽는 일만 남았노라] 하시더니, 

이제는 강토를 찾았으며 큰 원수마져 갚았는데 어찌하여 평소의 맹세를 실천에 옮기셨는고‘

 

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 구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평소 이순신은

 

‘그래. 내가 죄인이다. 선조님하 나 너한테 반기들 생각 추호도 없음!!’

 

을 강조하고 있다. 매사에 몸조심을 하는 것이다. 선조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이기에 언젠간 분명 화를 당할 것이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도 깃들여 있는 말이다.

또 유형이란 이순신이 아끼던 부하가 있었는데 유형은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사람이기도 하다. 그 유형의 행장중에

 

‘이순신이 평소에 마음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부터 만약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하여 인정을 받아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에 죽음으로써 유감이 될 수 잇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원균이 전공을 시샘하여 왕에게 올리고 또 물고 뜯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해보면

 

야 덕령이도 그렇게 잡혀가서 죽었는데 블랙리스트 1위인 나라고 별 수 있겄어? 전쟁 끝난 후 

잡혀가서 죽느니 전장에서 죽어버릴란다!’

 

라고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조금더 확대해석 해보면 (좋지 않은 방법이기는 하나;) 이런 글을 남긴 유형이라는 사람 자체가 이순신의 죽음이 통상적인 전사가 아니란 것을 

우회적으로 밝히는 것일 수도 있다. 유형은 이순신이 죽고 5년 후, 통제사 재직도중 이순신을 애도하는 타루비(墮淚碑)를 세우기까지 한 사람이다. 

선조가 두 눈 벌겋게 뜨고 살아있을 때 말이다.

 

위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향간에 나도는 자살설도 완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 그렇다면 생존은둔설이란?

 

현재 떠도는 생존은둔설 중 가장 설득력이 높은 건은 역시 남천우 교수의 생존은둔설이다 이 생존은둔설을 설명하기 위해 위의 자살설과 이순신의

 행보 그리고 이순신을 둘러싼 선조와 조정대신들의 입장을 살펴본 것이다. 이제 위의 사례들과 지금부터 살펴볼 이순신의 조카 이분의 행장을

 통해 남천우 교수가 주장하는 생존은둔설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다음은 이분의 행장 중 노량해전 당시 적의 피탄 전후의 상황을 

기록한 부분이다.

 

‘18일 저녁 6시쯤, 적선이 남해로부터 무수히 나와서 엄목포에 정박해 있고, 노량으로 와 대이는 것도 얼만지 몰랐다.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약속하고 그날 밤 10시쯤에 같이 떠나 새벽 2시쯤에 노량에 이르러 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 때가되도록 크게 싸웠다.


[이순신은 이 원수를 무찌른다며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문득 큰별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데, 보는 사람들이 이상히 여겼다.

19일 새벽, 이순신은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내지 마라.]


이순신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나셨다.

때에 이순신의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지 모릅니다]


[그렇다. 그리고 또시체를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서는 곧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직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비록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그대로 기를 휘두르며 독전하기를 계속하였다. 적이 도독의 배를 에워싸서 거의 함몰을 당하게 되자, 여러 장수들이 

이순신의 배에서 지휘 독전하는 것을 보고 서로 다투어 달려들어 포위 속에서 구원해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 가까이 와서


[통제사! 속히 나오시오! 속히 나오시오!]


하고 외친다. 완이 뱃머리에서 울면서


[숙부님은 돌아가셨습니다.!]


하였다.

도독은 배 위에서 넘어지글 세 번!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죽은 뒤에도 나를 구원해주셨소]


하고 다시금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고, 도독의 군사들까지 모두 다 쇠고기를 내던지고 먹지 않았다.

 

남천우 교수는 바로 이 대목이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고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 주장한다. 이 글의 저자는 전사 현장에 있었던 완의 친형으로 

당시 상황을 잘 모르면서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 몇몇 부분에서 상식에 맞지 않는 장면이 연출 된다는 것이다.

 

첫째, 총에 맞고 나서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죽었다는 대목을 지적한다. 뭐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그다지 이상한 

대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현장에 있었던 이에게 듣고 서 옮겨적은 글인지라 이부분은 감안해야 된다고 본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셨을 수도 있다.

 

둘째, 전투가 한창일 때에 총사령관이 총에 맞았는데 그 주위에는 군인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므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일견 타당성이 있는 지적으로,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조선수군의 수장이 쓰러지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노량해전은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한이래 처음으로 야간에 발발한 대규모 접전이었다.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해전 베스트에 들어가는 

해전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아돌아가겠다는 집념의 일본군과 단 한놈도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는 한 맺힌 조선군의 대접전 이었던 것이다. 

전열은 유지되지 못했고 화망을 집중시키지 못햇으며 전대나 그 이하 단위의 각개전투가 노량해역 전반에 걸쳐서 대대적으로 벌어진 한마디로 

난전이었다.

 

하지만, 피아간 구별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애로사항은 있었다 하더라도 같은 배의 선상에서 그것도 장선의 선상에서 그 허고많은 사람들중에 

수군제독이 피격당하는 상황자체가 픽션끼가 있는 것이다. (실전이 더욱 소설같다는 말이 있듯이...) 선상에는 참모군관들은 물론 

기라졸(旂羅卒)만 60명에 기타 사수와 포수 및 각 전투원들이 밀집해 있었다. 아무리 난전이라지만 선상 한복판에서 북을 치며 독전 중인 

이순신이 쓰러졌는데 이 사실을 송희립도 아닌 이회, 이완, 김이 단 세사람. 그것도 이순신의 친인척만 알았다는 것인가?

 

이쯤되면 ‘오홍! 음모론 스멜!!’ 가능한 사이즈가 나오기 시작한다.

 

셋째, 판옥선의 구조상 적탄에 맞기가 쉽지 않다는 것.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의 장선은 수십 척의 왜선에게 둘러싸여 말 그대로 쌈사먹히며 

전후좌우, 사방팔방 완전 그냥 집중포화를 당했다. 허나 전사자는 단 2명. 판옥선의 높이도 높이거니와 갑판은 방패로 차폐되어있어 왜군의 

화기로부터 엄폐가 가능했다. 따라서, 럭키샷 한방이 그것도 이순신의 가슴팍에 갔다 꽂히는 경우는 확률상 쉽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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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지휘관 유고시 함대 지휘는 누가 했다는 것인가? 우리는 이순신이 피탄 된 후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진두지휘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게 사실상 가능한 일인가? 송희립은 뭐란 말인가? 상식적으로 회와 완이 함대를 지휘한다는 것은 지휘계통상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국 

송희립이 함대를 지휘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송희립이 이순신의 죽음을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 추후 다시 알아보니 당시 송희립은 이마에 적탄이 피탄되어 손문욱이라는 사람이 지휘하고 있었고 이에 이순신이 

북을치며 독전중이었음.

 

다섯, 이완과 이회는 노량해전 이전에는 해전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이때만은 11일간 배에 탑승하고 있었고, 

이순신의 죽음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가 된다.

 

위와 같은 정황근거를 통해 남천우 교수는 이순신의 피탄 사건은 실제로는 이순신의 측근들이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이순신을 

은둔시키기 위한 물밑작업 이었다고 주장한다.

 


 이순신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순신은 이처럼

 

[마지막 전투에서 죽을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욕되게 죽는 것을 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라는 밑장을 수시로 깔아주시고 결과적으로 노스트라다무스 뺨치는 예언력으로 이를 실행(?)에 옮기신 것이 되었다. 이에 남천우 교수는 이순신의 

아들과 조카, 송희립 등 측근 인사들이 이순신에게 살아 은둔할 것을 권하였고 이 계획의 실행시기를 마지막 해전인 

량해전으로 맞추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건정황을 가능하게 해준 이분의 행장을 근거로 들며 이분과 이순신의 둘째아들은 은둔하는 이순신을 수행했으리라고 추정하고 있다. 

뭐 슬슬 추정과 추측을 넘어 약간 소설이 되가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필자는 분명히 소개글에서 경고했었다^^


 

그렇다면 진정 이순신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은!!















































당연히 모른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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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알면 그게 음모론이겡니? 그냥 그건 정설임. 이양반들이 대체 뭘 바란거임?;;

생존은둔설이다 은!둔!설. 어디 숨은지 다 알면 그게 생존은둔설이니? 생존설이지?

 

 이순신은 실제로 언제 천수를 다했나?

 

실제 이순신의 기일을 알아보기 위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장례날짜와 묘지이장건이다. 이분(참 이분, 저분 많이 나온다.)의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전사하여 영구는 먼저 고금도로 옮겨진다. 그 후 12월 10일경 고향인 아산으로 다시 옮겨지며,

 장례는 다음해 2월 11일 치러진다. 죽은 지 80일 후의 일이다. 그리고서는 15년이 지난(전사일 기준 16년) 1614년 묘지를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다.

 

한편, 이순신의 전사소식은 전사 나흘 후인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며, 11일 후인 12월 4일에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증직하고, 장례는 국가의 

비용으로 치르도록 결정한다. 전후 국가비용으로 치러주는 장례를 지체시킨것도 의문점으로 그동안 이순신의 도피와 은둔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묘지이장이란 유교사회에서 잘 행해지지 않는다. 잠 잘자고 있는데 ‘아들아~, 손자야~’ 혹은 ‘몇대조 증손자야~’ 하면서, ‘춥다~~’ 라던가

 ‘허흐헉.. 헉헉’ 또는 ‘요 밑에 그린벨트 풀린다던데..’ or '조망권이 좀 괜찮은 곳으로..‘ 라고 운을 때시며 젖은 흰 옷과 각양각색의 패션으로 

조상님들이 나타나시거나 해야 옮기는 것이다.

 

그런데 15년 후, 6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다. 뭐 풍수관련일 수도 있겠으나 남천우 교수는 이때 이순신이 실제로 죽은 것으로 보고 있다. 어쩌면 

이분은 자신의 기록을 통해 이순신이 70세까지(묘지 이장시 나이) 살았음이 밝혀지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순신의 시중 

눈여겨봐야 할 구절이 또 하나 있다.

 

‘말을 화양(華陽)으로 풀어보내는 날이 오면(곧 전쟁이 끝나게 되면) 복건(福巾)쓴 처사되어 살아가리라.’

 

이것은 초야에 묻혀 조용히 살아가길 바라는 이순신의 본심이 드러난 구절이 아닐까?

 


 마치며...

 

지금까지 이순신의 <생존은둔설>에 대해 알아보았다. 필자는 분명히 도입부에서 이글은 단순히 심심풀이로 쓰는 글인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뭐 읽는 독자들도 심각하게 받아들일 사안이 아닌 만큼 

‘아~ 이런 설도 있구나’ 

정도의 흥미위주로 읽어주었길 바란다.

 

모두가 알다시피 이순신. 이 세글자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단순한 조선의 명장이 아니다. 그는 임진왜란의 영웅이었고, 백성의 영웅이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조선을 위해 울돌목에서 단 한척의 판옥선으로 133척 왜 수군 앞에 홀로 나선 조선의 영웅이다. 

그 단 한척이 나머지 12척을 이끌었고 그 단 한척의 수장 이순신은! 조선 오백년 역사와 반만년 유구한 우리의 기상을 지켜내었다.

 

그에 대한 각종 설과 루머들은 많기도 많을뿐더러 각양각색이며 많은 논란과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사실도 역사 속 찬연히 

빛나는 그의 이름 이순신 세글자를 바랠 수 없었다.

 

이순신을 그토록 시기하던 못난 왕 선조는 결국 후계자를 확립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치졸하게 생을 마감하였고, 이순신 덕택에 대업이 좆 to the 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병으로 죽기 직전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의 꿈이로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허망하게 떠났으며 그의 가족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죽임을 당한다. 하지만 이순신은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 짧고도 단호한 말 한마디로 역사 속에 그리고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이순신의 생존은둔설... 그가 숨어 천년, 만년 영화를 누리는 곳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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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가슴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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