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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 사학도 글을 보고 정리한 현대사(1)-해방전후
게시물ID : history_68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가람바람
추천 : 39
조회수 : 1586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2/12/20 15:28:48

참고로 저는 그분의 손길이 미치는 모대학의 국사학과 전공한 사람입니다.

베오베의 사학도 분의 글을 보고 예전 대학다닐때 현대사 정리해놓은 파일을 찾아보니 박정희까지는 있더군요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실에 근접한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길어도 한번씩 보고 아시길.. 양이 많아 한번에 다 안올라가네요.

 

해방전후

건국준비위원회

배경 1945815,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총독부 정무총감은 치안권과 행정권등 모든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양하는 조건으로 한반도내에 철수하는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해 달라 요구한다. 이에 여운형은 모든 정치범의 석방, 식량을 확보, 주체적인 치안등을 요구하였다. 여운형이 총독부와 교섭을 한 이유는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에 조선인들을 마구 학살하고 떠난다거나 해방 직후에 민중 내에서 친일파를 처단한다는 이름으로 마구잡이식 보복성 살인으로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혼란이 일어 나는것이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여운형은 1년 전인 19448월에 결성했던 비밀 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을 모체로 해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그리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독립운동가들을 석방시키고 건준으로 편입시켰다. 건준 위원장은 여운형, 부위원장은 안재홍이 맡았다.

건국동맹강령

1. 각인 각파는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 제세력을 구축 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2. 반추축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3.건설부면에 있어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적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건준 강령-중도적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요구를 실현할수 있는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전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세력들이 결집하여 결성된 건준은 해방 이후, 뒤숭숭한 분위기속에 매우 혼란스러웠던 치안상태와 행정, 실무등을 해결하고자 치안대와 행정업무등 식량확보에 주력을 하였다. 8월 말까지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에 부응하여 전국적으로 140여개의 지부가 확장되어 설립되었다.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사업은 북한 지역에서도 진행되었다. 북한 지역에서 주도한 지도자는 조만식이었다. 조만식은 평양 출신으로 일제치하에서도 비폭력적이면서도 비타협적인 노선을 견지한 민족주의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이 조직단체는 공산주의자나 민족주의자의 어느 쪽이 주도하는가에 의해 지역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거나 구성에서 다소 차이가 났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는 점과 일제 치하 시기 독립운동을 벌여왔던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민중의 자치조직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특징을 가진다. 이렇게 좌우가 공존하였지만 미군상륙설로 우파쪽은 탈퇴하고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를 받았다. 96일 좌파 주도의 조선인민공화국을 조직하였고 인민위원회를 통한 지방자치를 시행하여 소작료 3.7제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98일 미군이 상륙하여 좌익을 억압하고 우익 단체인 한민당을 적극 비호하며 위기를 맞게된다.

의의 건준은 광복이후 최초의 정치단체와 한국 현대사 최초로 지방자치를 시행한 조직이라는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 해방 후 건준이 없었다면 사회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해외에 주요 독립운동가 및 단체들이 해외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치안과 행정 같은 주요 업무를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굉장한 의의를 두면서 평가하고 있다

반면에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은 건국준비위원회가 19459,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를 두고 극렬 공산주의자와 손을 끊지 못하고 건준이 좌경화되어 이용당한 것이 가장 큰 실책이었다.고 한계성을 지적하였다.

그 외 정치세력

국 민주당 94일 조병옥과 김성수 등이 우익을 통합하였고 916일 송진우를 대표로하여 한국민주당을 결성하였다. 중심인물은 부르주아 및 지주세력이었고 친일파가 많았다. 한민당은 대중적 지지를 받지 못했으나 미군정이 일제관리를 그대로 근무시키고 우익을 지원하여 주요요직을 차지하였다.

조선국민당 194591일 안재홍에 의해 결성된 중도우파 단체이다. 건국준비위원회의 부위원장이었던 안재홍은 점차 좌경화되어 가는 건준에 불만을 품고, 그 중앙집행위원회 개편 때 건준 부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조선국민당을 창당하였다. 924일 사회민주당·자유당·민중공화당·근우동맹·협찬동지회 등의 군소 정당과 통합하여 국민당으로 흡수되었다. 이들은 신민주주의·신민족주의를 제창하였으나 정치적 기반이 빈약하였다.

그 외에도 대중적 지지를 받은 박헌영과 김일성이 중심이 된 조선공산당이 있었다.

 

한국의 독립문제 논의

카이로 회담은 19431127일 미··중의 3개 연합국이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연합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최초로 일본에 대한 전략을 토의했다. 또한 회담에서 연합국은 승전하더라도 자국의 영토 확장을 도모하지 않을 것이며, 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후 타국으로부터 약탈한 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절차 후에 독립시킨다고 하여 독립에 대한 정확한 명시를 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 후 독립시킬 것을 테헤란에서 소련에게 밝혔으며 45년 알타회담에서 미국은 20~30년의 신탁통치를 주장했고 소련은 짧게 가지자고 했다. 그해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카이로 회담을 재확인 하는데 그쳤고 45.8.10~11에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38도선을 확정하고 분할 점령하였다.

신탁통치안은 루즈벨트가 구상한 미국의 전후 식민지 처리 방안이다. 이는 식민지가 거의 없는 미국이 식민지 국가에 대한 경제적인 지배를 통해서 이익을 얻기 위한 방법이었다. 특히 한국의 경우 식민지 해방 후 다국적 통치를 시행하려고 하였다.

모스크바 3상회담

모스크바 3상회의는 194512월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의 회의이다. 미국은 임시정부 수립 없이 5년에서 10년 동안 4개국이 신탁통치하자고 제안하였고, 소련은 임시정부 수립과 공동 위원회 개최, 조선의 정당, 사회단체의 참여를 제안하였다. 다른 입장으로 서로 대립을 하던 가운데 1227일 합의문을 발표하게 된다. 신탁통치안의 내용은 임시적인 한국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중 의 4개국이 공동 관리하는 최고 5년 기한의 신탁통치 실시였다.

반탁투쟁

동아일보에서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는 왜곡보도가 나가자 반탁 분위기가 기울었다. 반탁투쟁을 주도한 것은 김구와 중경 임정의 인물들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승만과 한민당 역시 반탁 투쟁에 가담했다. 그러나 김구측은 중경 임정 추대에 열중하였고 이승만측은 단독정부 수립에 치중하였다. 김규식·안재홍등 중도우파와 여운형 백남운등 중도좌파들은 미소공위에 협조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는 반대하였다. 좌익은 처음엔 반대한다는 입장이었으나, 나중에 찬탁의 입장에 섰고 좌우 대립이 심해졌다. 이러한 분위기속에 민족통일 전선을 형성해야 된다는 중도파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모스크바 3상회의를 지지하되 신탁은 장래수립 될 우리정부로 하여금 해결케 한다는 4당 코뮤니케로서 타협점을 찾는 듯 하였으나 한민당과 국민당이 뒤집어 무효가 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1차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다.

미소공동위원회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320일부터 19471021일까지 한반도의 임시정부 수립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한 회의이다. 개최 초기부터 미국과 소련의 의견차이로 인해 갈등을 빚었으며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종결되고 말았다.

내용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이 거세지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합의의 실천을 위해 미소공동위원회를 열었다. 최초의 회의는 1946320일 덕수궁에서 열렸으며 이후 19471027일 소련의 철수까지 계속되었다. 회의 기간 내내 미국과 소련의 대립, 남한 내 제 정치 세력 간의 갈등 등으로 결국 어떠한 합의도 도출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1차 미소 공동위원회

이 회의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협정을 지지하는 정당·사회단체들만이 미소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협의할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소련측의 주장과 신탁통치 반대세력들도 협의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미국측의 주장이 대립해 난항을 거듭했다. 418일 모스크바 3상회의 결의를 지지하는 정당과 사회단체들을 협의대상으로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면서 회의는 타결될 전망을 보였으나 하지 중장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59일부터 무기휴회에 들어갔다

2차 미소 공동위원회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기 위해 특별히 창설된 단체들, 특히 반탁운동 단체들 및 이와 유사한 단체들은 반탁운동 단체에서 정식으로 탈퇴하고 모스크바 협정 및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항하여 싸우기를 중단하지 않는 한 협의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청원서를 제출한 정당 및 단체들 모두에게는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우파에서 이승만과 반탁을 주장하면서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김구, 그리고 그들의 추종세력을 제외한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1947625일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미국 측은 미소공동위원회를 진행시킴과 동시에 좌익세력을 탄압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양면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미국의 좌익세력 탄압에 대해 소련 측 대표는 1947822일 성명을 발표하면서 미국이 최근 모스크바 결정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에 힘쓰고 있는 조선인민을 학살하고 있다고 항의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24일 미소공동위원회 소련대표는 조선 정치가들에게 미국 점령지역의 치안파괴를 노려 불온행위를 조장시키고 있다고 반박했다. 이리하여 한반도 문제는 종래의 방식으로는 어떤 타협도 불가능한 상황으로 빠져버리고 말았으며 분단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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