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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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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0
조회수 : 230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12/06 09:23:16
 
이번 편에서는 진(晉)이 결정적으로 망조가 보이게 된 원인이었던 '팔왕의 난(八王之亂)' 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팔왕의 난이 발발하게 된 원인과
당시 진(晉)의 형국에 대해 서술할까 한다. 시기상으로는 건국시기인 A.D 265년부터 무제(武帝) 사마염이 사망하는 290년 경까지가 되겠다.
 
13861290066XviWtjTM3k5.jpg
 
다시보는 무제 사마염의 초상화
 
 
- 번왕(蕃王)들의 권력 비대화 -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이 동양의 작위제도는 간단하다.
 
황제 - 왕 - 공 - 후 - 백 - .....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라면 황제 아래의 제후들은 왕, 공, 후 등으로 나뉜다.
특히 여기서 '왕(王)'은 황실의 사람들, 즉 황족들이 주로 봉해져 각자의 봉지를 수여받고 그 봉지에서 왕 노릇을 하며 살았다.
 
 
 
이는 진(晉) 왕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삼국시대, 한(漢) 등 황제를 칭한 진시황 이래 중국의 역대왕조가 택한 제도였다.
 
사마(司馬)씨의 진나라도 그러했다.
이 제도에 있어서 뭐 특별히 앞선 시대인 삼국시대와 크게 구별되는 점은 없었지만, 무제 사마염은 한가지 개혁을 추진한다.
 
위의 제목에서 보시다시피, '번왕(蕃王 : 위에서 말한 왕으로 봉해진 황족들을 의미)들의 권력 비대화' 를 꾀한 것이 그 개혁이다.
 
이유부터 간단히 설명하자면 앞선 진(晉)이 계승했다고 여기는 전 왕조인 위(魏) 왕조의 전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였는가 하니..
 
공신세력이 황제와 황실을 감히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편에서 설명했듯이 위(魏)는 사마씨라는 공신세력에 의해 나라가 넘어가 망한 케이스다.
물론 비단 이 위나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역사상 어느 왕조인들 이런 경우가 없겠냐만은.  
 
사실 위(魏)에서 대놓고 공신들의 힘을 키워주는 반면 황족들은 찍어눌렀던 감이 없잖아 있긴 하다.
문제(文帝) 조비(曺丕)가 동복형제들에게 취한 조치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제딴에는 황권 강화를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공신세력인 사마씨의 권력이 강해져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는 나라를 집어삼킨 것이다.
 
이러했기에 불과 몇년 전에 자신의 조부와 백부, 아버지가 나라하나를 집어삼키는 걸 보아왔을 사마염은 그러한 사태가 다시 진나라에서
벌어지는 것을 막고자 상대적으로 황실을 굳건히 하고자 이를 지킬 황족들의 힘을 키워주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힘을 불어넣어주었는지 알아보자.
 
 
위에서 언급했듯, 황족들은 각자의 영지를 거느리며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영지가 중앙인 수도가 아닌 사방팔방 퍼져있는 지방이다. 하지만 그 영지가 속해있는 지방을 다스리고 군권을 행사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장군이나 주자사(州刺史 : '주'를 다스리는 행정관. 군권도 겸임하곤 한다) 등 관리직들이 있었을터.
 
여기서 사마염은 이 황족들에게 파격적인 특권을 부여한다.
 
우선 황족들이 임의로 휘하의 관리를 임명할 수 있게 했다.
 
나름의 행정권도 준 셈이다.
 
 
각 번왕에게 지방의 도독직을 겸임시키거나 적게는 1천에서 많게는 5천에 달하는 병력을 거느리게
함으로써 군권까지 쥐어주었다.
 
여기서 '도독(都督)' 이란 장군직으로서 몇개의 주(州)를 거느리고 관할하는 직책이다.
특히 군권에 있어서는 해당 지역에서의 최고 통수권자가 되겠다.
 
사마주(司馬伷 : 사마의의 9남이다)라는 황족의 예로 보자면..
 
진동대장군 동완왕 사마주는 서주 지역의 모든 군사적인 일을 총감독하면서 하비를 진수하게 하였다.-자치통감 79권
 
밑줄 그인 문구의 관직은 '도독서주제군사' 가 되겠다.
'서주(徐州)'라는 주(州)의 군권을 쥐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오(吳) 정벌 이후의 행보는 이렇다.
 
독청주제군사, 대장군이 되었다.-자치통감 79권
 
이것 역시 같다. '청주(靑州)'라는 주(州)의 군권을 감독한다는 뜻이다.
 
본래는 지방장관 격인 주자사(州刺史)의 권한인 해당 주(州)에서의 군권도 이제는 각지의 번왕들이 행사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거기다 행정권도 얹어서.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왕들의 권한이 강해졌다 하겠지만 사마염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하나 더 얹어준다.
 
이후, 오(吳) 정벌이후에는 제국의 재분열을 막기 위해 지방의 도독직과 자사(주자사를 의미)직을 분리시키면서
번왕의 권력을 통제할 수단은 오직 황제의 권위와 중앙의 군부만이 남게 했다.
 
한마디로 이제 지방에서 왕들을 건드릴 이는 없게 된 것이다. 이쯤되면 거의 하나의 군벌수준이라 하겠다.
그것도 황족들이 한 두명이 아니고 사마씨 성 가진 황족들이라면 죄다 자동적으로 왕의 작위를 부여받게 되니..
 
결과적으로 진(晉)은 각 지방에 수십명의 작고 큰 군벌들이 할거한 형국이 된다.
 
사마염으로서는 나름의 계산을 통해 내린 판단이었을 것이나 사마염 사후, 이 조치가 불러온 여파는 강력했다.
 
 
- 구품관인법과 문벌귀족 -  
 
 
수능에서 세계사 과목을 배우다 보면 중국사에서 '위진 남북조'라 불리우는 시기가 나온다.
풀이하자면 위(魏 : 조조의 그 위나라 맞다)-진(晉 : 이 글에서 다루는 그 진나라다)-남북조(南北朝 : A.D 4~6세기 시기를 싸잡아 부르는 거다) 이렇다.
 
그리고 이 위진남북조 시기를 배우면 항상 붙어 나오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구품관인제문벌귀족 사회라는 것이다.
 
이 구품관인제는 구품중정제라고도 불리우며, 위(魏)에서 시작된 관리등용제도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홉개의 등급(九品)으로 나누어 관리의 점수를 매긴 것이다.
이렇게만 보면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 수없으니 제도의 개념에 대해 설명하겠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서 생겨난 관리등용제도였던 만큼 인재를 출신지방이나 능력에 상관없이 뽑는 것이 이 제도의 취지다.
소위 말해 지방의 초야에 묻힌 인재들을 발굴해내어 해당 지방의 향론, 즉 추천을 감안, (주로 그 인물의 명망이나 재덕이 평가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인재에 대한 중앙에서의 평가를 통해 등용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이는 지방의 여론를 규합한다는 장점도 가져가면서 무엇보다 겉으로 딱 보기에도 알 수 있듯이 실로 괜찮은 등용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엇이든지 무언가를 함에 있어 취지는 좋은 법이다.
 
이 좋은 구품관인법도 점차 때를 타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부정부패에 물들게 된 것이다.
 
제아무리 지방에서의 평이 좋고 추천을 받은 인물이 중앙정부로 나아가도 이미 조정은 '높으신 분'들끼리만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대대손손 고위직을 세습하며 명문가 호족, 중앙의 고위귀족들이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저들끼리 매관매직하며 다 관직을 꿰찬지 오래
것이 당시 조정의 실태였다.
 
일이 이리되니 어느 한미한 가문의 자제는 고위직의 진출을 꿈도 못꾸는 얘기가 되어버리고 조정은 고위가문의 사람들이
저들끼리 해먹는 판국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 제도로 인하여 이득을 보게 된 명문가의 귀족들, 호족들을 지칭하는 '문벌귀족' 이라는 계층이 생겨나게 된다.
 
 
그렇다고 저들끼리 해먹어서 나라나 잘다스렸으면 그나마 문제라도 없겠는데
얘네들이 사치와 향락에 빠지며 과도한 부정부패를 일삼았다는 것 문제였다.
그리고 나름 치세초기에는 성군의 면모를 보였던 황제 사마염마저 물들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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