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생진, 널 만나고부터
어두운 길을 등불 없이도 갈 것 같다
걸어서도 바다를 건널 것 같다
날개 없이도 하늘을 날 것 같다
널 만나고부터는
가지고 싶었던 것
다 가진 것 같다
나희덕, 푸른 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
사랑에서 치욕으로
다시 치욕에서 사랑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네게로 드리웠던 두레박
그러나 매양 퍼 올리는 것은
수만 갈래의 길이었을 따름이다
은하수의 한 별이 또 하나의 별을 찾아가는
그 수만의 길을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나의 생에는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구영주, 헛된 바람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 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처럼
나희덕, 천창호에서
얼어붙은 호수는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불빛도 산 그림자도 잃어버렸다
제 단단함의 서슬만이 빛나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무것도 품지 않는다
헛되이 던진 돌멩이들
새떼 대신 메아리만 쩡 쩡 날아오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일이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