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하, 눈이 멀었다
어느 순간,
햇빛이 강렬히 눈에 들어오는 때가 있다
그럴때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잠시 눈이 멀게 되는 것이다
내 사랑도 그렇게 왔다
그대가 처음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내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될 줄
까맣게 몰랐다
네 앞에 서면
온통 벌판이야
시린 햇빛이야
고개 숙이고 눈 부비다가
돌아서 네 뒤에 서면
온통 저녁이야
짧은 노을이야
고개들고 눈 감다가
또 뒤돌아 네 앞에 서면
다시 온통 저녁이야 시린 햇빛이야
또 뒤돌아 네 뒤에 서면
다시 온통 져녁이야 짧은 노을이야
언젠가
한번은
온전히
너를 바라보고 싶어
온전히 한번
네가 등 뒤에 없는 세월을
살아보고 싶어
안도현, 강
강은 물소리를 들려주었고
물소리는 흰 새 떼를 날려 보냈고
흰 새떼는 눈발을 몰고 왔고
눈발은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은 강을 만들었다
너에게 가려고
복효근, 순간의 꽃
그저 무심히
내가 너를 스쳐갔을 뿐인데
너도 나를 무심히
스쳐갔을텐데
그 순간 이후는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스쳐가기 이전의
세상이 아니다
간밤의 불면과
가을 들어서의 치통이
누군가가 스쳐간
상처 혹은 흔적이라면
무심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너와 나와는
그 무심한 스침이 빚어놓은
순간의 꽃이기 때문인 것이다
문정희, 순간
찰랑이는 햇살처럼
사랑은
늘 곁에 있었지만
나는 그에게
날개를 달아주지 못했다
쳐다보면 숨이 막히는
어쩌지 못하는 순간처럼
그렇게 눈부시게 보내버리고
그리고
오래오래 그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