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철, 연꽃
생물의 주검 온갖 오물들
부패로 질펀하게 흔들리는 늪속일망정
인내의 뿌리 깊디깊게 박고
넌 얼마나
바보 같은 용서의 가슴 가졌길래
그토록 곱게 웃을 수 있느냐
최수홍, 돋보기 안경
나는 내 나이가 몇인가
모른다네
다만 내가 책을 볼 때
돋보기 안경을 써야만
책을 볼 수 있다는
나이가 됐다는 것뿐
나는 내 나이가 몇인가 모른다네
푸른 강물이 흐르고
흰 구름이 지나가고
너울너울 춤추는
황혼에 바람이 스쳐서
저 멀리 돌고 돌아온
길고도 긴 세월이 나도 모르게
살며시 내 옆에 놓고 간 게
돋보기 안경이라네
천상병, 편지
점심을 얻어먹고 배부른 내가
배고팠던 나에게 편지를 쓴다.
옛날에도 더러 있었던 일.
그다지 섭섭하진 않겠지?
때론 호사로운 적도 없지 않았다.
그걸 잊지 말아 주기 바란다.
내일을 믿다가
이십 년!
배부른 내가
그걸 잊을까 걱정이 되어서
나는
자네한테 편지를 쓴다네
박두순, 꽃을 보려면
채송화 그 낮은 꽃을 보려면
그 앞에서
고개 숙여야 한다
그 앞에서
무릎도 끓어야 한다
삶의 꽃도
무릎을 끓어야 보인다
고은, 삶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 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