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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맥아더, 그는 한국을 구한 영웅인가?
게시물ID : humorbest_688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나그네
추천 : 51
조회수 : 5727회
댓글수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4/11/09 14:45:19
원본글 작성시간 : 2004/11/09 00:40:11
더글러스 맥아더, 무너진 환상 작금의 현대사중에서도, 한국전쟁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필자에게, 더글러스 맥아더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 속에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드라마를 창조해 낸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커다란 축이었다. 그러던 차, 미국인에 의해 쓰여진 더글러스 맥아더 관련서적을 접하게 된 뒤, 필자 마음속의 그 커다란 축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영웅에 대한 혹평이 아닌, 과대포장 되었던 한 군인의 삶을 읽어보면서 느꼈던 것들을 몇 가지 적어보도록 하겠다. [책의 표지를 장식한 더글러스 맥아더의 사진. 그의 아이템인 옥수수 파이프를 물고 있다.] The Life For The Fame 그의 삶을 관통했던 키워드, 명예 대부분의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인상과는 달리, 객관적인 관점에서 다가간 더글러스 맥아더의 삶은 명예의 추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맥아더의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의 정상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그의 40대,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전후 필리핀에서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에서 발버둥쳤던 50대. 그리고 공산주의국가들을 향한 세계대전을 부르짖었던 그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군인이면서 정치가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당시의 첨예한 동서대립, 즉 냉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뒤로 했던 맥아더는 서방의 강대국 미국의 군인이면서도, 자국의 정치논리에 스스로를 옭아매면서 마땅히 추구해야할 자국의 군사적 승리를 내팽겨쳤다. 그리고 이러한 맥아더의 모습은, 필자가 가장 관심있게 읽었던 한국전쟁에서, 마지막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The Korean War in His Life 맥아더에게의 한국전쟁의 의미 한국전쟁이 냉전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한 복잡다단한 스펙트럼이란 사실은 새삼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스펙트럼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필자 본인도,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국이, 당시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38선일대의 전선을 유지시키기 위해 애를 썼으며, 또한 이것을 진두지휘한 것이 맥아더장군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것이 사실이지만, 필자나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한국전쟁은 더 복잡하고 당황스러운 의미를 지니고 있던 전쟁이었다. 전쟁 초기의 초고속 패주에도 불구하고, 한국군과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성공적인 작전으로 1950년 9월 서울을 탈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작전이후 맥아더장군이 한국전쟁에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중공이 참전할 가능성에 대해 매우 낮게 보았고, 중공의 참전을 우려한 당시 대통령 트루먼이 38도선 이북에서의 미군의 군사행동을 제한토록 한 조치를 간단히 깔아뭉겠다. [인천상륙 작전당시 맥아더의 모습] 결국 중공이 참전하게 되면서 전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리지웨이와 밴플리트장군으로 지휘관이 교체된 이후, 한국군과 미군을 축으로 한 유엔군과 중공,북한군은 결국 38도선 근처에서 소모전을 계속하게 되었고,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속에서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맥아더장군과 미국정부는 과연 한국전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가? The Age of The United States : Truman and MacArthur 미국이 지배하던 시대, 미국을 지배하던 그들 : 트루먼과 맥아더 대한민국이 독립하고 남과 북으로 나뉘어질 당시 미국은 한반도자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과 타이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으며, 맥아더 역시 실패로 점철된 일본점령사령관을 내팽겨치고 타이완으로 가서 중국과 전쟁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38선을 정한 뒤, 맥아더는 하지 중장을 남한으로 보내긴 했지만, 하지장군의 여러 가지 고민을 무시하면서, 한반도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맥아더는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가능성을 본국에 타전하긴 하였으나, 이는 오로지 점령국 일본의 안전을 염려해서 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맥아더는 북한군의 전력을 아주 우습게 보았으며, 더불어 트루먼행정부의 뿌리깊은 맥아더불신으로 인해, 한국전쟁 초기, 한국군과 뒤이어 도착한 미군은 힘겨운 싸움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도박이라 여기어졌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이후, 맥아더는 도쿄에 앉아 이후의 작전을 지휘했지만, 사실상 안하니만 못한 작전들의 연속이었다. 더불어 트루먼행정부의 경고를 무시한 맥아더의 행동은 중공의 참전을 불러오게 되었고, 이에 맥아더는 한반도에서 미군의 철수를 주장하게 된다. 트루먼행정부역시 당시 막 창설단계이던 NATO에 힘을 쏟으라는 유럽의 압력으로 아시아에만 전력을 기울일 수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한반도에서의 철수를 심각하게 고려하였지만, 다행히 미8군사령관으로 새로 임명된 리지웨이 장군의 활약으로 전쟁이전의 경계선(38도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필자는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 큰 비중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막 부흥중인 유럽을 소련과 중국이 공략하는 것에 대해 더 신경을 썼음을 알 수 있었으며, 맥아더 역시 한국전쟁중 서울에 머문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전쟁의 흐름이, 미국의 정치에 크게 종속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과대포장 되었던 군인의 삶은, 당시의 정치상황까지도 보기 좋게 포장해버린 셈이다. Korean Peninsula, The Legacy of Coldwar 냉전의 유산, 분단된 한반도 어찌 보면 시대의 피해자이기도 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써, 책을 보는 동안 분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더불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결국 피해자가 될 뿐인, 국제사회의 냉혹한 법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겨우 몇 명의 정치가와 군인들 사이의 이해관계사이에서 발생한 문제가 지금 7천만명에 이르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그건 영웅으로 점철된 맥아더의 그림자를 보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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