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규, 풀밭에서
풀잎들이 한 곳으로 쏠리네
바람 부니 물결이 친다고?
아니,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야
그해 팔월엔 어땠는 줄 알아?
풀잎들은 제자리에 미동도 없이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았었다
풀 비린내에 내 가슴은 뛰고
지평선은 환하게 더욱 넓게
시간이 멈추곤 했기 때문이야
이리와, 껴안아줘
김재진, 짧은 봄
인연이라고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연이 다했다고 말했다
함께 바라보던 등대의 불빛은 꺼지고
바다는 어두웠다
표선으로 가는 길에 봄이 짧았다
하재연, 픽션보다
웃음을 떠올렸던 순간은 순식간에
일어난 듯 바뀌어서 사라진다
떨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아침 햇빛이 이상하게 비춘다
꿈속에서 나는 아주
여러 번 살아왔다
내가 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최영미, 연인
나의 고독이
너의 고독과 만나
나의 슬픔이
너의 오래된 쓸쓸함과 눈이 맞아
나의 자유가
너의 자유와 손을 잡고
나의 저녁이 너의 저녁과 합해져
너의 욕망이 나의 밤을 뒤흔들고
뜨거움이 차가움을 밀어내고
나란히 누운, 우리는
같이 있으면 잠을 못 자
곁에 없으면 잠이 안 와
유진, 소낙비
여름 끝자락에 내린 소낙비는
너도, 나도
젖게 만들었다
너는 옷이 젖고
나는 마음이 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