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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2
게시물ID : history_129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2
조회수 : 143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3/12/11 02:27:05
- 유홍과 그 이후의 반란들 -
 
 
태안(太安 : 서기 303년) 원년 6월, 남만장사(南蠻長史) 도간(陶侃)을 대도호, 참군 괴긍을 의군독호, 아문장 피초를 도전수로 삼아 진격하여 양양을 점거하였다. - 진서 유홍전
 
 
조정의 명을 받아 장창의 토벌에 나선 유홍은 형주(荊州)의 주도(州都)이자 장창에 의해 함락되었던 양양(襄陽)을 탈환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윗 기록에서 도간(陶侃)이란 인물을 강조해 두었는데, 이 도간의 행적을 보면 장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며 진압하고 평정한 반란들이 있는데 역시 진(晉) 말기에 벌어진 것들인지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열거해보면 이렇다.
 
 
서기 303년, 양주(楊州)에서 장창의 난에 호응하여 일어난 석빙(石氷).
 
석빙.jpg
 
석빙이 일으킨 반란의 범위.
주 무대가 양주(楊州)였다.
 
서기 304년, 석빙이 토벌된 이후에 다시 양주에서 반란을 일으킨 진민(陳敏).
 
서기 304년, 또 양주의 광릉(廣陵)이란 곳에서 자신을 '팔주도독(八州都督 : 여덟개의 주를 감독하는 직책)' 이라 칭하며 궐기한 전회. 
 
서기 307년~308년, 형주(荊州)에서의 두증(杜曾), 호항(胡抗)의 반란. 두증과 호항은 원래 각기 진(晉)의 관리와 무장(호항은 앞서 장창에게 죽은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의 부하장수였다)이었으나 중앙의 혼란을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경우다.
 
 
장창(張昌)의 난과 동일시기나 이후로도 갖가지 반란이 속출했음을 알 수있다. 
 
102226oe9te77gevrvea39_jpg_thumb.jpg
 
 (晉)에서 일어난 역대 반란들의 위치도다.
 지도가 작아 잘은 보이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사천성 지역, 당시의 익주(益州)지역에
 이특(李特)이라 쓰여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다루고 있는 장창(張昌)은 오늘날
 중국의 호북성 일대에 표기되어있다. 그 밖에도 예전에 쓴 독발수기능도 감숙성 쪽에 명시되어있고,
 산동지방의 왕미(王彌), 남양의 왕여(王如)와 같이 나중 영가의 난을 쓰면서 나올 인물들의 이름도 잘 찾아보면 보인다.
 
내친김에 도간의 이후 행보도 보자. 
 
영가의 난이 발발한 무렵에는 형주의 강하군(江夏郡 : 11편에서 대풍작이 들었다는 그 동네다)을 지켜내어 나중에는 동진(東晉 : 이 글에서 다루는 진(晉) 왕조가 영가의 난으로 멸망하자 그 명맥을 이은 국가다. 지금까지는 그냥 진(晉)이라 써왔는데 훗날의 사마예(司馬譽)가 건국하는 동진(東晉)과의 구별을 위해 역사에서는 서진(西晉)이라 부른다) 을 섬기어 고위직을 역임한다.
 
참고로 이 도간은 동진(東晉)의 시인이자 특히 <귀거래사>란 시로 유명한 도연명(陶淵明 : 이름은 도잠(陶潛)이고 자(字)가 연명(淵明)이다. 흔히 도연명이라 부른다)의 증조부다.
 
도간.jpg
 
도간(陶侃)의 초상화.
서진(西晉)과 동진(東晉), 양진(兩晉)을 섬긴 중신으로서
이후 강남에서 아직 기반을 잡지 못한 동진(東晉)을 내란과 
외침으로부터 굳건히 지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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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陶淵明). 본래 이름은 도잠(陶潛)이고 자(字)가 연명(淵明)이다.
흔히 도연명이라 부른다. 도간의 증손자이기도. 증조부가 '무려' 동진(東晉)의 공신 도잠이었기에
그 음덕으로 그 역시 동진(東晉)에서 벼슬을 살지만 일찍이 품고있던 제세구민(濟世求民)의 포부와는
달리 동진(東晉)의 부정부패도 서진(西晉)과 도진개진이었는지 현실에 낙심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다 <귀거래사>라는 시구만을 홀연히 남기고 낙향하여 자연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저 반란군들의 최후는 다음과 같다.
 
 
양주(楊州)의 반역자 브라더스인 석빙, 진민, 전회는 도간에게 죽었고, 두증과 호항은 저들끼리의 내분으로 두증이 호항을 살해하고 그 호항의 세력을 흡수한 두증은 토벌나온 진군(晉軍)을 차례로 격파하며 심지어는 명장(明將)이라는 도간도 한번 박살내기까지 한다. 한창 기세등등 했지만 결국에는 토벌당해 참수당하고 만다. 다만 두증은 그 이후로도 활개치다 동진의 토벌로 서기 319년에 죽었다.
 
 
비단 장창의 난만이 끝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다시 유홍(劉弘)의 토벌로 돌아가자면..
 
 
 
양양(襄陽)을 탈환한 유홍은 그 공로로 형주자사(荊州刺史)로 임명되어 형주(荊州)의 장창군을 소탕하고 전란으로 피폐해진 형주를 재건하는 일에 나선다. 전쟁을 치루다보니 이것저것 결제할 것도 많거니와 관청의 업무나 기록이 분실되고 구멍난 것이 많았는데 유홍은 이를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산다. 
 
거기다 백성들을 구휼하며 양잠(아시겠지만 누에를 사육하여 실을 뽑는 작업이다)과 농사를 권장했고(백성들의 생업재건을 도왔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궁핍한 것을 감안해서 세금을 가볍게 하는 등의 훈훈한 선정(善政)을 펼쳐 형주의 백성들로부터 큰 인망을 얻는다.
 
이 밖에도 유홍의 선정(善政)에 대한 기록은 더있다.
 
난(亂)을 피해 형주로 이주한 무리가 10만여명이 넘었고, 고향을 떠나 대부분이 궁핍하고 가난하였다. 도적이 되어 소란을 피우자, 유홍은 그들에게 밭을 지을 땅과 종자(種子)를 주었고 그 중에 재능이 있는 자는 발탁하여 등용했다. - 진서 유홍전
 
옛 제도에서는 두 산의 골짜기가 있는 큰 못에서 백성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금지했지만, 유홍은 문장을 내려 예기에서는 명산의 큰 못을 봉쇄해서는 안되고 백성과 그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고 했다. - 진서 유홍전
 
첫번째 기록은 보시는 바 그대로고, 두번째 기록은 전란으로 인하여 식량이 부족하니 법으로 금지된 어업(漁業)이라도 시행케 하여 백성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유홍의 뜻이다.
 
거기다 성품을 보여주는 기록도 있다.
 
 
익주(益州)가 혼란해 나상(羅尙)이 별가 이흥을 파견해 양식을 요구하자, 유홍의 강기는 양식을 운반하는 길은 어렵고 형주에도 양식이 부족하다 하여 거절하고 영릉의 쌀을 주고자 했는데, 진남장군 유홍은 "천하가 한 집안이니 서쪽을 돌아보아야 할 근심을 없애야 한다" 면서 3만 곡의 양식을 보냈다. - 진서 유홍전
 
 
우리의 평서장군님 나상께서 이웅(李雄)과의 싸움에서 개박살이나 익주 어느 한구석에 쳐박혀 형주의 유홍에게로 SOS를 쳤지만 유홍 밑의 강기라는 사람이 형주도 곡식이 부족하니 안되겠다는 식으로 거절하자 유홍이 나서서 대인배다운 멘트와 함께 나상을 도왔다는 기록이다. 유홍이 말한 '서쪽' 이란 서쪽의 익주를 이르는 말이다.
 
당시 유홍이 다스리는 형주의 유민도 10만여명이 넘어갔다고 바로 윗 기록이 보여주는데, 그들을 먹여살릴 쌀 낱알 하나 하나가 아쉽고 부족하여 아까운 마당인데다 그때와 같이 혼란스러운 시기엔 남을 돕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지방관들끼리도 자신이 다스리는 주를 반란군으로부터 지켜내기 급급했지 다른 주를 돕기는 실상 어려운 상황이었던 것인데, 다른 주(州)를 구원하고자 무려 3만곡의 양식을 보낸 것은 순전히 유홍의 훌륭한 성품 덕분이라 하겠다. 
 
 
유홍이 어느날 잠을 깨, 성벽의 보초가 고통에 찬 탄식을 하자 이를 듣고 불렀더니, 보초는 나이가 예순을 넘어 피로에 수척했고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유홍이 이를 불쌍히 여기고 그에게 감시 역할을 시킨 자를 꾸짖어 처분하고 보초에게 모자와 옷가지를 주면서 다른 부서로 옮겼다. - 진서 유홍전
 
 
달리 해석이 필요없다. 그냥 유홍이 짱이라는 거다.
 
 
또 이런 기록도 있다. 어떤 사람이 유홍에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자를 뽑도록 권하자, 유홍이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황제(혜제 사마충)께서는 난리(팔왕의 난)로 고생하고 계신데 한낱 신하인 내가 어찌 음악을 만드는 자를 뽑아 음악을 즐기겠는가?" 간만에 정상적인 인물을 보는 것 같아 정신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참고로 이후 유홍(310년에 사망)이 죽었을때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형주의 사람들 치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그를 보여주는 기록들은 많다. 필자도 그 일화들과 기록을 모두 싣고 싶지만 그랬다간 졸지에 <유홍전>을 작성하게 생겼으니 이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 난(亂)의 종결 -
 
 
유홍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로, 전세는 역전된다.
 
유홍이 유능한 지휘관이기도 했지만 뭣보다 장창(張昌)과 그 세력을 이루는 무리가 원래 목불식정의 무지한 유랑민들이었던 탓도 있다.
 
전편에서 서술했듯 장창은 황제를 옹립하고 정권을 세워 연호를 정하고 관직을 정하는 등, 나름의 제도를 갖추었다지만 그 관직에 임명된 인간들은 칭호만 장군이다 대신이다 하며 거창하게 갖다 붙인 무지렁이 농민들이나 유민들에 불과했을 뿐이다.
 
농사만 짓던 농민을 갖다가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하여 하루아침에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나 잡고 살던 어부를 데려다 칼을 쥐어주고 장군으로 삼았다고 해서 병법에 능하고 싸움 잘하는 거 아니듯이, 장창이 세운 정권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느낌이 농후했다.
 
무식한 자들이 넘쳐나니 그 사이에서 싸움이 붙고 불화가 일어 결국에는 분열되기 시작한다.
 
이 상황에서 진(晉)의 소탕이 시작되어 자중지란으로 패색이 짙어져가던 장창군은 이 일격에 풍비박산으로 깨져버린다. 그 거대했던 세력에 비해 순식간에 무너졌다.
 
무려 다섯여개의 주(州)에 뻗치던 그 넓던 세력권도 조정의 토벌에 급속하게 줄어든다. 몇 차례 대규모 교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모두 장창의 패배로 끝나고 조정에서는 토벌군 사령관 유홍의 뒤를 받쳐주고자 예주자사(豫州刺史) 유교(劉橋)란 이를 보내 동쪽에서 치고 들어가게 시켰고 유교도 선전하여 강하군을 탈환하고 장창이 세운 괴뢰국의 황제, 유니(劉尼 : 전편에서 장창이 뽑아 만든 황제 구심(丘沈)이란 남자다. 따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구심은 성씨도 바꾸면서 이름도 '니(尼)'로 바꿨었다.)를 죽이니 장창은 하릴없이 포기하고 도주한다.
 
 
서기 304년, 가을. 진(晉)의 연호로는 영흥(永興) 원년.
 
 
장창은 하준산(下俊山)이라는 어느 산의 숲속에 숨어있다가 추격군에 의해 체포되어 곧 처형당한다. 장창이 죽음으로서 약 1년여간에 걸쳐 다섯여개의 주를 쑥밭으로 만들며 난리피우던 장창의 난은 종결된다.
 
 
 
전편의 마지막에서 밝힌 내용이기도 한데, 이 장창의 난이 팔왕의 난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바 있다.
 
 
거의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팔왕의 난이라는 중앙에서의 뻘짓이 지방에서 불거진 장창의 난이 가속화 되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랄까.
 
 
형주를 다스리며 학정을 일삼았다는 신야왕(新野王) 사마흠(司馬欽)을 기억하실 것이다. 사마흠은 당시 팔왕 중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과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사마경이 다른 번왕들에게 싸움에서 패해 죽자, 사마흠은 행여나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미칠까 두려워 했다. 연좌될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사마경을 죽인 번왕들 중 한명인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에게 붙기로 한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치소(治所) 형주에서 장창의 반란이 일어나자 사마흠은 급하게 당시 대권을 쥐고 있던 사마영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때 사마영은 장사왕(長沙王) 사마애(司馬乂)와 대치 중이었던지라 중앙에서의 병력을 함부로 뺐다간 자칫하면 힘의 균형이 깨져버릴 우려가 있었기에 사마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거기다 사마애가 사마영과 사마흠, 이 두 번왕이 편을 먹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심을 시작해 관계를 의심당하자 이를 꺼려한 사마영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겉으로 보이도록 사마흠의 청을 묵살한 점도 있었다.
 
중앙에서의 지원을 받지 못한 사마흠은 할수없이 스스로의 병력만을 이끌고 장창을 요격하러 출전하지만,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패사하고 만다. 만약 사마영이 원군을 보내줬더라면 난 초기에 형주에만 국한되어 있던 장창의 반란을 초장에 진압하고 끝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중앙의 권력싸움이 지방에서의 반란을 외면하는 탓에 사태가 심각해진 것이다.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도 한몫 한 바있다. 조정에서 한창 불거지던 장창의 난을 두고 사마옹에게 이를 토벌할 것을 지시한다. 그때 사마옹은 옹주(擁州)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에 그 옹주(擁州)의 병력을 이끌고 가라 했다. 하지만 이 사마옹도 위의 사마영과 같은 속내였다. 다른 번왕들과 힘싸움을 하기도 벅찬 마당에 자신의 친위사병들을 제국의 변두리에서의 쓸데없는(사마옹 기준) 싸움이 소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휘하의 옹주자사(擁州刺史) 더러 "니가 가라 하와이" 심보로 대신 등떠밀어 보낸다. 졸지에 상관 사마옹의 지시로 출전하게 된 이름없는 옹주자사(이름을 알길이 없어 그냥 직책으로 대신한다)는 어쩔 수 없이 사마옹이 내어준 병력만을 데리고 출전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사마옹이 계속해서 압박을 넣은 탓이었다. "내 소중한 병사들이니까 피해 입히지 말고 대충 싸워." 이런 식으로 행패를 부리니 옹주자사로서는 실로 어찌 할바를 모르고 전장에 나와도 임무를 수행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결국 사마옹은 그 병력마저 다시 탈취해버린다. 온갖 농간과 훼방 끝에 얻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그 덕에 장창은 마음껏 활개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엔 IF란 없다라지만, 당시 장창 반란군의 초기 규모와 팔왕이 거느리고 있던 병력들을 종합하여 감안해보면 팔왕들이 그 사태를 외면만 하지 않았더라면 장창은 초반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전성기에 가서야 겨우 몇만명의 무리를 이루는 반란군의 초기규모가 크면 얼마나 컸겠는가.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을 법한 얘기다.
 
거기다 반란군의 구성군도 일개 백성부터 유랑민, 임오병이라고 불리우는 긴급 징병대상자들 뿐이고 반면에 팔왕이 거느린 친위군들은 모두가 독발수기능, 제만년(齊萬年 : 이 글에서는 따로 밝히지는 않았는데 서기 299년 경에 반란을 일으킨 강(姜)족이란 이민족의 우두머리다. 옹주(擁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번왕들에 의해 제압되었다)과 같은 여러 이민족들과 교전한 경험이 있으며 무엇보다 팔왕 자신들끼리 줄기차게 싸움을 벌이지 않았던가. 당시 친위군은 전투경험 많은 노련한 정예부대 수준이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 장창의 난도 팔왕의 난이라는 사태가 나라를 말아먹은 희대의 병신 뻘짓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각인 시켜준 사건이라 하겠다.
 
 
아무튼 서기 304년 혜제(惠帝)의 대에에 진압된 장창의 난을 이후로도 반란들은 계속해서 일어난다. 307년 출범한 회제(懷帝) 사마치의 치세에까지도.
 
다음 글부터는 본격적으로 영가의 난이 벌어진 배경 대해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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