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군사 반란(- 軍事 叛亂) 또는 12·12 사태(- 事態)는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한 사건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은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후 1980년 5월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사실상 장악했고, 5·17 쿠데타에 항거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전두환은 8월 22일에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고 1980년 9월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이 됐다.
10·26 사건 이후 각 군 수뇌부들은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심점으로 국가의 보위와 안녕을 위해 일치단결하기로 결의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10.26 사건을 수사했다. 하지만 10.26 사건 당시 정승화가 현장 가까이 있었고 범인인 김재규와 평소 친분이 두터웠기 때문에 정승화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증폭됐다.
1979년 11월 6일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은 10·26 사건 수사를 마치고 김재규의 단독 범행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에 도착 후 신속한 조치를 취함으로써 문제가 확대되지 않고 질서정연히 사태를 수습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발표문을 보면 정승화 총장의 일거일동을 알 수 있다"면서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말을 듣고 중앙정보부로 갔으면 큰 혼란이 초래되었을 것이다. 정총장이 육군 본부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1]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총장이 무혐의라는 발표를 뒤집으면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묵시적으로 동조했다는 혐의를 내세우며 12.12 반란을 일으켰지만,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군내의 반발을 무릅쓰고 계엄사령관을 강제 연행한 실제 이유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동해안경비사령관으로 전보 발령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통령 박정희의 총애를 받아 주요 보직을 독점해온 일부 정치군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육군참모총장 대장 정승화가 ‘인사조치안’을 작성하여 실행하려고 계획했기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2]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은 11월 중순부터 정승화 총장을 제거하고 군부를 장악할 계획을 세우고, '하나회'를 비롯한 동조 세력 규합에 나섰다. 허화평 보안사 비서실장, 허삼수 보안사 인사처장, 이학봉 보안사 대공처장, 장세동 제30경비단장, 김진영 제33경비단장 등 영관급 후배의 동조를 얻어 모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11월 말 경 전두환은황영시 제1군단장, 노태우 제9사단장, 백운택 제71방위사단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공수여단장 등 선후배 동료 장성과 거사를 협의했다. 12월 8일 전두환은 이학봉 중령으로부터 정승화 총장 연행은 일과 시간 후 총장 공관에서 실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첨부된 세부계획서를 전달 받고, 이를 확정한 후 허삼수와 우경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3]
12월 12일 오후,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노태우, 황영시 등 규합한 동조세력을 장세동이 있던 경복궁 내 수도경비사령부 여하 제30경비단 단장실로 모이도록 한 후 시내 일원을 장악하기로 한 계획을 지시, 논의했다. 같은 날 오후 6시, 전두환은 최규하 대통령에게 육군참모총장 체포안에 대한 재가를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와 동시에,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허삼수와 우경윤 책임 아래 정총장 연행계획이 진행됐다. 오후 7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하기 위해 병력이 투입됐으며,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오후 7시 21분, 정총장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강제 연행됐다. 21시 30분경, 전두환, 유학성, 황영시 등은 다시 국무총리공관으로 가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집단으로 정승화 총장의 연행 · 조사를 재가해 달라고 재차 요구하였으나 다시 거절당했다.
이후, 신군부 세력은 육군 참모총장의 강제연행이 부당하다며 원상복귀를 주장하던 3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하소곤 소장 등에 대해 하극상의 대항을 감행하고,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며 연행했다. 하나회 회원이던 박희도 준장이 이끄는 제 1 공수특전여단 병력과 최세창 준장이 지휘하던 3 공수특전여단, 그리고 장기오 준장의 지휘관이었던 제 5 공수특전여단 병력이 서울로 출동했다. 또한 노태우 소장은 자신의 지휘관이던 9사단 29연대 병력을 중앙창 앞에 집결시켰다.
박희도 준장의 제 1 공수특전여단은 행주대교에 있던 30사단 병력을 무력화시킨 후 곧장 서울로 향해 달려갔다. 얼마 후, 1 공수여단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공격, 경비병들을 무장해제 시킨 후 국군 수뇌부를 체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방부 청사에서 노재현 국방장관을 찾은 후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끌고갔다. 한편 최세창 준장의 제 3 공수특전여단은 부대 영내에 있던 특전사령부를 완전히 장악,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을 생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사망했다.
결국 보안사령관 전두환의 의도대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최규하 대통령에게는 세 차례 걸쳐 10시간 만인 13일 새벽 4시, 사후 재가가 이루어졌다. 12월 13일 오후,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담화문을 통해 10.26 사건 연류 혐의로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고 이와 연관된 일부 장성 또한 구속됐으며, 정승화의 육군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직에 이희성 육군 대장이 임명되었음을 발표했다. 12.12 사건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사실상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을 직접 임명하고 6인 위원회를 통해 군부의 인사를 조정하여 군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권력 공백기에 최고 실력자가 됐다.[4]
당시 미국은 12.12 사태 직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50% 정도로 판단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12.12 사태 발생 8일후인 12월 20일 작성한 `남한내 불안정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라는 특별 상황판단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5]
또한, 미국 정부는 신군부가 평시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간의 합의를 위반한데 대해 백악관과 미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대한민국의 민간정부만을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해 신군부 세력과 긴장감이 고조됐다. 하지만 보름 뒤 신군부 세력에 대한 비판 어조는 다소 누그러져, 사실 상 군부 내 반란을 묵인했다.[6]
1979년 12월 2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김일성 주석은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지금 남조선에서는 군 수뇌부가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연락부와 인민무력부에서는 언제든지 신호 만 떨어지면 즉각 행동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24시간 무휴상태로 들어가야 합니다."는 반응을 보였다.[7]
12·12는 숙군 목적을 띤 군내부의 반란이었다. 정권을 탈취한다고 하는 의미로의 쿠데타에 해당하는 것은 오히려 1980년의 전국 비상 계엄령으로부터 광주민중항쟁에 이르는 과정(5.17 쿠데타)이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최규하를 사임시키고 신군부가 실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1980년 1월 군장성들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이후에도 공사석에서 12·12 군사 반란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했던 장성들은 내쫓기거나 보직이 변경되는 등, 군부가 정권장악의 도구로 이용될 준비가 갖추어졌다.[8] 미국과의 관계는 신군부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주한 미군사령관 존 위컴 장군은 군사 반란을 인정하지 않았다.[9]
박정희 정부 시대와 비슷한 군부 체제를 형성하려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5월 중순부터 대규모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1980년 5월 17일 군사 쿠데타에 의한 전국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다. 5월 18일부터 이에 항거한 광주민중항쟁이 발생하자,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5월 24일 김재규 등 박정희 피살 관련자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즉결심판으로 처형됐다. 같은 해 8월,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사임했고 9월 1일에는 전두환 장군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10]에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국보위는 헌법을 개정했고, 제5공화국이 성립되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김영삼 대통령은 12·12 사건을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이라고 규정했다.[11] 박계동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시작된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고발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년 12월 검찰은 12·12 사건은 군사반란이 맞지만 국내의 혼란을 우려하여 기소 유예 처분한다고 발표했다. 12.12 사건 기소 유예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심판 청구사건에서 헌법재판소는 1995년 1월 20일 12·12사건 기소유예처분취소청구에 대하여 각하 및 기각 결정을 내렸다.[12] 1995년 7월 검찰은 5ㆍ18 사건은 전두환의 정국 장악 의도에 진행됐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기소하지 않았다. 이후 국회에서 5·18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신군부 인사들의 새로운 혐의가 발견되자 검찰은 1995년 12월 12·12, 5·18 사건 재수사에 나섰다. 결국 전두환,노태우 등의 신군부 핵심 인사는 1월 23일 5·18 사건에서의 내란혐의로, 2월 28일 12·12 사건에서의 반란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12·12, 5·18 사건 재판 1심에서는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다. 고등법원에서는 전두환에게는 무기징역으로 감경했다.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2·12 군사반란에 대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등에게 반란죄를 인정했다. 대법원은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국민투표를 거쳐 헌법을 개정하고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가를 통치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군사반란과 내란을 통하여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하여 헌법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 보복은 없다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김영삼 대통령의 합의에 따라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은 12·12, 5·18 사건 관계자를 특별 사면했다.
수도경비사령부
특전사령부
사단 및 군단 사령부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해군본부, 한미연합사령부, 국방부
“ | (12.12 군사 반란 이후) 전두환이 쪽지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이라고 적혀 있기에 불쾌해서, '누구 마음대로 총장을 임명하느냐'고 화를 내었더니, 유학성이 제 손을 잡아끌고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가 「이 난국을 수습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 총장을 맡아 달라」고 간청하여 맡았다. | ” |
— 이희성, 1995년 검찰 조사와 12.12 5.18 재판 2회 공판에서 |
“ | 내가 보안사에 붙잡혀 들어가자 집사람이 생각다못해 전두환 장군의 부인 이순자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집사람은 이씨와 아우 형님 하면서 잘 지내온 사이였다. 집사람이 '어떻게 남편을 살릴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하자, 이씨는 '우리 형편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인정을 안해줘 남편의 일이 실패해서 졸도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전장군은 위컴 사령관이 12·12 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인사를 통해 분명히 전해오자 크게 상심했다는 말을 나도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