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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을 통일한 진(晉) 제국 - 13
게시물ID : history_129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3
조회수 : 188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3/12/11 14:21:42
 
중국 역사상 한(漢)족이 이민족에게 패해 무릎을 끓은 굴욕사건이 세가지 있다.
 
그 하나가 정강의 변이라 하여 북송(北宋)시대에 여진족의 금(金)이 쳐들어와 북송을 쳐부수고 황제를 포함한 황족들을 포로로 잡아버린 사건이고, 두번째는 토목의 변으로 명(明)나라 때 북원(北元), 즉 몽골 쳐들어오자 이를 요격하러 나간 황제를 포함한 휘하 병력이 대패하고 정강의 변과 마찬가지로 황제는 사로잡힌 변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바로 영가의 난 되겠다.
 
중국의 한족 왕조가 그토록 오랑캐라 멸시하던 이민족들에게 단순 패하는 수준이 아니라 나라가 유린당하고 황제가 붙잡히는 수준의 수모를 당해 이를 굴욕사건이라 치부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콧대높은 한족을 짓밟아드린 주인공들은 앞서 밝힌대로 여진족, 몽골족이었다. 
 
그렇다면 영가의 난 경우는 대관절 어떤 오랑캐들에게 당했는가 하니, 바로 흉노(匈奴)라 불리우는 자들에게 털리셨다.
 
 
 
- 흉노와 진(晉) -
 
흉노샷.jpg
 
흉노(匈奴). 중국 북부 내지 몽골고원과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일어나 좁게는 아시아, 넓게는 유라시아 대륙까지 활동하며 '마장(馬將)'을 뜨고 다니신 유목 기마민족이다. 특히 고대 중국과는 그 관계가 변화무쌍했다. 한족의 역대왕조들은 이 흉노정책에 있어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가며 대했고 흉노도 저들 꼴리는대로 행동하여 중국에 시비걸거나 그들 장단에 맞춰주기도 했다. 
 
 
아무리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흉노란 말은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중국사, 특히 고대 중국사에 있어서는 당시 고대 중국과는 실로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던 이민족이었다. 특별히 정해진 외교관계는 없었다. 다만 고대 중국의 역대왕조들이 당시의 대외정세나 형국에 따라 흉노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필요하면 구슬리는 식의 당근과 채찍 외교로 일관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정해진 원칙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로부터 중국은 이 골치아픈 이민족들을 상대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벌였다. 당장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이 종잡을 수 없는 민족과 상종조차 아니 하려고 만리장성이란 담을 쌓았고,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도 흉노를 배척하여 정벌에 나서지만 되려 패하는 굴욕을 당하는 한편, 한(漢)의 무제(武帝)도 선조인 고조 유방의 흉노 정책노선을 밟아 강성해진 흉노를 짓누르기 위해 정벌하였으며 그 유명한 장건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서역국들과 군사동맹을 맺고 흉노를 견제하고자 하기도 했다. 하지만 힘으로 제압하기가 귀찮아지자 이쁜 궁녀(궁녀의 이름은 왕소군이라 하여 그녀의 사연은 꽤나 유명하다)를 보내 달래며 유화책을 펼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흉노와 중국이 마치 서로 대등한 입장으로 외교를 한 것처럼 보이지만(물론 흉노가 한창 강성할때는 그랬고 여러모로 중국에게 굴욕을 안겨다 주기도 했다), 중국이 워낙 대국이고 흉노는 제아무리 강하다 해도 북방의 유목민족 수준에 불과했기에, 중국이 주로 흉노에게 베풀고 하대하는 입장이었다. 하대한다고 해서 상전이 아랫것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중국이 형이 되고 흉노가 아우가 되는 식의 형제 관계(실제로 그렇게 관계를 맺기로 조약까지 맺었다. 이에 관련해서는 나중에 한번 언급할 일이 있는데 그때 써보도록 하겠다)를 맺어 살가운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통일왕조를 오랜세월 유지하며 국력이 축적된 중국과 흉노 간의 힘의 균형은 깨지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중국이 흉노를 관할하고 감독하는 입장이 되어버렸고 흉노는 더이상 중국에게 그리 큰 위협요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서는 조조(曹操 : 삼국지의 그 유명한 조조맞다)에 의해 흉노는 다섯개의 부락, 즉 오부(五部)로 나뉘어진다. 조조도 흉노에 관하여 신경을 쓰고 있었고 북방에서의 위험요소를 제거할 겸, 관리도 편하게 할 겸해서 그 힘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흉노를 다섯갈래로 찢어놓은 것이다.
 
5755716.jpg
 
조조(曹操). 그가 후한에서 실시한 흉노 5부 분할 정책은
이후 삼국시대의 그가 세운 위(魏)에서도 적용되었으며,
위(魏)를 계승한 진(晉)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라 실시되었다.
 
 
조조는 이 다섯개의 부에 조정에서 뽑은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독하게 했고, 각 부의 흉노 왕족들의 아들들을 데려다 볼모로 삼아 중국에 두는 대신에 그 실력자들에게 여러 예물과 곡식 등의 물자들을 보내준다. 혹시나 모를 반란에 대비하여 흉노 왕족들의 왕자들을 잡아다가 인질로 삼은 것이고 또 그들을 달래기 위해 예물을 주어 달래주어 당근과 채찍 정책을 적절하게 사용한다.
 
그리고 삼국시대 이후에 들어선 진(晉)에서도 조조의 대흉노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여 유지한다.
 
 
여기까지가 당시 진(晉) 치하의 흉노의 상황이다.
 
 
 
- 유연(劉淵) -
 
 
 
삼국지를 보면 어부라(於扶羅)라는 흉노족 인물이 등장한다.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생소할 만한게 삼국지연의에서도 어떤 평역버전에서는 아예 안나오고 이문열의 삼국지에서나 짤막하게 한줄 나오기 때문이다. 그나마 나오는 기록도 원술(袁術)과 연합하여 조조와 싸우다 패하는 모습으로 잠깐 등장할 뿐이다.
 
K-119.png
 
일본에서 만든 삼국지 시리즈 게임 중 하나인 삼국지12PK에서는
이런 일러스트로 그려져 나왔다.
 
 
어부라의 동생, 호주천(呼廚泉)은 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되었고 조조에게 대항했던 형과는 달리 조조에게 복속되어 위에서 설명한 오부 분할 정책에 따라 다섯개의 부 중 하나인 좌부(左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죽은 어부라에게는 유표(劉豹)라는 아들이 있었다. 숙부 호주천이 좌부 흉노의 선우(單于 : 흉노 말로 부족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말이다)가 되자 유표는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된다. 여담으로 이 유표도 삼국지 연의에 등장한다. 
 
고간(高幹)이 원군을 요청하자, “나는 조조와 원수를 진일이 없거늘 어찌하여 조조와 나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하는가?” 고 하며 고간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 삼국지연의
 
배경은 원소와 조조의 관도대전 이후,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토벌할 때의 일이다. 원소 측의 장수인 고간이 조조에게 패해 쫓겨가 흉노족인 좌현왕 유표에게 도움을 청하자 유표가 거절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호주천이 조조로부터 관직을 수여받아 서기 216년, 후한(後漢)으로 넘어가 선우자리가 비자 조조에 의해 선우로 임명된다.
 
유표는 남흉노 왕가인 호연씨(呼延氏) 가문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유연(劉淵)이다. 위에서 쓴 소제목의 주인공이다.
 
 
호연씨가 용문(龍門)에서 아들을 점지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머리에 뿔 둘 달린 커다란 물고기 한 마리가 제사를 지내는 곳까지 뛰어 오르자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말을 들은 무당은 "이것은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날 밤, 호연씨는 꿈을 꾸었다. 낮에 보았던 큰 물고기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더니 다가왔다. 그의 왼손에는 달걀 반 정도 크기의 물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그는 그것을 호연씨에게 주면서 말했다.
 
"이것은 태양의 정기다. 먹으면 귀한 아들을 얻으리라."

꿈에서 깨어나 이 사실을 유표에게 말하니, 유표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다. 가평(嘉平) 연간, 아들이 태어났는데 왼손에 '연()'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름을 '연' 이라고 지었다. - 진서 유원해(元海)기
 
 
'원해(元海)' 는 유연의 자(字)다. 가평(嘉平) 연간은 위(魏)의 당시 연호로 서기 249년~254년을 통틀어 '연간' 이라 부른다. 대개 영웅들의 탄생설화가 그러하듯, 이 경우도 훗날 유연의 비범함을 예고하는 설화라 하겠다.
 
 
이제부터 유연에 대해 다룰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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