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 강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천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문정희, 남편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심보선, 이 별의 일
너와의 이별은 도무지 이 별의 일이 아닌 것 같다
멸망을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에 이별하자
어디쯤 왔는가, 멸망이여
강성은, 방
옆으로 누우면 벽
똑바로 누우면 천장
엎드리면 바닥이었다
눈을 감으면 더 좋았다
가끔 햇빛이 집요하게 창문에 걸쳐 있다 돌아가곤 했다
윤제림, 한 여름밤의 사랑노래
산장여관 입구에도 매표소 광장에도
학소대에도 선녀탕에도
오늘은 어제보다 더 많은 별이 떴다
막차마저 놓쳤는지 이십 리 길을 그냥 걸어들어온
가난한 연인들과 민박집 주인 여자의
숙박비 흥정이 길어지고 있을 뿐
산속 피서지의 밤은 대체로 평화롭다
제아무리 잘 된 영화래봤자
별 다섯 개가 고작인데,
우리들 머리 위엔
벌써 수천의 별들이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