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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제령 사무소 3
게시물ID : humorbest_69285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스키튼
추천 : 17
조회수 : 1836회
댓글수 : 9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13/06/10 01:09:42
원본글 작성시간 : 2013/06/02 20:10:43

[줄게 있으니까, 오늘 오후엔 꼭 들러줘]
오늘 새벽 은수가 남긴 음성 메시지에는 오늘 꼭 가게에 들러달라는 말이 남겨져 있었다.
별로 다급한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꼭 들러달라는 말은 단호하게 들렸기 때문에 먼저 은수의 가게에 들르고 내 볼일을 보러 가기로 했다.


“나 왔어~”
창고에선 낡은 책 내음이 풍겼다.
“아직도 책 정리가 안 끝난 거야?”
“어, 아무래도 서신(書神)이 붙은 거 같아. 정리하고 정리해도 책이 줄질 않네.”
그렇게 말하는 은수의 등 뒤로 냉장고 상자 만한 크기의 박스가 족히 열댓 개는 있었다.
“불어난 책을 실컷 정리해서 묶어 놓으면 서신이 들린 책만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니 도무지 정리가 되질 않아.”
“너 혹시 나한테 이거 잡아 달라고 하려고 부른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책만 나르는 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게다가 내가 온 후로도 눈대중으로 어림잡기에도 최소 서른 권은 불어나 있으니 정리가 끝날 리가 만무했다.
“나한테 준다는 게 뭐야? 우선 그거 받고 같이 정리하자.”
“그럴까 그럼?”
은수가 나에게로 주의를 돌리자, 책들은 움찔했다. 역시 서신인가 보군. 분명 서신이 움찔했을 것이다.

 

“이건 영환을 사용하는 영총(靈銃)이야. 네가 쓰기에 좋을 거야.”
“흠.. 난 자동보다 리볼버가 좋은데.”
“……눈앞에 귀신이 오락가락하는데 장전하느라 시간 다 보낼래?”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아무튼, 넌 너무 마구잡이로 물건을 쓰는 거 같아. 앞으로는 차라리 이걸 써. 탄환이야 기생령을 다져서 만들면 되니까, 필요할 때마다 가지러 오던지 아니면 만들어서 써도 되고.”
은수가 건네준 총은 토카레프를 살짝 개조한 물건이었다. 당연히 안전장치는 없었고 외관은 원래의 토카레프 디자인에 양 옆 부분만 흰 은으로 테두리를 넣었다. 손잡이 바닥면에는 내 이름까지 새겨져 있었다. 꽤 마음에 드는 물건이었다.
“한번 시험해봐”

 

퍽!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나 장전도 안 했는데”
소리 나는 방향을 보니 벌써 백 권 정도는 족히 불어난 책이 꼭대기부터 하나씩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서신다운 짓이네.”
서신은 개구장이 아이 같은 성격의 혼령이다. 책에 붙어 살면서 그 책을 수 십, 수 백배로 늘려놓아서 주인을 곤란하게 만드는 영이다. 게다가 주목 받기를 좋아해서 자기에게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멀어지면 당황하고, 어떻게든 관심을 끌려고 별 짓을 다하는 마치 도깨비 같은 영이다.
“아무튼 이 총은 너무 고마워. 앞으로 잘 쓸게.”
“어디가, 도와준다며!”
“오늘은 너무 바빠서 이따 저녁에 올게. 그럼”
뒤에서 뭐라고 외쳐대는 은수를 뒤로 하고 나는 재빨리 나왔다. 서신은 별거 아니지만 영 귀찮은 녀석이거든.

 

*

 

오늘의 의뢰는 젊은 남성에게 받은 것이었다. 전화통화로 대략의 전후 사정을 듣긴 했지만, 어차피 이런 일들은 몸으로 부딪혀봐야 감이 오니까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유리문에 달린 종의 딸랑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약속을 한 전통찻집에 들어서니 시원한 솔잎차 냄새와 약간 달착지근한 희미한 대추차 냄새가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얄쌍하게 만든 개량 한복에 광목 앞치마를 두른 서글서글한 아가씨가 다가와 물었다.
“안녕하세요, 좋은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총 몇 분이 오셨죠?”
“아, 사람을 찾고 있어요. 김도현씨라고 하는데요.”
“잠시만요.”
여전히 생글거리며 카운터로 들어간 아가씨는 손님이 남긴 메모를 뒤적거렸다.
“아, 여기 있네요. 김도현씨.. 와계시네요. 이쪽으로 오세요.”


아가씨를 따라 간 곳은 많아야 다섯 명도 못 들어갈 듯이 작은 골방이었다. 정갈한 분위기가 풍기는 그 방은 한 벽면이 모두 창으로 되어 있어 찻집에서 정성 들여 꾸민 뒤뜰이 훤히 보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지안나에요.”
“저..도 처음 뵙겠..습니..다. 김도현..입니다.”
시원스레 웃고는 허둥지둥 명함을 내미는 모양새나 옷차림으로 보나 명함에 직책이 없고 사원이라는 표시로만 보나 아마 군대를 다녀오고 갓 졸업해서 이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으로 나이는 아마 스물 일곱 전후 일거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썩 돈 되는 일은 아니겠어.
“우선, 차라도 시키시고 얘기하죠.”

 

차를 마주 두고 얘기가 시작될 것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 남자는 수줍어하는 성격인 거 같았다. 말을 몇 번 꺼내려다 자꾸 얼버무리는 폼이 꼭 엊그제 죽인 비실비실한 지박령 같았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람은 딱 질색이다.
“저.. 명함이 참 심플하시네요..”
십 여분을 기다린 끝에 나온 말이었다. 나는 원래 직책이나 명예욕 따위를 질색하기 때문에 명함엔 단지 내 이름과 핸드폰 번호만이 있을 뿐이었다. ‘참 심플하다’는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머릿속의 인내심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떤 일로 나에게 의뢰를 하는지만이 나의 관심거리였다. 제발 말 좀 띄엄띄엄 하지 말고 시원하게 했으면. 이런 종류의 일은 일을 의뢰하는 사람이 난처해 할만한 내용의 사연이 많기 때문에 먼저 이유를 묻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다. 의뢰인이 스스로 마음을 열고 다가와야 사건에 대한 협조도 쉽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로 저에게 의뢰를 하신건가요?"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말을 꺼냈다.


“저……저기 그게……”
저 한마디를 하고 또 몇 분째 조용하다. 이러다 열 받아서 아까 받은 총으로 내 머리를 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저희 집 개가 이상해요..”
“네? 앗뜨뜨!”
갑자기 뜬금없는 말에 입에 갖다 대던 연꽃차에 입술을 데었다.


“어떻게 이상하다는 거죠?”
“저.. 저는 혼자 사는 데.. 아니, 저기.. 저와 같이.. 흰둥이가.. 사는데.. 일주일째.. 좀 이상해요..”
“흰둥이라뇨?”
“..흰둥인..아주..예쁜..개에요... 얼마 전까지..만해도.. 건강했는데..좀..그래요..”
“그럼 집으로 가보죠.”
더 이상 이 더듬거리는 말을 듣느니 머리가 터질 지경이어서 차라리 집에 가서 상황을 보는 게 낫겠다 싶었다.

 

*

 

그 남자가 사는 곳은 서울을 한 시간 반 정도 벗어난 한적한 작은 동네였다.
“이렇게 멀리 사시면 출근할 때 불편하시겠네요.”
“하..하지만.. 우리..흰둥이가..좁으면 싫어해요..”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젠 말을 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한 곳은 전원 주택으로 멀리서 보기에도 큰 마당이 돋보이는 집이었다. 마당이 집에 비해 너무 넓어 보여 뭔가 좀 언밸런스 하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보면 누구나 한번쯤 살고 싶을 만한 자연을 벗삼은 위치와 환경의 집이었다. 보통 마당이 넓은 집은 마당 한 켠에 주차장을 만드는데 그 남자는 들어가기 전, 대문 바로 옆에 주차시켰다. 행동으로 봐서는 흰둥이라는 개를 생각해서 그런 것 같았다.
차에서 내려서 대문을 향해 가면서 안의 그 개를 볼까 싶어 슬쩍 들여다보려고 했지만, 담이 워낙 높아 소용없었다.


“이..이쪽..오세요..”
친절하게 문을 열어주는 남자를 따라 집안에 들어가려는데,

 

두근,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나보다 더욱 대단한 영능력을 가진 어떤 것이 나에게 경고하는 느낌이었다.
들어가려는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그래도 기운을 집중해서 들어갔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될 것 같은 조짐이었다.


“흰둥아~ 흰둥아~ 아빠 왔다!”
그 남자는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며 흰둥이를 불러댔다. 아까 찻집에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말을 더듬지도 않고 수줍어하지도 않는 보통의 남자의 모습이었다.
“아이구, 흰둥이가 아빠 오래 기다렸구나~!”
마당 끝에서 어슬렁 거리며 다가오는 흰둥이는..

젠장, 저건 개가 아니잖아!


흰둥이는 호랑이였다. 그것도 하얀 백호.

아까 느꼈던 강한 기운이 흰둥이를 중심으로 퍼져 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작명센스 하고는. 이게 어딜 봐서 흰둥이란 말이야.

그 남자의 허리춤에 머리를 비벼대는 백호는 영락없는 애완견의 모습이었다. 뒤통수를 맞은 듯 황당한 기분과 더불어 백호의 기운에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저 남자는 이 기운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굉장히 활기찬 모습이었다.
“잠시만요, 제가 마실걸 내올게요.”
흰둥이를 보자 신이 난 그 남자는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남은 건 다리가 풀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버린 나와 백호뿐이었다.


- 이봐, 인간.


두근,
다시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 내 말 다 들리지?


나는 입이 떨어지질 않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백호는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흰둥아!! 흰둥아!!!”
멀리서 음료수를 들고 오던 남자는 백호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놀라 뛰어왔다.
“흰둥아!! 흰둥아아아!!!!”
백호가 쓰러지자, 내 몸의 기운도 조금씩 다시 돌았다. 말을 꺼내려 했지만 기운이 다 돌지 못해 목이 잠겨 목소리가 잘 나오질 않았다.
“기..김도현씨.. 흰둥이가 왜 이..러는 거죠?”
“…일주일전부터 자꾸 이렇게 하루에 몇 번씩 쓰러집니다. 이 녀석이 이럴 때마다.. 꼭 죽는 것 같아서 얼마나..마음이……”
“저..저를 일으켜주세요..”
그 남자의 부축을 받고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백호는 현재 멸종되지 않은 공식 동물 중에서 최고의 영물답게 나의 기운을 다 빼놓았다.


집안으로 들어가 거실의 소파에 잠시 누워 십 여분간 기를 돌렸다. 다행히 점차 손끝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도 잘 나오기 시작했다. 옆으로 보이는 주방에선 그 남자가 커다란 고기를 토막 내고 있었다.

“흰둥이의 저녁 식사로군요.”
“아, 일어나셨습니까? 하하.. 네 이건 녀석의 저녁밥이죠.”
“밥값으로 많은 돈이 들겠네요.”
“아뇨, 꼭 그런 것도 아니에요. 근처 투견장에서 죽어 나오는 개들의 고기를 많이 쓰거든요.”
“네? 투견장이요?”
“네. 여기서 오 분쯤 가면 비밀리에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투견장이 있는데, 하루에도 개들이 수십 마리가 죽어 나오니 시간만 잘 맞춰가면 싱싱한 개고기를 잔뜩 얻어 올 수 있지요.”
“근데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일을 의뢰 하셨지요? 저렇게 쓰러지는 증상은 수의사들이 충분히 해결할 텐데요.”
“...수의사도 여러 번 불렀지만.. 흰둥이를 보자마자 도망가거나, 흰둥이를 탐내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그래도 영능력자를 부른다는 건 좀.. 말이 안 되는데요.”
“지안나씨는 해결 못하는 일이 없다고 들었거든요. 게다가 느낌에 저 녀석이 아픈건 몸이 아닌 거 같아요."
“..........”


수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 보면 김도현씨는 옳은 판단을 한 거다. 저렇게 영기가 충만한 백호는 몸이 아플 리 없으니까. 분명히 뭔가 영적인 타격을 입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람 말을 잘 듣는 백호라는 게 더더욱 미심쩍었다.

“저는 먼저 나가서 흰둥이를 살펴볼게요.”
나가려다 혹시 몰라서 장전한 영총을 등허리에 끼웠다.


마당을 가로질러 가니 아까 쓰러진 백호는 그 자세 그대로 누워있었다.
아까보다 영기는 확실히 줄었지만, 그래도 영물인지라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잔잔한 영기가 주변을 맴돌았다. 몸을 살펴보았으나 물리거나 싸운 자국은 없었다. 내 짐작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영기를 가진 영물은 보통 다른 영에게 빙의를 당할 일이 없으니 나는 실수로 난 상처로 뭔가가 백호의 몸 안으로 들어가 문제가 생겼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럴만한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몸을 살펴보던 나는 갑자기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

 

- 인간!

 

어느새 눈을 뜬 백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름이 돋았지만 아까처럼 몸이 후들거리지는 않았다. 아마 백호가 나를 위해 스스로의 영기를 억누른 모양이었다.

 

-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어.
‘무..무슨 말이지’


- 나는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단 말이야.
- 나는 곧 죽을 거야.
- 네가 해줄 일은 하나뿐이야.

 

죽을 것을 미리 알고 있다니. 나는 더 할말이 없었다. 게다가 내 머릿속의 생각을 환히 읽는 백호에겐 더더욱 할말이 없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 그 영총으로 나를 쏘아 죽여줘.

 

‘뭐?’


백호는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그 눈빛은 깊은 바다 속 심연을 들여다 보는 느낌을 주었다.

 

- 인간, 난 원래 이런 생활을 하지 않았어. 자유롭게 인간의 섬김을 받는 영물이었지. 하지만..
- 요즘은 백호를 전시물로만 취급하니 더 이상의 섬김이 없었지...
- 나는, 나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저 남자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었다. 그것이 나의 실수였어.

 

‘이봐, 단지 자존심 때문에 죽으려는 거야? 음식을 받아먹었다는 이유로?’

 

- 그 때문에 죽으려는 게 아냐. 난 스스로 ‘죽으려’ 한 적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어가고 있을 뿐이지.

‘무엇 때문에, 왜 죽어가고 있는 건데. 나는 널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 아니. 그건 불가능해. 나는 충령석(忠靈石)을 먹어버렸어.


충령석. 그 것은 동물의 몸 속에 주로 생기는 영의 덩어리이다. 간혹 가다 신문이나 소문으로 충성스러운 개가 주인을 따라 죽었다는 둥, 불난 집에서 사람을 구하고 죽었다는 둥의 행동을 하는 짐승의 몸 안에는 충령석이 있는 것이다. 굉장히 우호적인 영의 덩어리이기 때문에 나는 이 충령석을 없애본 기억은 없다. 오히려 개들의 몸 안에 충령석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주인들은 더더욱 개들을 아낄 뿐이었으니까.


- 운이.. 나빴지. 충령석을 지닌 개를 먹다니.

 

백호 같이 독립성이 강하고 우월한 짐승이 충령석을 먹었다는 건, 곧 정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충령석은 한번 머물면 그 숙주가 죽을 때까지 없앨 수 없다. 동그란 크리스탈 같은 그 영은 몸에 들어가면 곧 녹아버려 숙주와 한 몸이 되어버리니까 없앨래야 없앨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거의 무한한 수명을 지닌 백호가 충령석을 먹었다면...

 

‘지금의 생활도 나쁘진 않잖아. 굳이 죽을 이유가 뭐가 있어.’

 

- 아까도 말했듯이 죽는다는 걸 내 의지로 정한 게 아냐. 죽음이 눈앞에 와 있어. 
- 그 날, 그 고기를 먹은 이후로 갑자기 내 몸이 노화가 진행되고 있어. 이젠... 난 걸을 힘 조차 없어.
- 난 절대로 저 남자 앞에선 죽을 수 없어.
- 차라리 네가 나를 죽여줬으면 해.
- 부탁이야, 인간.

‘…………’

 

더 이상의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가만히 허리로 손을 가져가 영총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은장식의 느낌이 지금의 내 기분을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첫 손님은 백호로군. 영광이야.
애써 태연하게 표정을 짓고는 백호의 정수리에 총을 겨눴다.

 

‘깨끗하게. 아프지 않게 한번에. 그렇게 되도록 할게’

- 고맙다.


탕!


총소리와 함께 나의 어깨도, 백호의 어깨도 들썩였다.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백호의 눈은 몸은 서서히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순간에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후, 이젠 저 남자에게 백호의 죽음을 알려야겠군. 어떻게 알린담.

백호의 몸이 흰 연기가 되어 완전히 사그라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백호가 누워있던 자리의 잔디를 손으로 한번 다듬고는 일어섰다.
어떻게 말을 꺼낼까, 무거운 마음으로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퍽!!!

 

다행히 그 물건은 내 얼굴을 스쳐 바로 뒤 현관문에 박혔다.

 

‘칼?!’

“니가 내 계획을 다 망쳤어…”
그 남자는 중얼거리며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꺄앗!”
재빨리 몸을 숙여 피하고 영총을 꺼냈으나 사실 소용은 없었다. 그냥 총알의 힘은 사람을 치명상을 입힐 수 없을 만큼 약했기 때문이다. 주머니를 뒤져 잡히는 대로 부적을 꺼냈지만 하나도 먹히질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백호를 죽여!!!”
계속 도망을 다니다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남자의 손에 머리칼이 잡혔다. 그 남자는 다른 손에 든 칼로 머리를 내려쳐 나를 죽이려 했지만 격렬히 반항하자 결국 머리칼과 그 남자의 손가락 끝만 잘려버렸다.

“이 년이!!!”

나는 그 틈을 타 현관으로 달려가 밖으로 나갔다. 벌써 밖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를 쫓아 달려 나왔다.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아, 젠장! 이러다 정말 죽겠네!’
거리는 거의 좁혀져 이젠 일 미터 가량이 되었다. 갑자기 그 남자는 몸을 날려 나를 덮쳤다.


쿠당!
나는 남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그 남자는 손가락이 잘린 손으로 내 목을 조르며 말했다.
“너! 너! 너 때문에 모든게 다 수포로 돌아갔어!”
남자의 눈빛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고, 내 목을 점점 조이며 칼을 크게 휘둘렀다.
‘안돼!’


안돼!-라고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무언가 내 몸을 통과한 느낌이 들었다.
아주 시원한 봄바람이 스친 듯 상쾌한 느낌이었다.
나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몰라 눈을 살짝 떴다.

 

- 인간. 너는 너무 약해.


나는 내가 본 그 때의 광경은 잊을 수 없었다. 그 남자는 내 옆에 굴러 바닥에 쓰러져 있고, 아까 그 백호가 입에 쓰레기 같은 것을 물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쓰레기 같은 지박령들이 수백, 수천 개 뭉친 것들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 이 녀석들이 이 남자의 몸 속에 살면서 이 남자를 이용한 거야.

“뭘, 뭘 이용해?”

- 이 놈들은 비열하지... 내가 배고프다는 걸 알고 기가 약한 사람의 몸에 들어가서 내게 일부러 충령석을 지닌 개를 먹인 거야. 그리곤 내 영기를 써먹은 거야.
- 내가 죽을 때가 다가온걸 알자, 너를 불러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살리려고 했겠지. 내가 죽으면 자기들이 누리는 영기도 사라지니까.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충격을 받았는지 말이 잘 나오질 않았다.
오늘 하루 종일 백호에게 눌려 있는 것 같았다.

 

*

 

“……근데, 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아까도 말했잖아. 데리고 온 게 아니라 스스로 따라온 거야.”
“저렇게 덩치 크고 강한 영을 너 같은 사이비가 감당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방금 말했지! 내 의지로 한 게 아니라고!”

 

아침처럼 은수와 내가 차 한잔을 두고 앉아 있다. 그리고 옆엔 영기를 억누르고 앉아 있는 커다란 백호 한 마리.

 

- 인간. 내가 온걸 고맙게 생각해.
이 말을 들으니 기분이 울컥했다.

“시끄러, 이 덩치만 큰 고양이 새끼!!!”
홧김에 말을 내지르자 갑자기 백호가 영기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덜덜 떨렸다.

 

“아..아니 제가 뭐라고 했나요..”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감당도 못하면서”

- 거기 인간. 나는 의지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그러니 감당할 필요가 없다.

“그럼, 왜 도대체 나를 따라오는 거야”

- ...충령석을 먹은 짐승은 죽어서도 충령석이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난 쓰레기 같은 지박령에게 충성할 순 없다. 차라리 네가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래서 영으로 바뀌는 순간에 너를 맨 처음으로 보기 위해 계속 눈을 맞추고 있었지... 그리고...

“그리고 뭐?”

- 아니다.

은수와 나는 마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골칫덩이가 생겼다는 기분이 든다.


“참, 서신은? 책은 다 정리 했어?”
은수가 아무 말도 않고 벌떡 일어나 뒤쪽의 창고 문 중 하나를 열었다. 열자마자 책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쏟아지는 와중에도 한 권 두 권씩 더 불어나고 있었다.
“전혀 손을 댈 수가 없어.”
“거참, 이러다 책에 파묻혀 죽겠네.”

- 고작 서신 하나로 내 주인을 죽게 할 순 없지.

백호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창고로 다가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순간 책이 하얗게 질리더니-아마 서신이 하얗게 질렸겠지만- 바람같이 책들이 사라지고 바닥에 남은 건 열 몇 권뿐이었다.

- 인간, 이제 해결 됐지?

“오.. 너도 꽤 쓸모가 있는데? 청소는 할 줄 알아?”

- ...나는 주인을 지키고 따를 뿐이지 주인의 가정부가 아니다.

“아하하..뭐 그냥 물어봤을 뿐이야.”

-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

 

“ 그런데 말이지. 생각해보니까, 너 이름이 없잖아. 앞으로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 좋을 대로.

“흠… 백호니까, 복호는 어때? 복을 부르는 호랑이.”

- ...촌스럽다.

“내 맘대로 하라며!”

- ...그냥 호우(護友)라고 불러라.

“호우?...그래, 괜찮은 이름이네.”

- 그 이름 그대로, 나는 너를 지켜주는 친구다.

 

이렇게 백호와 나의 인연은 친구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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